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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의 현장 파워인터뷰]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정의가 샘 솟는 제주로 가자"

 

거침이 없었다. 막힘도 없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가 지난해 4월부터 말문을 열었다. 1998년 6·4지방선거에서 낙마한 뒤 공직을 떠났던 그가 <제이누리>에 회고록을 쓰기 시작하면서 지나온 인생사를 털어놨다. 지난해 4월17일부터 연재를 시작, 4월30일까지 1년여간 52차례에 걸쳐 매주 제주도민들에게 스스로의 육필을 알려왔다.

 

육사 4년 시절 중퇴, 행정고시에 합격한 그는 제주도 기획관, 농림부산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29·31대 제주도지사로 부임·당선되기까지 승승장구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두 차례의 도지사 선거 낙선과 축협중앙회장 재직시절 국회할복사건은 물론 재임시절 뇌물수수 사건에 휘말려 옥고까지 치르는 기막힌(?) 인생도 살았다.

 

마치 한편의 드라마와 같은 인생사를 돌아보며 1년간 그는 자신이 탯줄을 묻었고, 또 그의 뼈가 묻힐 제주땅에 대한 염원과 회한, 그리고 그가 꿈꿨던 비전과 소망을 풀어냈다. 젊은 세대를 향해서는 이제 ‘제주를 새로이 그랜드 디자인하라’는 호령도 잊지 않았다.

 

그가 살아온 ‘격동의 현장’과 그가 남긴 회고에 <제이누리> 독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매주 화요일 오전이 기다려진다”, “내년 선거출마를 염두에 둔 포석 아닌가”, “신 전 지사의 혜안과 열정, 제주에 대한 사랑에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는 의견이 쇄도했다. <제이누리>의 여러 기사를 제치고 매주 댓글순위 1위, 조회수 1위를 기록하는 <제이누리>의 ‘킬러 콘텐츠’였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를 <제이누리> 회의실에서 만났다. 그리고 그동안의 연재에 얽힌 그의 소회와 생각을 캐물었다.

 

1년간의 회고록 연재에 대한 반응이 뜨거웠다. 소회는?

 

“자기 얘기를 쓴다는 게 쑥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도정을 수행했기에 제주도의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전제에서 글을 썼다. 그런 기회를 준 <제이누리>와 애독해준 독자들의 격려와 지적에 정말 감사하다. 개인적으론 내가 산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돌이켜보니 내 인생사에 많은 감사와 행운이 있었다.“

 

연재한 회고록 분량이 원고지로 1만장에 가깝다. 무엇보다 날짜와 시간, 장소까지 소상히 나와 정확한 기록에 놀라는 사람들이 많다. 오래 전부터 매일 비망록을 기록하고 있었다는 애기를 들었는데···.‘

 

“기억에만 의존하면 나도 힘들었을 것이다. 다른 공직자도 그런 습관이 있는데 특히 일본의 공무원이 유명하다. 매일의 일상과 공직 수행과정을 기록한 비망록은 나 역시 오래된 습관이다. 기록하는 버릇이 있다. 그 기록을 찾아보며 회고록을 썼기에 비교적 당시 상황을 제대로 묘사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비망록은 나의 경우 매일 매일의 기록이다. 경우에 따라 어떤 상황에 대한 판단과 평가를 적어두기도 했다. 농림부에서 근무하던 시절인 1984년 이탈리아 로마에 농무관으로 파견근무를 갈 무렵부터 썼다. 30년간 기록했고, 지금 보니 그런 노트가 70~80권쯤 된다.”

 

지난해 6월엔 지사 재임시절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의 정치·선거자금 제의 사실을 폭로,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 기사가 나가자 단 이틀간 200만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일도 벌어졌는데···.

 

“폭로라고 말할 것 까진 없다. 그냥 사실을 밝힌 것 뿐이다. 두가지를 전달하려 했다. 그 하나는 한진그룹 창업주인 조회장 개인의 경영능력과 비전이 대단하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에 제동흥산이란 기업을 만들어 이미 생수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허가량이 하루 22톤인 걸로 아는데 당시 대한민국은 생수사업이라곤 꿈도 못 꾸던 시절이다. 그런데 그가 그 생수시장을 내다보고 일을 벌였다. 공기업을 만들어 삼다수 생산을 추진하면서 나 역시 시장확보를 고민했다. 결국은 중국시장이 관건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조 회장은 아마 그 시절 이미 중국시장을 내다본 것 같다. 그 기업인의 경영능력과 비전에 대해선 지금도 탄복한다. 그러나 동전의 뒷면이 있다. 기업은 자기이익을 위해 무엇이든 한다는 점이다. 그러기에 행정은 최근 벌어지고 있는 한국공항의 증수논란 사태처럼 기업들의 끝없는 욕심, 그걸 어떻게 잘 ‘방어’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공격이 워낙 집요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 방어의 최선의 방법은 ‘정당성’이다. 정치·선거자금 제의사실을 밝힌 건 바로 이 정당성 차원의 방어였다.”

