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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제주]오멸 감독, 미술·영극·영화 등…장르불문 종합예술인
제2의 4.3영화 크랭크인 앞둬…故 김경률 감독 총감독으로 섭외

 

저승에 몸 담은 이와 영화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있다. 어떻게 죽은 사람과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인가?

 

그런데 이 사람은 죽은 사람에게 총감독을 시키겠다고 한다. 자기는 일개의 감독일 뿐이란다. 감독역은 저승의 죽은 사람이, 이승에서는 자기가 맡으면 된다고 말한다.

 

자기는 죽은 사람과도 얘기할 수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가능하단다. 까칠한 수염에 매서운 눈매를 가진 이제 갓 40대에 들어선 제주 청년이 뱉은 말이다.

 

패기와 열정이 넘쳐 보이는 이 청년은 대한민국 독립영화계의 작은 거인 오멸(40)이다.

 

그의 본명은 오경헌. 오멸은 그의 예술활동에서 쓰는 예명(藝名)이다. 예술계의 괴짜라고 표현할 수 있을 만큼 아주 획기적인 기획으로 예술 활동을 펼치고 있는 예술인이다.

 

제주의 스토리가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제주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의 직업은 미술인, 연극인, 영화인, 행위예술가 등 한마디로 종합예술인이다. 예술장르는 거의 모두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듯싶다.

 

대학만 10년을 다녔고, 졸업을 앞둔 대학교 4학년 때 돌연 자퇴했다. 수시로 휴학해 육지로 들락날락하기도 했다. 친구가 운영하는 PC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그 게임 아이템으로 거리에서 거리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영화도 많이 찍었다. 장편을 1500만원도 안 들이고 찍었다. '제주판 워낭소리'로 불리는 영화 '어이그 저 귓것'이 그의 작품이다. 계획도 없이, 닥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생각나는 대로 영화를 만들고, 연극도 하고, 퍼포먼스도 펼쳤다.

 

상도 많이도 탔다. 그의 영화와 연극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런 그가 또 다시 주목받을 만한 일을 저지르고 있다. 죽은 자와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것도 제주의 영원한 아픔의 역사인 4.3을 가지고.

 

광고카피 ‘너! 어디에서 왔니’라는 글이 생각 날 정도로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기이해 보이기도 하고, 신기해 보이기도 한 그의 예술 철학과 삶의 철학은 무엇인지, 앞으로 추진하는 영화에 대한 얘기들을 들어봤다.

 

-학창시절부터 예술인이 되겠다고 생각했나?

 

“전혀 아니다. 초등학교 때에는 핸드볼선수였고, 중학교 때에는 야구선수였다. 그러다가 체격도 딸려 운동을 접었다. 고등학교 때 성적이 좋지 않아 성적을 맞추다 보니 대학교를 미술학과로 가게 됐다”

 

-대학생활은 어땠나?

 

“학교 다니면서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 봤다. 수시로 휴학을 해댔으니 대학만 10년을 다녔다. 대학 4학년 때에는 결국 자퇴했다. 교수들이 잘 안 가르쳐 줬다고 생각해 홧김에 학과 유리창을 다 깨버렸다. 그래서 교수들에게 고소당했다. (교수들로부터 고소당한 일은)학교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라고 들었다. 나름 유명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과격했나?

 

“고교시절 한 친구가 3년 동안 지켜보면서 학교에서 싸움을 내가 제일 많이 했다고 하더라. 남자로서 자존심 문제였던 것 같다.”

 

-연극에도 관심이 있었나?

 

“예술을 하면서 미술만이 아닌 다른 분야도 이해해야 내 분야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않을까 해서 연극을 공부했던 것이다. 휴학하면서 극단에 들어가 연극도 했고, 전위예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휴학 할 때마가 서울에서 그런 분야에 대해 공부하려 했지만, 생활고에 시달려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했다. 우선 생활고를 해결하려고 막노동, 신문배달, 미술학원 강사, 비디오방 점원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기틀을 잡기 힘들었고, 막연한 도전만 몇 차례 하다가 포기했다.”

 

-본격적인 연극은 언제부터였나?

