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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제주] 51년 역사 새로 쓰는 오경아 제주산악안전대장
한국 산악 역사상 첫 여성 구조대장…"제주산악안전대 명성 높일 것"

“산(山)요? 생활이죠. 특별히 날 잡아서 올라가는 곳이 아니에요. 그냥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학교 가고 출근하듯이 시간이 되면 가는 곳입니다.”

 

한국 산악구조대 역사상 첫 여성대장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그에게 산은 그저 평범한 일상의 터전이다.

 

제주산악안전대 오경아(43·여) 대장.

 

평범한 두 아들의 엄마이자 자그만 아웃도어 매장을 운영하는 제주 여성이다. 털털하게 말하고 뭐든지 부정하지 않을 듯한 성격을 가진 그는 산 생활 23년째의 산악인이다.

 

전국 첫 산악구조대이자 전국 최고의 팀인 제주산악안전대는 1961년 구성됐다. 1954년 한라산 입산통제가 해제되고 등반인구가 늘어나면서 조난사고가 빈번히 일어난 이유 때문이다. 이에 제주지역 몇몇 산악인들이 한라산 조난 구조대의 필요성을 절감해 1961년 5월21일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적십자사 제주지사 소속 산악안전대를 발족했다.

 

제주산악안전대는 다른 지역의 ‘구조대’라는 명칭과는 달리 ‘안전대’라는 명칭을 쓴다. 구조대는 사고가 일어난 뒤 활동을 한다. 하지만 ‘안전’은 사고 예방의 뜻을 포함하기 때문에 등산 안전에 초점을 둔다는 뜻에서 제주산악인들은 ‘안전대’라는 명칭을 쓴 것이다. ‘안전’이 가장 중요한 것임을 옛 제주산악인들은 잊지 않은 것이다.

 

안전대는 한라산에서 조난사고가 일어날 때 즉시 출동해 구조 활동을 펼친다. 또 동절기는 물론 각종 한라산 행사에서 등반객들의 안전을 책임진다.

 

그래서 ‘제주산악안전대’의 대원들은 누구보다 실력이 뛰어나다. 그도 그럴 것이 대원들은 제주지역 산악회에서 최고들이 모인 팀이기 때문이다. 실력이나 산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남을 구조하고 보호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제주산악인들은 물론 전국 산악인들 사이에 ‘제주산악안전대’는 최고로 친다.

 

이런 제주산악안전대 51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이 '지휘관'이 된 것이다. 15일 정기총회에서 선출됐다.

 

임기는 2년. 돌, 바람, 여자가 많은 삼다(三多)의 섬에서 여자가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전국에서 처음으로 여성이 구조대 대장이 된 것은 가히 주목받을 만하다.

 

 

그는 왜 산에 오르게 됐을까? 그리고 왜 ‘산악안전대’라는 팀에 들어갔을까?

 

무척이나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낸 오 대장의 산 이력은 어린 시절 단출했다. 대학 입학 전만해도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단체로 한 번씩 한라산에 가고 고3때 1살 연상의 사촌오빠하고 산에 간 것이 전부다. 특히 대학입시를 앞둔 고3 시절엔 산에 올라갔다가 담임교사에서 들켜 혼난 적이 있다.

 

“그냥 느낌이 좋았어요. 그래서 대학교 가면 산악부 들어야겠다는 생각만 막연히 가졌죠. 그런데 대학 입학 후 산악부에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사촌오빠가 서귀포지역 출신끼리 산에 다니는 ‘동탐대(동굴탐사대)’라는 그룹에 다녔죠. 그 모임에 따라 갔다가 산행을 한 것을 계기로 그 멤버들과 어울렸죠. 그래서 입학한 1988년 3월 무수천 암벽코스를 동탐대 멤버들과 함께 한 것이 본격적인 첫 산행이었어요. 이후 남들이 MT가고 축제할 때 우리는 모이기만 하면 산에 다녔죠.” 첫 산행이었던 무수천을 출발한 한라산 코스를 그는 5년 뒤인 1992년 첫 개척했다. 

 

그는 1990년에 안전대에 들어갔다. 동탐대 멤버들은 모두 1~2세 연상의 남성들이었기에 하나둘씩 군에 입대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그는 혼자 산행을 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혼자 육지의 산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산행을 멈출 수 없었다. 그래서 더 멋있고, 더 짜릿한 산행을 하고 싶었다. 지금도 최고지만 당시 최고들만 모인 ‘제주산악안전대’가 딱 이었다.