 

 

서울 용산역에서 ‘삐끼’노릇을 하던 청소년기 고학시절, 육사 중퇴와 방황, 고시합격, 농림부 고위관료 생활, 외교관 생활, 마사회 사건으로 국외추방 신세, 도지사 부임과 민선 1기 당선, 그리고 낙선과 이어진 구속수감과 투옥 등 인생이 한편의 드라마다. 한 방송사에선 드라마로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제이누리>에 내놓기도 했다. 어떤 생각인가?

 

“평생을 살아가면서 그런 굴곡은 누구나 다 있다. 말하고, 드러내지 않아서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다. 다만 난 공직생활을 하면서 내가 그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상황이 그리 돼 어떤 일과 역할을 했다. 그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마사회 문제로 불거진 국외추방이나 국회 할복사건에 이르러러서도 결과적으로 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내 삶만 특별한 게 아니라 어쩌다 내가 행운아가 됐다. 다행히 어떤 역사적 시기에, 마침 그때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 그땐 그통스러웠지만 이제 그 시절을 지나고 보니 기회이고 행운이었다.”

 

회고록을 연재하며 잊었던 옛 사람들과 재회하는 기쁨이 있었다고 들었다.

 

“여러 사람을 만났다. 다만 처음 관선지사로 부임하면서 에피소드로 밝힌 한 단골식당의 주인을 아지 못 만났다. 전화로 서로 안부인사만 주고 받았다. 그를 만나고 싶다. 내가 찾아갈 생각이다. 그 외 재임시절 함께 일했던 공직자들이나 서울에서 농림부에서 같이 근무했던 사람들의 연락도 받았고, 제주에서 만나기도 했다. 농림부와 제주도청에 출입했던 당시 언론인들과 전화통화하며 안부를 묻거나 얼굴을 보기도 했다. 회고록 연재로 잊었던 인연을 되찾는 계기가 됐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내 회고록을 읽어줬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행복하겠다’며 부러워했다. 그럴 수 있어서 부럽다는 말까지 했다. 과분한 격려의 말을 많이 들었다.”

 

회고록에서 제주사회와 제주도정의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지금 도정에 대해 무조건 날을 세우는 '특정진영의 맹주'란 소리가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맹주다? 나로선 영광이다. 하지만 사실 이런 비판이 지금 도정에 필요하지 않겠는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다. 내가 그런 소리를 듣는다면 고맙고 영광이다. 이걸 말하고 싶다. 행정이나 정치는 사실 ‘정의’의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좋은 삶을 구현하려면 정의가 바탕이 돼야 한다. 결국 정의의 기초는 공정(公正)이다. 어느 사회든 그걸 바란다. 그런데 우리 제주사회는 그 욕구도 죽어가고 있고, 그 필요를 정치권에서 매장시키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누구도 얘기하지 않는다면, 더구나 행정을 했고 정치를 했던 사람이 침묵한다면 안될 말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다만 ‘날을 세운다’는 측면에 사적 감정이 개입된 걸로 보는 시각이 있는데 결코 아니다. 그렇게 보면 안된다. 양심을 걸고 사적 감정을 배제한다. 사적 감정이 있다면 내가 날을 세워서도 안되는 것이다. 사적 감정이 없기에 날을 세울 수 있다. 누구나 다 알테지만 특정인에게 나로선 사적으론 용서를 할 처지가 아니다. 공적으로 그는 제주도민들에게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는다. 용서받아야 할 일에 대해 우리 사회가 용납해선 곤란하다. 나 역시 용납하지 않는 것일 뿐이다. 공적인 판단이다. 아마 지금처럼 앞으로도 그런 입장은 불변이다.“

 

