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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인] 다큐멘터리사진가 김기삼
재일제주인·4.3·스포츠·생태 전문…4.3, 세상에 알린 다랑쉬굴 첫 촬영

1976년 여름이었다. 일본에서 사는 작은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일본에 도착한 그는 작은아버지의 일을 도왔고 사촌들과 생활을 했다. 사진을 좋아했던 사촌형과 사촌형의 일본인 친구와 사진을 찍으러 다니다보니 사진에 미치게 됐다.

 

10년 만에 귀국하고 우연찮게 눌러 살게 된 고향. 그러나 그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그럼에도 카메라를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사진은 그에게 ‘삶’이기 때문이다. 그는 제주 현대사의 기록자로서 ‘사진작가’라는 말보다 ‘다큐멘터리사진가’라고 불리기를 원한다. 그의 이름은 다큐멘터리사진가 김기삼(57).

 

그의 집 거실 한쪽 벽 책장에는 그 동안 촬영한 필름이 가득하다. 그가 바라 본 세상을 기록한 생생한 증거들이다. 그는 필름을 볼 때마다 한숨과 웃음이 교차한다.

 

# 고교 졸업하고 일본으로 간 인생 1막

 

1975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수상파출소에서 여객선을 타는 여행객들의 표를 검표하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약 4개월여 동안 일을 하던 중 일본에 있는 작은아버지가 전화가 왔다. 일본에 있는 사촌들과 인연이 끊어져서는 안 된다며 일본으로 들어와서 지내라는 것이었다. 그의 친척들은 모두 일본에 있다.

 

그는 일본 교토(京都)에서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자동차부품공장에서 일을 했다. 물론 숙식은 작은아버지 집에서 했다. 사촌들과 어울리면서 일본어도 빨리 습득하게 됐다. 그에게는 돈도 벌고 나쁘지 않은 생활이었다.

 

# 카메라를 만나 사진에 미치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당시 일본에서는 사진을 취미로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의 사촌형도 사진을 취미로 하고 있었다. 사촌형은 그에게 카메라를 빌려주기도 했다. 그게 그에게 사진과의 첫 인연이었다.

 

사촌형은 그에게 일본인 친구 ‘야마다’를 소개시켜줬고 야마다는 그를 데리고 사진촬영을 함께 다녔다. 그는 쉬는 날이면 사촌형에게 빌린 카메라로 풍경과 사람을 촬영하러 다녔다. 그는 특히 사람을 촬영하는 것을 좋아했다. 공원에서 다케노족(화장하고 공원에서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을 필름에 담기도 했다. 노면전차가 사라진다고 하자 노면전차를 촬영하기도 했다. 연말연시를 맞아 교토역에 들어가 하루 종일 헤어지는 장면을 찍었다. 하루 종일 사진을 찍다보니 철도경찰관에게 무임승차자로 오해를 사기도 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보물 1호가 생겼다. 중고카메라였지만 그의 돈으로 처음으로 구입한 카메라가 생긴 것이다. 50mm 렌즈 하나에 니콘(Nikon) F 카메라 몸체. 하지만 그는 그 순간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야마다와 함께 오사카의 중고카메라 시장을 돌아다니다가 구입한 것이다. 이것도 저것도 갖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돈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그것이 어디냐. 내 카메라다. 야마다도 같은 종류의 카메라였기 때문에 야마다의 렌즈를 빌릴 수 있었다.

 

5~6년을 그렇게 사진을 찍다가 스포츠사진을 접하게 됐다. 마침 야마다가 ‘KSPC(Kyoto Sports Photo Club)에 가입돼 있어 그 동호회에 가입했다. 그때부터 그는 스포츠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다. 럭비와 신체조, 마라톤, 축구, 야구 등 스포츠와 관련된 모든 사진을 촬영했다. 그렇게 사진은 그에게 일상의 일부가 돼 버렸다.

