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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누구?] 37대 제주도지사 ... '수석' 타이틀 대명사, "제주발판 새 미래 도전"

 

독주였다. 그가 관덕정 앞마당에 등장하고 나서 줄곧이었다. 제주도민들은 환호했고 결국 그는 고작 두달 보름여의 선거운동으로 승자가 됐다. 혜성처럼 나타나 돌풍의 주역이 됐고 급기야 ‘원희룡 바람’은 태풍을 만들어냈다.

 

제37대 제주도지사 당선인 원희룡(50).

 

그는 ’제주의 자존심’이라고 불렸다. ‘제주의 자부심’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가 있었기에 고작 말이나 키우는 제주가 아니라 ‘어엿한 인재를 배출한 제주’란 소리도 나왔다. ‘대입 학력고사 전국 수석, 사법고시 전체 수석’이란 타이틀로 그는 그렇게 제주의 자존을 세웠다.

 

 

서울대 법학과를 다니던 그는 한때 노동운동의 길에 뛰어들어 제주인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더니 사법고시에 합격, 잘 나가던 검사직을 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검사복을 벗고 정치에 입문했다. 그것도 서울의 ‘교육1번지’인 서울 양천갑을 근거지로 떡하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내리 3선을 하더니만 여당 내 ‘소장 개혁파의 원조’란 닉네임도 꿰찼다. 서울시장 후보로 꾸준히 이름을 올렸고, 여당 사무총장·최고위원을 지내며 차기 대선 주자로도 꼽혔다.

 

제주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치고 대한민국 수도 서울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된 것도 그가 처음이고, 여권의 최고위원 자리에 오른 것도 그가 처음이다. 물론 대권 주자로 거명된 것 역시 그가 처음이다.

 

 

 

그는 2012년 6월부터 1년간 유럽과 중국에서 머물렀다. 2011년 19대 총선 불출마를 선언하며 ‘40대 젊은 당 대표’에 도전했다가 4위로 최고위원에 선출되는 데 그친 이후 선택이다.

 

그렇게 칩거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난해 말부터 심심찮게 그가 제주도지사 후보감(?)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서울시장감이지 무슨 소리냐”는 반박이 지속됐고, 본인도 손사래를 쳤다. 심지어 제주 몇몇 인사들이 그를 북경으로 찾아가 ‘제주지사 출마’를 권유했지만 그에게서 돌아온 답은 ‘난 아니다’였다.

 

연말과 연초를 거치며 여권 내부에서 다른 기류가 감지됐다. 이름하여 ‘중진차출론’. 여권의 선거전략·기획그룹에서 그의 이름이 남경필·정몽준과 한 세트로 거론됐다. 필승카드란 명분이 여권이 종용이었고, 그는 고뇌했다. “회유와 설득, 종용을 뛰어 넘어 압박으로까지 다가왔다”는 고백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2월, 그리고 3월로 접어들면서 그의 ‘라디오 정치’는 조금씩 강도와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고 급기야 ‘100% 여론조사 경선’ 수용을 전제로 한 ‘출마’의사로 변화했다.

 

제주도지사 선거판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돌연 등장한 전폭기의 출현 앞에 거함 우근민 현직 지사는 ‘경선 불수용’ 카드를 내던지고 고뇌의 길로 접어 들었다.

 

그는 지난 3월 16일 출마를 공식선언했다. 제주시 관덕정 광장 무대에 오른 그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알려면 제주를 보라”고 선언했다. 그가 양손으로 치켜 든 카드엔 “어머니, 원희룡입니다. 제 전부를 바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명절인사 드리러 오지 않았다. 이제 제주를 다시 일으켜 세우러 왔다. 일하러 왔다”고 그는 말했다. “제 가슴이 물으면 하늘이 대답하고 제주도민이 결정할 것”이라고 외쳤다. “제주의 발전을 입증, 대한민국의 변화를 이끌어내겠다”고 호소했다.

 

 

지지율 고공행진이 이어졌다. 50~60%대를 웃도는 그의 독주에 여·야 경선 주자들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4월로 접어들자 변수 중 하나로 지목되던 현직 우근민 지사마저 ‘불출마’를 선언, 원희룡 후보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그와 맞선 야권의 대항마는 만만치 않았다. 상대는 노정객 신구범이었다. 김우남·고희범 후보와의 합의추대 진통을 거쳤지만 새정치연합의 단일 후보로 나선 신구범 후보는 예상대로 거함이었다.

 

관선을 거쳐 민선 1기 초대 지사를 지낸 그는 삼다수와 관광복권·컨벤션센터·세계섬문화축제 등 제주도의 대표적인 히트작을 만들어낸 주역이다. 1998년 공직을 떠난지 십수년여가 흘러도 수많은 추종자를 거느리고 있는 그였고, 풍부한 경륜·식견이 탄복할 정도이기에 결코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니었다.

 

 

 

TV토론을 하면서 원희룡 후보는 배우는 자세로 임했다. 수도 없이 쏟아지는 신구범 후보의 아이디어와 정책에 맞서기보다 하나하나 되짚어보며 배우고 익히는 자세로 공손·겸손의 자세를 내밀었다. “아쉽다”는 지지자들의 반응도 있었지만 “예의가 돋보였다”는 칭찬의 소리도 들려왔다.

 

솔직히 그는 제주를 잘 몰랐다. 제주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대학입학으로 제주를 떠난 뒤 살아보지 못한 지라 제주를 알아야 했다. 그것부터 먼저라고 판단했다. 한 달이 다 되도록 170여개 마을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이동거리만도 1800km.

 

대규모 유세를 할 수도 있었지만 선거중반 터진 세월호 참사에 군중유세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만의 게릴라식 유세가 시작됐다. 시장이든, 골목이든, 상가든 가리지 않고 돌며 감귤컨테이너 상자 하나가 그의 연설무대였다. 즉석에서 이동식 앰프를 빌려 마이크로 호소했고 주민들의 의견도 들었다.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고 제주도민들도 서서히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그는 본선 후보등록 시점에 도민캠프로 이름 지은 그의 선거사무소에서 ‘선거혁명’을 부르짖었다. 돈 안드는 깨끗한 선거와 운동화 선거를 약속했다. 캠프는 자원봉사 시스템으로 꾸렸고 일을 돕는 측근들에겐 “당선 뒤 자리를 요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까지 받았다.

 

5월 중순 지지세가 잠시 주춤거리는 듯 했지만 그 정도였다. 마지막 여론조사까지 50% 후반대의 초강세 지지세는 유지됐고, 지지자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오래된 미래-.’ 가슴에 품었던 그의 제주 비전은 한 마디로 이렇게 축약된다.

 

“세계 유명 관광지 어느 곳도 전통이 숨 쉬는 곳에서 문명의 교류를 시작한다”며 옛 제주역사의 중심무대 관덕정을 출마선언 장소로 선택한 그는 “보란 듯이 동북아 최고의, 대한민국만의 제주도를 실현시키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대한민국의 1%가 제주도라고 하지만 미국의 0.1%인 아칸소가 어엿한 대통령을 배출한 신화가 꿈이 아니라 현실이 될 수 있다”며 제주도지사를 발판으로 한 ‘대망론’도 그는 숨기지 않는다. “그게 우리 제주도민의 꿈이고 하늘의 뜻이라면 가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제주를 발판으로 그가 펼칠 새로운 제주의 미래가 이제 출발선에 섰다. [제이누리=양성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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