요즘 근황이 또 얘깃거리다. 제주에서 태어나 자란 ‘토종’ 제주인과 제주로 이주해 온 ‘신종’ 제주인 간의 공동체 네트워크인 ‘.혼디모영 생활협동조합’ 출범을 위해 열성이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지난해 여름 지인들의 소개로 춤꾼 홍신자씨 부부를 만났다. 그때 그가 떠나겠다더라. 이유를 물으니 여기선 불러주는 이도 없고, 알아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의 남편은 독일인으로 유럽에서 한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학국학회 회장이다. 유명인사들이 제주에선 별볼 일 없는 사람으로 전락해 있던 것이다. 난 ‘당신들이 올 땐 마음대로 와도 갈 땐 마음대로 못간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들은 결국 떠났다. 착잡했다. 거기서 막연한 고민이 밀려왔다. 그후 30여년 중앙언론에 몸담았던 한 분과 제주에 정착한 지 20여년인 기업인 등과 얘기를 나누다 힘을 얻었다. ‘육지것’과 ‘제주것’, ‘신종’과 ‘토종’이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네트워크를 만들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지난해 말부터 준비에 착수했다. 그런 분들과 올해 3월 초 첫 모임 갖고 난 뒤 일이 속사포로 진행됐다. 50명이 뜻을 같이 했고, 기왕이면 지금 부는 ‘협동조합 전성시대’ 바람에 맞춰 우리도 그 바람을 탔다. 현재 발기인 모임을 한 단계다. 목적은 귀농·귀촌하는 인구에 대해 우리가 협력할 방안을 만드는 것이다. 제주 입장에서 그 분들의 경력·경륜·노하우·재능을 제주에서 활용하자는 것이다. 윈-윈하자는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지금의 제주인 역시 성씨만 따져 봐도 외래유입층이 더 많지 않은가? 미국이 다양한 인종사회라면 우린 다양한 지역에서 오신 분들이 융합하는 사회로 만들자는 취지다. 궁극적으로 제주인 100만 시대를 여는 초석이 되고 싶다. 더욱이 3년 전부터 우리나라도 귀농·귀촌 인구가 농촌을 떠나는 인구보다 더 많아지고 있다. 지난해 통계를 보니 그들 중 제주에 오는 가구가 고작 154 가구로 1.9% 에 불과했다. 제주로 인구를 유입시킬 수 있는 어떤 노력 중 하나라고 봐 달라. 혼디모영! 그 이름 그 자체다. 내 마음 그대로다.”

 

내년이 민선 6기 지방선거가 있는 해다. 도지사 선거에 다시 출마가 예상된다는 관측이 있는데···.

 

“그 전에 전제를 할 게 있다. 사람들이 누가 지사에 출마할 것인가에 먼저 포커스를 맞추지만 사실 그건 틀렸다고 본다. 지금 제주도가 해야 할 일이 무언가? 그것부터 먼저 생각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난 뒤 그 일을 하기 위해 후보 중에 누가 가장 적합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그렇게 프로세스가 진행돼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지금은 누가 나올 것인가만 따진다. 제주사회 선거문화가 그렇게 흘러 왔다고 할 지라도 이젠 그걸 벗어날 때다. 두가지 반성을 해야 한다. 하나는 지금같은 선거문화 속에서 진정 제주도가 얻은 게 무엇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기본적으로 제주경제의 성장잠재력을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의 경우 잠재성장률이 4% 정도 된다고 하는데 제주도는 얼마인가? 잠재성장률 계산도 못하는 사회다. 그 다음 2011년 시·도별 경제성장률 통계를 보면 평균 5.8%인데 제주도는 1.9%다. 전국평균의 3분의 1 수준이다. 난 그걸 지금까지의 선거문화 결과라고 생각한다. 또 하난 ‘신진세력이 없다, 세대교체의 주역이 없다’고 말들 한다. 왜 없는가? 개인적 능력이나 꿈이 있겠지만 3명의 전·현직 민선 도지사 때문에 신진세력이 없는 게 아니라 그 선거문화가 신진세력의 진출을 가로막는 구조다. 쉽게 말하면 서울 양천구 지역구 출신인 원희룡 전 국회의원이 서귀포에서 출마할 경우 당선 가능성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결국 지금까지 선거문화와 관행을 기초로 누가 나올 것인가만 보고 있다. 누가 나온들 무슨 소용인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제주의 선거문화를 어떻게 내년에 바꿀 것인가가 과제다. 나의 출마 여부는 그 점에서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니다. 지금 내가 할 일은 이 선거문화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다. 그 차원에서 내가 할 일이 있다면 하겠다.”