 

# 귀국 그리고 떠나지 못한 고향에서의 인생 2막

 

그의 나이 29세가 되던 1985년 12월.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급히 귀국해 어머니의 임종을 지켜보고 장례까지 치렀다. 이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니 제주에서 살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제주를 떠나 육지로 나가던지 일본으로 돌아갈 생각도 했었다. 사진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선택하고 싶었다. 그 동안 일본에서 열린 여러 사진공모전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다. 돈도 어느 정도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제주에 왔을 때 그를 위해 틈틈이 저축했던 은행 지점장을 만나게 됐다. 그 자리에서 지점장은 그에게 사진을 취미로 하는 지인을 소개시켜 줬고 그는 다시 제주에서 사진을 찍으며 생활하게 됐다. 그러던 중 그는 새로운 식구를 맞이하게 된다. 지금도 가장 든든한 힘이 되고 있는 아내를 만난 것이다. 아내와 함께 그는 사진공부도 하고 돈을 벌기 위해 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사진전문학교에 입학하고 본격적으로 사진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출산을 앞둔 아내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야만 했다. 일본에서 출산하면 한국국적을 얻을 수 없고 보험도 적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항 출국장으로 들어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를 혼자 보내는 것이 못내 마음이 걸렸다. 도저히 일본에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가족이 없는 일본 생활은 의미가 없었다고 판단한 그는 ‘제주에서 견뎌내자’고 마음을 먹고 입학 6개월 만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 힘들었던 제주생활

 

이후 그는 처가가 있는 서귀포와 제주시 구좌읍 평대리의 누님 집에서 살면서 프리랜서 생활을 한다. 1년 뒤 월간지 사진기자로 2년간 근무했다. 주간지에서도 약 1년가량 근무했다. 그러나 1989년에 회사 사정으로 인해 그는 직장을 그만뒀다. 다시 그는 프리랜서 생활을 하게 됐다. 그의 생활은 어려웠다.

 

자가용도 없던 시절 그는 버스를 타고 일을 하기 위해 장비를 챙기고 평대리에서 제주시내로 들어와야 했다. 사진 관련 일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어서 그에게는 돈을 버는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꿋꿋했다. 사랑하는 가족의 가장이라는 의무감에서 라면을 먹어가면서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도 그에게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 시절 그는 제주에서 사라져 가는 당과 굿의 민속사진과 포구, 한라산, 생태 등을 기록했다. 그리고 당시 제주에서는 생소했던 조류사진을 개척해내기도 했다.

 

그런 생활을 3년 동안 어려운 시절을 견디던 그에게 ‘쨍 하고 해 뜰 날’이 찾아왔다. 제주도의회 사진기록담당으로 근무하게 된 것이다. 그의 나이 36세에 늦깎이 공무원이 된 것이다. 공무원이 돼서도 그는 기록사진을 찍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집회·시위현장을 찾아다녔고 각종 문화행사에도 카메라를 들이댔다. 특히 4.3연구소 회원으로서 그 동안 기록한 4.3관련 사진도 거의 빠짐없이 기록했다. 조류사진을 후배들에게 전수해 한정된 제주지역 사진 분야의 폭을 넓혔다.

 

지금 그는 국문학을 전공한 아내와 함께 또 다른 인생의 기록을 세기고 있다. 지금 그의 나이 57세. 인생 3막은 이제부터다.

 

-일본에서 스포츠사진을 찍으면서 기억에 남는 것은?