 

“26살 때 대학 자퇴 후 친구가 운영하는 PC방에서 2년 동안 먹고살면서 게임만 했다. 28살 때 게임을 하다가 재미있는 게임이 있기에 그 게임 CD를 갖고 나와 제주시청 어울림 마당에서 퍼포먼스 작품을 만든 적이 있다. 그때 ‘테러제이’라는 팀을 조직했다. ‘거리문화를 살리자’라는 테마로 도내 공연자들 불러 모아 어울림 마당에서 시작을 했다. 퍼포먼스를 하고, 공연자들은 라이브 공연을 했다. 첫 회에는 200회 이상의 거리공연도 했다. 이후 대구에 공연하러 갔다가 거리마임공연을 보고 돌아와 2002년부터 ‘머리에 꽃을’이라는 거리예술제를 하게 됐다. 모두 8회에 걸쳐 2009년까지 한 그 축제는 2008년 한국예술위원회에서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다. 상금만 3000만원일 정도로 큰 상이었다. 서울에서는 난리가 났는데, 제주에서는 무관심했다. 쟁쟁한 축제 속에 제주도 축제가 올해의 예술상 받았으니 당시 전국 축제 프로그래머들이 난리가 났었다”

 

-기존 예술의 틀을 깬 파격적인 예술행위로 여겨지는데

 

“내가 한 것이 파격적인가? 조금 더 열정적이고 도전적이었던 것뿐이었다. 그게 트러블도 많이 만들어 ‘트러블 메이커’라는 별명도 있다. 목표한 지점에 꼭 가려고 발버둥 치다보니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싶다. 20대 때 그게 성과로 나타나지 않다가 30대 때 목표까지 가게 만들어준 노하우가 됐다.”

 

 

-그렇게 거리퍼포먼스를 했는데, 영화는 어떻게 하게 됐나?

 

“20대 중반에 연극을 하다가 ‘안드레이타르코프스키’ 감독(러시아 영화감독)의 영화 ‘희생’을 봤는데, 너무 충격적이었다.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는 이일을 꼭 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장에 공부도, 능력도, 돈도 없었다. 영화라는 작업은 인생의 내공이 쌓이면 할 수 있기에 미술을 정론으로 우선 깊이 공부하고, 공연예술도 조금 더 공부하기를 마음먹었다. 각 장르를 10년씩 한 샘이다. 장르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영화의 충격이라는 것은?

 

“그 영화는 관객들이 잠을 잘 수 있을 만큼 지루한 영화다. 반면, 내게는 인간이라면 최고의 지점에서 우리한테 줄 수 있는 행운 같은 것이었다. 가치로 친다면 ‘어떻게 인간이 이런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귀함, 존엄, 경이로움, 성스러움까지 느낌이 들었다.”

 

-영화 첫 작품은 무엇인가?

 

“‘머리에 꽃을’이라는 작품이 있다. 사실 그 전에 다큐멘터리 ‘머리에 꽃을’을 제작했다. 2001년부터 2년 동안 거리공연을 매일 촬영했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도 다 찍게 했다. 분량이 한 바가지 정도 됐다. 2002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다큐멘터리 공모전을 했는데, 편집할 줄 몰라서 제주관광대 교수를 찾아가 편집을 도와달라고 했다. 3일 편집해 10분짜리를 만들어 제출했는데, 대상을 받았다. 그 작품이 첫 스타트였다. 자유로운 형식의 다큐였다.” “그 후 2003년 같은 제목의 단편을 만들었다. 마임니스트와 낙서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얘기다. 실험영화처럼 만들었던 것인데 2001년 지역영상공모전에서 대상인 문화부장관상을 받았다. 2004년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본선에 들어갔고, 제주트멍영화제에서 관객상과 CI상을 받았다”

 

-두 번째·세 번째 작품들도 궁금하다.