 

지난 2월 한 인터넷언론의 내년 선거 출마계획을 물어보자 “난 아니다”라고 말했다는데 진의는 무엇인가?

 

“제주의 여론을 들어보면 나를 포함해 ‘전·현직 지사가 너무 오래했다. 세 사람 모두 다 가달라’는 의견이 많다. 공과(功過)를 따지는 것도 없이 무조건 가달라는 것이다. 세대교체의 논리다. 그런 여론이 40~50%나 되는 것 같다. 거의 절반에 이른다. 어찌됐건 그건 민의(民意)다. 그걸 존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내가 출마해선 안된다는 생각이다. 다만 최근 유엔(UN) 생물다양성 협약 당사국 총회를 제주가 유치하는데 실패, 평창으로 뺏기는 걸 보고 많은 생각이 있다. 왜인가? 정치력이 모자란 것이다. 우리 제주의 현실이다. 나의 경험이나 경륜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높다면 그땐 재고(再考)할 생각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도민들이 원하듯 세대교체를 할 인물이 등장한다면 전·현직 지사 세사람은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세대교체가 진정 도민들의 뜻이라면 출마할 생각은 없다. 정치적 경륜과 경험이 다시 필요하다는 도민들의 목소리가 높다면 그때 출마문제는 고려할 수 있는 사안이다.”

 

제주사회에 원로(元老)가 없다는 말이 있다. 어떤 생각인가?

 

“원로가 뭔가? 지도자가 만들어지는 게 아니듯 원로 역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스스로 원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정서는 원로가 되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어느 누구도 공과를 따져보면 공(功)이 있고 과(過)가 있다. 어느 정도 그 지역사회에서 지사건, 의장이건, 총장이건 정상적인 역할을 했던 분이라면 그 분들이 원로의 역할을 스스로 해야겠지만 사회도 그들이 원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줘야 한다. 원로가 없다는 얘기는 원로가 역할을 하는 걸 허용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제주의 원로역할은 침묵이다. 그러나 침묵하는 원로는 원로가 아니다. 그런 잘못된 제주사회 원로관을 깨겠다고 나서는 원로도 없다. 제주사회 문화가 그런 원로를 인정하는 노력도 없다. 문제다. 어느 사회건 갈등과 분열은 다 있다. 문제는 그걸 어떻게 생산적으로 전환시키느냐다.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는 ‘진실이 없는 화해는 화해가 아니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는 진실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진실을 확인하려는 노력이 없는 한 진정한 원로는 나올 수 없다.”

 

전·현직 지사를 아울러 ‘제주판 3김’으로 불리는 경우가 있다. ‘제주판 3김 청산’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는데···.

 

“그렇게 청산하라고 외치지 않아도 상황이 청산할 때가 온다. 그러나 ‘청산’이라는 말 자체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SK야구단 김성근 감독이 나와 동갑이다. 그는 지금도 현역이다. 그는 유명한 말을 했다. '대한민국처럼 엉터리 세대교체는 없다'고 말했다. ‘세대교체는 주전자의 물을 비우는 것’이라고 말했다. 물을 채우면 자연히 주전자 꼭지로 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채우지는 않으면서 물이 나오라고 하는 건 곤란하다. 채우지 않으면서 나가라는 것이다. 매번 선거 때마다 국회의원 공천 물갈이를 몇 번 했는가? 새피를 수혈한다는 논리로 노장(老將)을 잘랐다. 그게 진정 옳은 세대교체인가? 능력이 있으면 80살도 하는 거고, 능력이 없으면 40살도 못하는 거다. 우린 능력 있는 사람을 세대교체란 명분으로 정치권에서 수없이 도태시킨 경우가 많다. 그게 오늘날 이꼴이 된 현실이다. 엉터리 강제 구조조정이다. 세대교체는 자연스러워야지 인위적으로 되는 게 아니다. 붙잡아도 갈 때가 되면 간다. 게다가 ‘3김’으로 묶는 것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다. 적어도 세대교체를 얘기하려면 공과는 따져주길 원한다. 그런 건 하나도 하지 않고 그냥 나가라? 어쩌다 내가 ‘제주판 3김’ 중 한 사람이 됐지만 개인적 소망으론 이 ‘3김시대’를 누군가는 마무리해주길 원한다. 세사람의 공동책임도 인정한다. 그 세 사람 중 한 명은 현직에 있으니 그가 세 사람을 대표해 ‘제주판 3김시대’를 마무리해주면 최선이다. 세 사람의 공과를 전부 안고, 마무리해주면 좋겠다. 쫓겨가듯이 갈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제주사회가 가야할 길은 무엇이라 보나? 미래좌표를 말한다면···.