 

“일본은 고교야구가 유명하다. 고교야구가 열리는 고센(일본 혼슈의 니가타현에 있는 도시)구장에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전날부터 신문지를 깔고 기다렸다. 많은 사진가들이 그렇게 했다. 망원렌즈라고는 300mm 밖에 없어 좋은 자리는 경쟁이 심했다. 영화용으로 제작된 100ft(30.5m)짜리 흑백필름 2개를 쓸 정도였다.(100ft 필름을 비어있는 35mm 필름통에 감아 19통의 필름을 만들어 사용했다.) 그때 촬영한 필름은 지금도 있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렇게 못 찍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웃음).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도 기억이 있다. 큰 경기였고 다양한 경기를 볼 수 있는 기회였다. 여름휴가를 받아서 촬영하러 갔다. 지금과 스포츠에 대한 개념과 달리 좋은 장면만 잡자고 생각했다. 오사카에서 열린 세계테니스선수권대회도 촬영한 적이 있다. 그 당시 스포츠사진을 한 것이 요즘도 촬영하는 조류사진에 큰 도움이 된다.”

 

-사진집 ‘달 보멍 하영 울었주(1999년·도서출판 각·달 보면서 많이 울었죠)’는 어떻게 해서 작업하게 됐나?

 

“아내(김승연)와 함께 만든 책이다. 일본에 살 때 제일제주인 1세들을 기록한 것이다. 재일 제주인의 삶의 희로애락까지도 사진에 담을 수 있기를 희망하며 작업했다. 머나먼 타국에서 일본인이 싫어하는 일을 가리지 않고 맡아 목숨을 부지해야 했던 이들이다. 또 제주도의 발전에 밑거름이 된 이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본인과 공평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이었다. 이러한 것을 말하고 싶었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1978년부터 촬영했다. 귀국하고도 다시 일본으로 가끔 들어가 촬영했다. 촬영하는 동안 1세 몇 분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마음이 너무 아팠다. 밤에 달을 보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그 분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사진으로라도 남겨 위로가 됐으면 했다. 또 우리가 그 분들을 잊지 않고 이해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

 

 

-고향에 돌아온 뒤 많은 사진을 찍었다. 더구나 유독 남들이 접근하기 힘들었던 4.3 관련 사진을 많이 찍었다.

 

“고향에 돌아와서도 4.3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것이 없었다. 잡지사에 근무하면서 조금씩 알게 됐다. 여러 집회나 시위 등에 대한 취재하다보니 4.3관련 집회 등도 자연스럽게 취재하게 됐다. 본격적으로 알게 된 것은 문무병 선생(현 제주전통문화연구소 이사장)과 함께 제주의 당을 조사하러 다니면서다. 당시 굿 사진을 찍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녀 조사를 하게 되면 2박3일은 보통이었다. 당을 조사하면서 동네 분들로부터 자연스럽게 4.3관련 얘기도 들었다. 당시 나는 굿 연구소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문 선생은 4.3연구소를 하자고 제안했다. 결국 4.3연구소와 굿 연구소를 같이 만들게 됐다. 그렇게 해서 4.3연구소 회원으로 활동하게 됐다. 주로 사진을 촬영했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기도 했다. 도의회에 막 들어가 근무할 때 제주경찰서(지금의 제주동부경찰서) 대공과에서 두 차례 전화가 왔다. 첫 번째 전화가 왔을 때에는 시간을 맞추지 못해 출석을 못했다. 두 번째 전화가 왔을 때에는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당시에는 4.3에 대해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할 시절이다. 그런데 나는 4.3사진을 찍고, 집회 등도 촬영한 행적이 있어 누군가 나를 고발한 것이었다. ‘4.3활동을 하는 사람이 공무원이 됐다’고 고발한 것이다. 경찰관은 고발이 접수됐기 때문에 조사를 해야 한다며 ‘누구 때문이냐’, ‘왜 그런 활동을 했느냐’고 질문했다. 그래서 ‘포토저널리스트로서 기록의 의미에서 4.3사진을 촬영한 것일 뿐이었다. 이념적인 것은 생각도 해보지도 않았다. 기록자가 기록을 하는데 뭐가 문제냐’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4.3진상규명의 신호탄이 됐던 다랑쉬굴 유적에 처음 들어가 촬영했다.