 

“2004년 ‘립스틱 짙게 바르고’라는 단편이다. 마임니스트 얘기다. 아무데도 출품안하고 그냥 우리끼리 보다가 놔뒀다. 처음부터 출품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찍고 싶어서 찍은 것이다. 세 번째가 ‘어이그 저 귓것’으로 단편이었다. 경률이 형(故 김경률 감독)이 시나리오를 달라고 했던 작품인데 안 줬다. 그것이 내내 미안해서 기일에 맞춰서 촬영하고, 기일에 맞춰서 상영했다. 경률이 형을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한 작품이었다. 그 작품도 딱 그것까지였다. 그 후 2008년 그것을 장편으로 새로 만들었다. ‘2009년 한·일해협권 영화제에서 그랑프리 및 영상상’을 수상했고, 지난해에는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다.”

 

-주로 단편은 마임니스트와 같이 촬영했다. 이유가 있나?

 

“특별한 이유는 없고, 대사를 일부러 쓰고 싶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하는 것을 좀 귀찮아했다. 미술을 했기 때문에 언어를 배제한 상태에서 소통하는 것이 깊을 수 있다고 봤다. 팀에서는 지금도 비언어극을 하고 있다. 언어를 배제하면서 소통이 넓고 다양해 질 수 있다. 언어의 지배를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다.”

 

-장편 ‘어이그 저 귓것’과 ‘뽕돌’ 영화 얘기도 해 달라

 

“‘어이그 저 귓것’은 제주어 가수 양정원씨 등을 소재로 한 것이다. 음악 하는 사람들의 인생과 제주사람들의 삶을 같이 엮은 작품이다. 음악영화라 할 수 있다. ‘뽕똘’은 모슬포에 사는 촌놈이 영화 찍겠다고 돈키호테처럼 나선다는 얘기다. ‘뽕똘’이라는 어감이 갖듯 당당하고, 말썽피우고, 그렇지만 돈키호테처럼 시대의 다른 편에 서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뽕돌’은 ‘2011 제12회 전주국제영화제 무비꼴라쥬상’과 ‘한국장편경쟁 대상(JJ스타상)’에서 특별언급됐다.”

 

-주로 소재를 가까이에서 찾고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최대한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를 많이 쓰려고 한다. 우리 같은 저예산이나 독립영화는 잘 아는 것을 선정해야 제일 낫다고 본다”

 

-영화를 하겠다고 하면 충무로를 많이 가는데, 그렇지 않았다. 그리고 독립영화를 선택했다. 그것도 고향 제주에서

 

“우리나라 영화역사가 오래다. 1000만 관객시대고 됐다. 하지만 제주도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무도 안 찍는다. 충무로는 돈 되는 영화를 찍지 제주사람들이 어떤 인생을 살았고,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는 관심이 없다. 영화라는 것은 상업적인 측면도 있지만, 우리 이야기를 보는 아주 중요한 창구이기 때문에 우리 이야기를 만들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

 

-최근 작품은?

 

“이어도가 지금 완성돼 2011서울독립영화제 본선에 진출해 수상심사 대기 중에 있다. 올드(old)한 느낌의 영화다. 제주도에 제주와 관련된 영화박물관을 만든다면, 맨 앞 페이지에 꼭 필요한 얘기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만들었다. 지금 우리 현실에 대한 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거슬러서 먼지가 묻더라도 중요한 밑천 같은 이야기를 찾아야 되지 않을까 해서 이어도를 소재로 했다.”

 

-지금까지 영화를 찍으면서 어려웠던 부분은?

 

“인터뷰 할 때마다 그런 질문을 자주 듣는다. 항상 대답하는 것이지만 책으로 몇 권정도 쓸 수 있다. 한쪽으로 생각하면 힘들다는 게 작업하는데 즐거운 요소로 오는 경우도 있다. 돈이 없기 때문에 불편한 게 아니라 돈이 없기 때문에 나만의 방식으로 작업을 하는 이득도 있다.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진정성 있는 드라마로만 승부하고자 한다. 기술적인 태크닉은 빼더라도 힘든 상황들이 가끔 좋은 의도로 가는 경우도 있다. 그런 부분들이 득이 되도록 노력을 많이 한다. 힘든 것을 좋게 만들어 버린다. 그것도 하나의 과정으로 생각하고 있다. 기존의 영화산업을 하는 사람들이 보면 불가능한 것을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보면 힘들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오 감독은 제주사람으로서 제주사람들의 얘기가 충분히 소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영화계의 테러리스트다. 그 결과는 지금도 속속 드러나고 있다. 각종 영화제에서 그의 작품이 두각을 내고 있다. 아니 세계가 그의 작품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제 또 다른 테러를 준비하고 있다. 오랜 세월 금기시 돼 왔던 4.3을 처음으로 영화로 만들었던 고(故) 김경률 감독의 영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세월’의 후속편을 준비하고 있다. 이것이 그의 네 번째 장편영화 ‘꿀꿀꿀 - 끝나지 않은 세월2’이다. 특히, 그는 김 감독의 허락을 받았고, 김 감독과 같이 영화를 제작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 감독의 혼을 그대로 재현해 내겠다는 것이다.