 

“지금 제주사회는 두 가지를 상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 첫째 비전을 상실한 시대다. 지금 제주도정의 비전이 무엇인가? 어떤 비전도 없다. 또 하나는 지도자 상실이다. 도지사는 있지만 지도자는 없다. 혹평이라고 보지 말라. 적어도 지도자의 덕목은 공익이다. 개인적인 것과 사적인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공직자는 공적인 영역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사적인 일을 하는 게 아니다. 공익이 우선이다. 공익에 대한 관념이 없이 지도자 역할을 한다면 그 순간 그는 지도자가 아니다. 도지사, 교육감직 모두 그렇다. 특정인을 지목하고 싶은 게 아니라 우리의 지난 선거문화가 바로 이렇듯 우리의 지도자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구조다. 비전 상실, 지도자 상실이 내가 생각하는 제주사회 진단이다. 그렇다면 해결할 방안이 무엇일까? 유권자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엔 우선 지도자가 바뀌어야 한다. 적어도 공익을 우선하는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그 다음은 공직사회다. 제주도는 거대한 기업이 있는 곳도 아니고, 공직사회 영향력이 어느 지역보다 크다. 게다가 제주도지사는 제주도 최대의 투자자다. 그런데 도지사와 공직자 관계를 보면 봉건시대 주종관계를 보는 것 같다. 절대군주와 가신(家臣)관계다. 인사시스템이 그렇다. 이걸 깨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기 위해선 사회가 공무원을 보호해 줘야 한다. 그런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 민선시대 공무원들의 움직임엔 제약이 많다. 짓눌려 산다. 상층부의 부당한 지시와 압력, 요구에 맞서 그들을 지켜주기 위한 사회적 합의와 노력이 있어야 한다. 억울한 공무원을 구해야 한다. 공무원들이 소신을 갖고 능력껏 일할 수 있도록 지켜주는 시스템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시급한 일이다.”

 

가벼운 질문을 하겠다. 나이에 비해 건강이나 체력이 청년 못지 않고, 기억력이 대단하단 말이 많다. 비결이라도 있는가?

 

“그건 착시현상이다(웃음). 비결은 없다. 건강은 솔직히 육군사관학교 시절 다져진 체력이 바탕이다. 그걸로 평생 사는 것 같다. 기억력이 좋다? 그건 그 사람들이 속는 거다(웃음). 그저 공부를 하고 안하고의 차이다. 난들 한번 보고 다 기억할 수 있겠나? 관심의 결과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산다. 비록 지금은 전직 신분이지만 평생을 공직 솔잎만 먹다보니, 그런 것만 생각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런 언변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입에서 숫자가 튀어나오는 게 사실 그런 식이다. 나는 그렇게 세팅된 것 같다. 나는 제주도만 오면 편안하다. 힘이 난다. 제주에 오면 나이를 잊는다. 나는 제주도의 기(氣)를 받는다. 제주는 나에게 기를 불어넣어주는 땅이다. 내 삶은 제주도에 묶여 있다. 감옥에서 보낸 세월을 빼면 내 삶은 언제나 영원히 제주도다.”

 

연재 중 어느 부분에선 육사 생도시절 그린 만평이 실렸다. 과거 도지사 선거에 임할 때 후보자 프로필에도 취미가 ‘만화그리기’라고 돼 있는데···.

 

“최근 양병윤 화백의 4컷 만평 ‘황우럭’ 1만회 돌파를 기념한 출판기념회 자리에 갔다. 축하하면서도 마음 속으로 ‘내가 저 자리에 있을 뻔도 했는데···’하는 생각을 했다. 양 화백은 제주일보에서 4컷 만평 작가로 데뷔했다. 양 화백이 그 회사에 몸담기 전 내가 그 4컷 만평 습작을 들고 제주일보에 노크한 적이 있다. 주인공 이름은 ‘맨도롱’이다. 그러나 보기 좋게 ‘빠꾸’ 당했다. 육사 퇴교 후 농사짓던 시절의 일이다. 어렸을 때 ‘코주부 삼국지’란 만화를 즐겨보다 나도 모르게 만화의 꿈을 갖고 있었다. 고시에 합격하기 전엔 만화공부도 했다. 만화가로 취직할 생각이었다. 제주일보에서 미끄러지고 보니 나중에 양병윤 화백의 ‘황우럭’이 등장했다. 지금도 그 만화에 대한 향수가 있다. 그 생각으로 어떤 친구에게 요새 월 30만원의 실습비를 주고 배우러도 다닌다. 그런데 그 젊은 선생님이 알콜중독 기질이 있어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 선생님이 많이 원망스럽고 걱정스럽다.”