 

“4.3연구소 조사팀과 같이 시간이 나면 4.3증언 채록을 하러 다녔다. 그러던 중 1991년 12월 구좌읍 세화리에서 한 증언자로부터 다랑쉬굴에 대한 얘기를 전해 듣고 그 증언자와 함께 굴을 찾아 나섰다. 오후 늦게야 도착해 거의 어둠이 내려앉기 직전이었다. 흩어져서 찾고 있었는데 폭파돼 무너진 흔적을 발견했다. 당시 산에도 잘 다니던 터라 등산용 랜턴이 있어 굴을 비춰보니 하얀 해골 같은 것이 보였다.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 이유는 몰랐지만 외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조사팀 한명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증언자도 부르지 않았다. 날도 어둡고 해서 그 자리를 표시하고 바로 철수했다. 이틀 뒤 영상장비와 사진장비, 랜턴, 향, 재물 등을 준비하고 다시 찾았다. 연구소에도 알리지 않았다. 절을 하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유골이 널려있었다. 처음에는 오싹했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일일이 하나하나 촬영했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웠고 경건한 마음으로 작업을 했다. 들어간 팀원들 모두 말이 없었다. 당시 팀원들은 그 자체를 그대로 보존하려고 했다. 성역화 시키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 규정 때문에 연구소에서 경찰에 신고했고 언론사에도 알려지면서 다랑쉬굴이 존재가 드러난 것이다.”

 

그가 최초로 촬영한 다랑쉬굴 사진은 저서 ‘다랑쉬굴의 슬픈노래(2002년·도서출판 각)’로 만들어져 일반에 공개되기도 했다. 또 다랑쉬굴 유골 처리 과정을 담은 사진을 비롯해 4.3관련 사진이 4일부터 10일까지 제주4.3평화재단 주최로 신산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다.

 

-1988년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을 기록했다. 개인으로서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장애인올림픽을 찍을 만한 이유가 있었나?

 

“일본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돌아와 처가살이를 했다. 88올림픽을 열린다는 소식에 같은 사진동호회(제주카메라클럽) 활동을 했던 제주지역 일간지 사진기자와 함께 서울로 올라갔다. 사정이 어려웠지만 아내를 설득해 200만원을 들고 올라갔다. 당시는 큰돈이었다. 육지에 올라가 살려고 생각하던 터였다. 게다가 스포츠사진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은 기회여서 반드시 가고 싶었다. 여관에서, 지인 집에서 자면서 장면을 담았다. 장애인올림픽까지 해서 거의 한달 동안 살았다. 하지만 장애인올림픽을 하기 전 대부분의 기자들은 떠나고 없었다. 혼자서 장애인올림픽까지 찍었다. 스포츠 사진이라는 것은 항상 승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희로애락이 스포츠를 통해 표현되는 것을 담고 싶었다. 그 표정들을 모아 전시를 하고자 했다. 나도 장애인이이라는 점(그는 일본 생활도중 작은아버지의 공장에서 기기를 다루다 오른쪽 손가락 3개의 일부를 잃었다.)에서 장애인들 도전하는 모습을 호소력이 있는 사진이라는 것에 담고 싶었다. 그들을 모습을 통해 사람들에게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를 전달하고 싶었다.”

 

그는 가끔 꺼내서 보는 올림픽 사진을 보면서 ‘왜 그런 짓을 했을까’ 하는 푸념도 하지만 기록자로서 당연한 일이기에 후회는 없다고 말한다.

 

그는 공직자 생활을 얼마 없으면 마감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것은 단지 생활의 일부가 바뀌는 것일 뿐이다. 자연다큐라는 게 그렇듯 오랫동안 찍어온 조류사진도 언제나 그에게는 떨리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쉬는 날이면 어김없이 카메라를 챙겨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언제나 함께한 아내와 집필 작업도 하고 있다.

 

“아직도 기록해야 될 것이 많이 남아 있다. 지금껏 담아온 내가 본 세상을 조금씩 빛을 보게 하는 작업도 할 것이다. 사진은 내 ‘삶’이기 때문이다. 또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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