 

-최근 4.3을 소재로 한 영화를 준비한다고 들었다.

 

“사실 이어도에서도 4.3 얘기는 살짝 비춰졌지만, 의도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고 있다. 이번 작품 제작발표회가 오는 25일 있을 예정이다. 이번 영화의 큰 섹션은 ‘끝나지 않은 세월 2’로 붙여졌다. 경률이 형의 작품이 ‘끝나지 않은 세월 1’이라면 소제목을 붙이고 있다. 경률이 형의 작업의지가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에서 연계성을 두고 있다. 총 지휘로 경률이 형을 섭외했다. 귀신이 총 제작지휘가 된다. 나는 감독이다. 귀신(경률이 형) 얘기 들으려고 노력을 많이 한다. 경률이 형도 4.3에 또 다른 현존하는 희생자 중 한명이다. 이 작품으로 그 형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워낙에 영화에 열정적인 사람이라서 귀신이지만 제안해서 같이 찍으려고 한다. 경률이 형은 죽은 자의 입장에서, 나는 산자의 입장에서 보면 잘 만들지 않을 것인가 생각한다. 제작발표회를 25일로 잡은 것은 그날이 경률이 형 기일이기 때문이다”

 

-김 감독의 얘기는 어떻게 듣는가?

 

“남들에게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바람소리에 경률이 형이 얘기가 같이 있다. 하늘에도 있고, 땅에도 있고. 내가 만나는 상황들이, 우연 같은 상황들이 꼭 우연만은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주변에 생성되는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우연도 있지만, 분명 운명처럼 만나는 것도 있다. 사람의 말은 귀만이 아닌 마음과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같이 작업하고 있다는 느낌을 든다. 구구절절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차피 예술은 어설픈 선무당이 돼야 한다고 본다.”

 

-평소에도 4.3영화를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나?

 

“경률이 형이 내게 말을 걸었기 때문에 내가 그 얘기를 받아가는 것이다. 불현 듯 ‘끝나지 않은 세월2’를 연결한 이유는 뭘까? 의도적으로 경률이 형의 이름을 붙였다고 성과가 있다고 해서 내가 득볼 것은 없다. 경률이 형이 말을 듣고 있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는 세월’을 작업할 때부터 같이 옆에 있었다. 그래서 작업 후에도 잔상이 남겨진 것은 죽은 자가 소멸되지 않기 때문이다. 계속 끝임 없이 것은 얘기를 건네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경률이 형이 시작해서 내가 4.3에 대한 관심이 두게 된 것이고, 경률이 형 때문에 그것이 생성됐다. 만약 후배들이 4.3에 대한 영화를 찍는다면, ‘끝나지 않은 세월3’가 나왔으면 좋을 것 같다. 예술가한테는 목숨이 끝났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를 위해 얼마나 준비가 됐나?

“배우로서 제주주민들은 제주사람들로 섭외했고, 군인들은 육지사람들로 섭외를 마쳤다. 장비는 영상위원회의 장비를 빌렸다. 물론 없는 장비도 있다. 문제는 제작비이다. 현재 제작비는 ‘제로’다. 현재까지 제주영상위원회에서 제작비 지원은 한 푼도 안 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스텝이나 운영비는 등은 개인 푼돈을 까먹고 있다. 후원계좌를 이용하려고 하는데 그것도 상황이 좋지 않다. 영화라는 것이 돈이 들어가는 장르다. 대한민국에서 장편영화 3편을 1500만원 미만으로 찍은 감독이지만, 4.3영화를 그렇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객들의 기대치도 채울 수 없을 것 같다.”