 

“산에 빠져들기 시작하면서 더 괜찮은 등반, 더 멋있는 등반을 하고 싶었어요. 각 산악회에서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최고의 팀인 안전대는 당시 6박7일 동안 동계훈련도 하고, 암벽등반도 했죠. 훈련을 길게 하는 것이 좋아 보였어요. 그래서 그 팀에 들어가서 산행을 하고 훈련을 하다 보니 어느 덧 23년이나 된 거죠.”

 

그는 산악인들의 꿈인 설산 원정도 했다. 1996년 첫 원정인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등정에 나선 것이다. 당시 제주산악회 보다 하루 앞서 서울 기아자동차산악회와 같이 올랐다. 대한민국 최초로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제주산악인 고상돈씨가 순직한 코스는 아닌 웨스트버트레스 코스를 통해 제주여성으로써 매킨리 정상을 밟은 것이다.

 

“출발할 때 무척 마음이 설레었죠. 산에 다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설산 원정을 꿈꾸죠. 부푼 마음을 안고 올라가는데 가도 가도 끝없는 설원이었어요. 저 언덕만 넘으면 끝인 줄 알고 죽을 둥 살 둥 올라갔더니 저만큼 또 설원이 펼쳐졌죠. 그 설원을 죽을 힘을 다해 걸었는데 그 다음에는 한라산 장구목 몇 배나 되는 벽이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지 뭐예요. 정상에 올라서자마자 ‘야휴~ 다 왔구나.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요. 정상은 예쁘지 않았어요. 내려올 때에는 ‘다음에는 다른 코스로 올라와야겠다’는 다짐을 했어요. 제주산악인들이 목숨을 잃은 그 코스도 떠올랐어요. 매킨리 옆 헌터봉이라는 아름다운 산도 가보고 싶어요.”

 

하지만 그는 그 이후 설산원정은 가지 못했다. 대신 그는 2001년과 2003년에 미국 요세미티 공원 내에 있는 엘캡(2695m·엘캐피탄)을 다녀왔다. 앨캡은 빙하가 쪼개지면서 생긴 벽이다. 하프돔의 반쪽이다. 수직고도 1000m에 이른다. 여자 3명이서 앨캡에서 45일 동안 머물기도 했다.

 

“위로 100m를 보기에도 한참인데 1000m나 되니 얼마나 높겠어요. 산에 다니는 사람의 꿈이 설산이라면 바위(암벽등반)하는 사람의 꿈이라면 누구나가 한번쯤 가고 싶은 곳이죠. 그 동네 사람들도 놀랬어요. 작은 동양여자 3명이 45일을 살면서 오르락내리락 하니 신기했겠죠. 2번을 정상에 올랐어요. 마지막에 오르려고 했지만 절반까지만 가고 내려왔죠. 바위 중간에 매달려 생활하는 게 얼마나 짜릿한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하다 보니 그는 원정을 가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원정을 언제든지 떠날 태세다.

 

 

오 대장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출동 명령이 떨어지면 재빨리 등산화를 신고 장비를 갖추고 한라산으로 뛰어간다. 그는 최근 5년간 5번의 구조 활동을 했지만 23년 동안 구조 활동은 몇 번했는지도 모른다. 매년 발생하는 조난사고에 출동한 것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1990년대 중반으로 기억해요. 2박3일 동계훈련을 마치고 내려왔어요. 마침 내려오는 날 대원 중 한명이 장가를 가게 돼 잔칫집으로 가야 했죠. 지친 몸을 씻고 옷도 갈아입고 잔칫집에 가서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어요. 한 500CC 정도 마신 것 같아요. 그런데 출동명령이 떨어졌어요. 한라산에서 한 훈련팀이 암벽 등반을 하다가 떨어졌다는 거예요. 다시 또 올라갔죠. 지금의 들것은 가벼웠지만 당시 들것은 무거웠죠. 자체적으로 들것을 가볍게 만들었지만 그것도 무거웠어요. 술도 마셨지, 들것을 끌고 가려니 무겁지, 다리는 풀렸지, 눈길은 또 어찌나 미끄러웠던지 죽을 것 같았어요. 다행히 다른 훈련팀들도 있어서 연계해 구조를 하고 윗세오름 산장까지 옮겨 헬기로 수송했어요. 그 사고 이후 1998년에는 제주에서 전국구조대 합동훈련이 있었는데 그 사고를 시나리오로 짜 그대로 훈련을 했어요.”