 

우리 도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노인 얘기를 하고 싶다. 엊그제 통계 보니 제주 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이 13% 더라. 14%면 고령사회로 치는데 곧 진입한다는 소리다. 2018년 우리나라가 고령사회로 진입한다고 예측하는데 제주도는 한참 전에 고령사회로 진입한다. 유권자만 해도 50세 이상이 40%다. 그런데 제주사회는 노인에게 편견을 갖는 것 같다. 나이 얘기를 하면 난 가끔 맥아더 장군 얘기를 한다. 그가 한국전쟁에 유엔군 총사령관 역을 맡을 무렵 그의 나이는 만 70세였다. 50대로 알지만 그게 사실이다. 내가 50대 초반 시절 지사를 할 당시 일본의 오키나와현의 지도자인 오타 마사히데 지사는 72세였다.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2차대전 중 총선에서 패배하고 물러났다가 다시 총리로 복귀했을 때 나이도 76세였다. 그가 72세이던 때 총선에서 패배, 총리직에서 물러날 때 주변은 그에게 ‘이제 은퇴하고 칩거하시라’는 조언을 했지만 그는 거역한 셈이다. 81세까지 그는 총리직을 수행했다. 탱크주의로 유명한 배순훈 전 정보통신부 장관도 업계를 떠난 지 17년만에 일흔 나이에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방산기업협회의 회장으로다. 그들이 왜 그랬는가? 말로는 고령사회로 간다지만 고령자를 자꾸 사회의 짐으로 치부한다. 짐이 되길 원하는 노인들은 없다. 기회를 찾는다. 그들에게 기회를 줘야 한다. 특히 제주사회는 노인들이 다른 지역보다 더 고학력자다. 먼 과거도 그럴진대 왜 지금 시대에 연령차별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나?

 

“해군기지 문제가 걱정이다.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제주에서 진실이 먼저가 아니고 찬반이 먼저가 돼 뒤죽박죽된 상황이 재연되는 걸 안타까워 한다. 진실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언제나 찬반 타령만 한다. 제주사회가 모쪼록 차분해주기를 원한다. 진실을 규명하면 모든 게 해결될 일이다. 왜 편을 가르고 싸움부터 먼저 하는가? 우리 제주도가 속국(屬國) 근성이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중앙정부에, 서울에 기대는 것이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제주도는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자원과 문화, 역사를 갖고 있다. 그걸 깨우치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으면 한다. 그 점에서 결국 지도자가 중요하다. 그런 걸 생각하며 난 젊은 세대를, 젊은 지도자를 키워내는 ‘정치학교’를 만들고 싶은 꿈이 있다. 정말 차세대 정치지도자들을 그 학교에서 키워내고 싶다. 제주사회를 바꾸기 위한 시도다.”

 

☞신구범 전 제주도지사

 

=1942년생. 오현고를 나와 육군사관학교 4년을 중퇴, 1967년 5회 행정고시에 합격해 공직자로 입문했다. 제주도 기획관, 주이탈리아 한국대사관 농무관, FAO(국제식량농업기구) 한국교체수석대표, 농림수산부 축산국장, 농업구조조정정책국장,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YS정부 시절인 1993년 12월 제29대 제주도지사로 취임했다.

 

이어 첫 민선 지방선거인 95년 6·27선거에선 무소속으로 출마, 당선돼 31대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98년, 2002년 두 번의 제주지사 선거에선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그후 축협중앙회장을 거쳐 친환경 농업회사법인인 (주)삼무와 전시판매장인 삼무힐랜드를 운영했지만 지사 재직시절 뇌물수수사건에 휘말려 2년여 수감된 뒤 풀려났다. 삼무힐랜드는 수감기간 중 문을 닫았다.

 

제주삼다수와 관광복권,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제주교역, 제주세계섬문화축제 등이 그의 지사 재직시절 작품이다. 현재 제주생태도시연구소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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