 

-반드시 군인을 육지사람으로 한 이유는 무엇인가?

 

“제주도 사투리 하는 제주사람이 해야 하고, 육지말 쓰는 사람들은 육지말 쓰는 게 옳다고 본다. 그런 딜레마에서 배우들도 역시 서로가 같은 위치에서 고민했으면 한다. 군인 중에는 2~3명은 제주도 출신들이 있다. 기왕이면, 비슷한 위치 선상에서 다시 한 번 고민해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촬영 계획은?

 

“다음 달 중순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겨울에 꼭 찍어야 되는 영화다. 이 기간을 놓치면 다음에 언제 찍을지 모른다. 마무리는 장담할 수 없다. 후반작업이 예산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시작은 하지만, 마무리는 장담을 할 수 없게 된다. 배우들 스케줄이 감당이 안 되면, 또 1~2년 넘어갈 수도 있다. 기본 촬영이 끝나도 CG 등이 있기 때문에 마무리까지는 장담 못한다.”

 

-배우들 중 김 감독의 작품에 출현한 사람도 있는가?

 

“현재 배우는 2~30명 정도 된다. 재능기부자들. 거의 강제인 사람들도 있다. 경률이 형 작품에 출연했던 문석범 선배가 중요한 역할로 이번에도 출연한다. 그 외에는 경률이 형 작품에 출연한 배우는 없다”

 

-김경률 감독은 당신에게 어떤 사람인가?

 

“20대 중반에 알게 됐다. 경률이 형도, 나도 신혼부부 관광비디오를 찍어주고 있던 때에 알게 됐다. 경률이 형은 마치 관광비디오도 영화감독처럼 찍었다. 그 모습은 지금도 선하다. 항상 티격태격 다퉜지만, 항상 존경하는 선배였다. 때로는 친구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독립영화에 대한 고민도 많이 나눴다. 지점이 같았기 때문에 방향도 같이 갔다. 또, 워낙에 열정적이었다.”

 

오 감독은 제주영상위원회에 예산을 신청한 상태지만, 아직까지 결정이 늦어지고 있다. 후원계좌를 통한 모금, 스텝들의 스폰서 구하기 등에도 나서고 있지만, 그것조차도 힘든 상황이다. 그래서 그는 김 감독의 전철을 밟아 철저히 김 감독의 혼을 따르겠다고 벼르고 있다. 하지만 영화는 언제 마무리 될지 기약이 없다. 김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예산은 얼마정도로 예상하고 있나?

 

“경률이 형이 1억을 사용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것 보다 더 쓰고 싶은 것도 없다. 더 큰 제작비 준다고 해도 쓸 생각이 없다. 그 만큼 지역주민들로부터 투자받고 싶다. 그 방식 그대로 욕심을 내고 있다. 경률이 형이 그렇게 어렵게 작업을 했는데, 그 여건 고스란히 나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돈으로 달라질 수 있다면, 폼 잡고 얘기 할 것은 아니다. 경률이 형이 했던 시스템에서 그 작업 고스란히 성과를 만들어야 형이 힘들었던 것을 고스란히 우리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런데 우린 1억도 모으기 힘들다. 여기저기 다니는데, 적극적인 반응이 없다.”

 

-주변에서 격려는 오는가?

 

“아무도 없다. 나는 돈을 부탁하는 성격도 안 된다. 그저 시나리오를 쓰고 작품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만 궁리 중이다. 지금 ‘뽕돌’의 주연 배우가 스폰서 떼러 다닌다. 스텝들이 다른 사람의 역할을 맡아주는 경우도 있다. 상업영화를 찍는 것이 아니니까 역할들을 돌아가면서 해주는 부분이 있다.”

-평소 4.3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가?