 

안전대는 2년에 한번씩 12시간짜리 응급처치 교육을 받아 구조대원 자격을 유지해야 한다. 연간 10여 차례 훈련을 포함해 구조출동에도 참석해야 한다. 그런 힘든 훈련과 반복적인 산행은 그의 다리를 아프게 했다. 의사는 산행을 그만두라고 했지만 그는 그만둘 수가 없었다. 안전대에 가입한 1990년부터 지난해까지 적설기 한라산 고지대에서 주말 근무를 자청한 터라 그에게는 산은 땔레야 땔수 없는 곳이 돼 버렸다.

 

“다쳤다기보다는 무식하게 다녀서 무릎연골이 닳았어요. 많이 아팠죠. 뼈가 부딪혀 뼛조각이 굴러다녀 수술을 했어요. 몇 개월 동안 산에 못 다녔다. 갑갑해 죽는 줄 알았다. 지금도 체중이 불거나 무리하면 아파요. 그래도 죽을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니까 그냥 다녀요. 그렇다고 산을 다니는 것에 대해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그냥 우리끼리 힘들고 지치면 ‘산에 왜 다녀야 하나’하고 푸념하지만 우리가 좋아서 하는 것인데 그 푸념은 농담이나 다를 게 없어요. 산행은 목마른 것과 같아요. 마치 마약과도 같죠. 끊을 수 없어요. 중독성이 너무 강해요. ‘산에 왜 다니냐’ 하는 것은 ‘밥을 왜 먹느냐’는 하는 것과 같아요.”

 

안전대장이 된 그에게는 고민이 있다. 안전대는 매년 대한산악연맹에서 200만원, 적십자사에서 50만원의 지원금이 전부다. 나머지는 대원들 스스로 운영비를 내야 한다. 게다가 1년에 4~5차례 열리는 전국 시도연맹 구조대 훈련에도 자비로 참가해야 한다.

 

“봉사정신과 희생정신이 없으면 안전대 활동을 하지 못해요. 서울시연맹은 스폰서가 많죠. 1년에 한 번씩 원정도 나가고 장비지원도 1년에 빵빵하게 나오는데 우리는 그것은 꿈고 못 꾸죠. 산에 가려면 우리 돈 내고 가야 해요. 훈련도 각자 경비를 내고 하고요. 인명 구조에 성능 좋은 무전기와 GPS 단말기, 심장 제세동기 등이 필요한데 예산이 없어 낡은 장비를 쓰고 있어요. 그 동안 선배들은 예산을 받지 못한 것들을 그냥 받아들였어요. 예산을 받으면 좋지만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죠.”

 

안전대의 고령화도 그에게 고민거리다. 현재 대원은 모두 37명. 이중 역대 대장을 빼면 현재 활동하고 있는 대원은 오 대장과 여성대원 1명을 포함해 30명이다. 제일 어린 대원이 35세다. 30대가 4명이고 나머지는 모두 40~50대다. 매년 1월 각 단위산악회에서 추천받지만 다른 산악회도 인원이 줄어드는 추세여서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안전대를 전국 최고의 구조대로 명성을 올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포부도 갖고 있다. 특히 일반인들에게 ‘제주산악안전대’의 존재 가치를 알려 대원들의 사기를 북돋워 줄 계획이다.

 

“우리 팀은 전국의 최고예요. 실력이나 팀워크이나 전국 최강의 팀이죠. 사실이 그래요. 하지만 그 동안 홍보가 없었어요. 산에서 좋은 일만 했다 뿐이지 내려오면 119로 바뀌죠. 그래서인지 일반인들이 우리 팀을 잘 모르는 것 같아요. 대원들이 안전대가 멋있는 팀이라는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고 누구나 다 들어오고 싶은 팀으로 만들고 싶어요.”

 

그에게 ‘산’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산요? 생활이에요. 특별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생활이에요. 평상시와 똑같은 생활. 특별히 날 잡아서 가야하는 것이 아니에요. 아침에 일어나 밥 먹고 학교가고 출근하듯이, 시간이 되면 가고 하는 별다른 것 없어요.”

 

하지만 그는 산은 항상 무섭다고 한다. “사람들은 한라산을 우습게 여겨요. 올라갔다 내려오면 끝이고 몇 시간 만에 올라간 것을 자랑스럽게 말하죠. 산은 그렇게 쉽게 생각할 대상이 아니에요.” 언제나 산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에 조심해야 된다는 안전대장 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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