 

“평소라기보다는 제주사람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런 부담을 지닌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인식을 하던 인식하려고 노력을 안 했던 간에, 몸에 묻어나던 얘기들의 역사였고, 뿌리이기 때문이다. 커가면서 하나씩 들여다보면, 역사의 아픔을 자연스럽게 알아가고 있다. 어릴 때 무관심했는데 가면 갈수록 가는 장소마다 알게 된다. 공부나 관심이 아니고, 나이가 먹어 갈수록 자연스럽게 말이다.”

 

오 감독은 필명을 사용하고 있다. 그는 이번 인터뷰에서 자신이 이름에 대해서는 말을 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 자신 스스로의 다짐을 허물어버리는 느낌이 들어서란다.

 

-필명이 ‘오멸’인 이유가 있나?

 

“이름에 대해서는 말을 아끼고 싶다.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인데 구차해지진다. 내 인생을 두고 화두가 되는 것 같다. 필명을 갖고 있는 것들을 얘기 할 때마다 갈아버리는 느낌을 온다. 송나라 노후 철학에 ‘오멸’이라는 단어가 있다. 5가지를 멸하라는 뜻이다. 그것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니다. 이름을 설명하는 것은 내 개인적인 목표지 타인에게 내 목표를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보지 않아서 몇 번이고 말하고 나서 후회가 된다. 나를 지켜야할 부분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한다.”

 

-지금 영화 말고 다른 것도 하고 있나?

 

“자파리필름과 자파리연구소 대표 겸 예술감독이다. 자파리연구소는 연극을 주로하고 있다. 올해 국제아동청소년연급협회 주최 제20회 서울어린이연극상에서 ‘오돌또기’라는 작품으로 최우수작품상, 최고인기상, 최고연출상, 연기상 등 4관왕을 차지했다. 어마어마한 성과였다. 주요작품으로는 ‘섬 이야기’, ‘할머니의 낡은 창고’ 등 가족극이 대부분이다. 현재 기술적 멤버 5명이다.”

 

-일본에서도 활동한다고 들었다.

 

“일본에서 우리 공연을 몇 차례 보더니 매력을 느낀 현지사람들이 자신들이 스스로 일본에 지부를 만들었다. 우리 공연의 프로듀싱을 하고 있다. 2006년부터 매년 2~4월에 순회공연을 하고 있다.”

 

-멤버 자격이 있는가?

 

“딱 하나 있다. 무조건 열심히 하는 것이다. 1~2년을 거쳐 정식 멤버가 될 수 있다. 내가 자르는 경우는 없다. 스스로 나가는 경우가 있었다. 워낙에 척박하게 작업을 하다보니까 어려움에 나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많다. 초창기 멤버는 3명이다. 20살 짜리 조카도 있다. 그 아이는 중 3때부터 쫒아 다녔는데, 지금 5년 됐다. 그 아이는 가출청소년이었다. 학교 안다니겠다고 하니까, 내가 잡아서 연극시켰다. 그 아이가 이번에 연기상을 받았다.”

 

-친척이나 집안에 예술 쪽에 있으신 분들이 있나?

 

“그렇지 않다. 처음에 혼자 예술을 시작했는데, 그게 파장이 됐다. 동생도 대학교에서 미술학과를 졸업해 지금 경기도서 중학교 미술교사를 하고 있다. 누님은 간드락 소극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렇게 예술하는 것을 집안에서 반대하지 않았나?

 

“어릴 때 엄청나게 반대가 많았다. 예술집안은 먹고 살게 없다고 봤다. 30대 중반 넘어가도 그 가치를 말로 설명해도 이해를 못했다. 보고 인정을 할 때까지 고생해야 했다. 지금은 심경적으로 그런 과정은 넘어섰다. 지금은 작품을 보러오는 팬 중에 한명이 됐다. 제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이제는 심경적인 지원이 제일 큰 지원이 되고 있다.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공연을 계속하는 것이고, 이번 영화가 어떻게든 잘 완성이 되게끔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몇 년 후라는 계획을 한 번도 세워 본 적이 없다. 지금 하는 작품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좋은 작품 나와야 한다. 지금 4.3에 대한 원망이 아닌, 예술가들에 대한 원망의 소리가 있다. 다시 그런 소리를 듣지 말아야겠다는 숙제들을 하는 것이 당장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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