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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人]한라산 청원경찰 신용만씨, 한라산은 스승이자 삶의 터전

“한라산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나 고난도 이겨낼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스승이자 제 삶의 터전입니다.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한라산에서 일할 수 있다면 할 수 있을 때까지 근무하고 싶은 게 작은 소망이자 바램입니다”

 

‘한민족의 영산(靈山)’, ‘세계자연유산’, ‘생물권보전지역’…. 한라산에 따라붙는 각종 수식어가 붙을 수 있는 것은 한라산을 지키는 제주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35년째 한라산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는 신용만씨(59).

 

 

한라산 해설가로, 때로는 등반객의 안내자이자 수호천사로 활약하면서 인생의 대부분을 한라산에서 보내왔다.

 

특별한 놀이터가 없던 시절, 한라산을 놀이터 삼아 다녔고, 성년이 돼서는 한라산이 직장이 됐다.

 

한라산에서 놀던 시절에는 설마 한라산이 삶의 터전이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설마가 진짜가 될 줄이야…. 한라산이 그를 붙들어 놓은 것이다.

 

안방보다도 더욱 편하다는 한라산에 그의 인생 대부분이 있었다. 그는 걸어 다닐 수 있을 때까지 한라산을 놓지 않겠다고 한다. 아니 한라산이 그를 놓지 않을 것이다.

 

한라산과의 인연은?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열매 따러 한라산 자락에 많이 다녔다. 중학교 때에는 재미삼아 동네 친구들과 항구(군대찬합)와 배낭, 버너를 선배에게 빌려 쌀 몇 줌과 양파, 된장을 넣어 다녔다. 관음사코스로 정상에 올라 돈내코 코스로 내려오는 1박2일 일정으로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불도 때지 못하고, 변변한 야전침구도 없어 낙엽을 모아서 그 위에 앉아 서로 부둥켜안아 밤을 보내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동네친구 3명과 함께 한라산에 오른적이 있다. 비가 많이 와 용진각 대피소에서 머물고 다음 날 아침 올라가기로 했다. 많은 비가 오는 날인데 한 등반객이 맥주병 하나만 들고 아무런 장비 없이 올라왔다. ‘나쁜 날씨에 정상 등반은 위험하니, 다음 날 우리와 같이 올라가자’며 정상에 가겠다는 것을 만류했다. 다음 날 정상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 사람이 자꾸 백록담을 보자고 해 할 수 없이 백록담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백록담을 여러 번 다녔기 때문에 그냥 정상에 갔다가 성판악으로 내려가려했다. 안개 낀 백록담 한가운데 인형 같은 게 떠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확인해보니 사람 시체였다. 사진을 몇 컷 찍고 서둘러 성판악으로 내려왔다.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데, 내려오다가 나뭇가지에 배낭이나 옷이 걸리면 소름이 돋아 서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하산했다. 어떻게 내려왔는지도 모르겠다”

 

미소를 띠면서 말하지만 당시 기억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는지 간간이 한숨을 내 뱉었다.

 

“성판악 초소까지 내려와서 신고했는데, 경찰관들이 다시 올라가자고 했다. ‘아침부터 밥도 못 먹고, 겁도 나서 올라가지 못한다’며 결국 가지 않았다. 다음날 경찰과 한라산 직원들이 동문시장 근처에서 길거리 잡화상하는 내 친구를 데리고 가서 부검하고 인근에 묻었다는 얘기를 그 친구를 통해 들었다. 죽은 시체는 목이 무엇으론가 졸린 흔적이 있어 경찰은 타살로 추정했다. 죽은 이와 함께 한라산을 올랐던 서울 사람을 수배했는데 잡지는 못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 사건 이후로 잠을 잘 때면 가위에 눌려 이불이 다 젖을 정도로 식은땀을 흘려 어머니가 동네 신방한테 데리고 가 ‘넋들이’를 해서 겨우 진정이 됐다”

 

신씨는 이 사건 이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산에 계속 다녔다. 고교 3학년 봄에 한 차례 다녀온 이후에는 취직도 해야 될 처지라, 한라산에는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어떻게 한라산에 근무하게 됐나?

 

“한라산을 다니면서도 설마 한라산에서 근무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부산에 있는 고종사촌형이 피아노기술자였는데, 내려올 때 마다 피아노 조율 기술을 배워보라고 권유해 고3때 그 기술을 배우러 부산으로 갔다. 졸업 후 부산에서 고종사촌형을 도와 일을 했다. 군대도 거기서 제대했다. 제대 후 제주에서 악기사업을 하려고 했는데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포기했다. 24살 때 선배가 한라산국립공원에서 일해보라고 해서 잠시 근무할 요량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 선배들이 ‘근무를 하다보면 공무원 시험에도 유리하다’라며 자꾸 붙잡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산도 잘 타고, 행동도 빠르고, 선배들과도 친해서 붙잡은 것 같다. 다르게 생각하면 부려먹기 좋아서가 아닌지도 모른다. 생활이 어려워 고용직보다 14만원의 월급 차이가 있어서 1980년에 청원경찰로 전환했다”

 

당시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는 시내에 있었다. 그러나 취임한 도지사가 한라산 담당 기관은 한라산에 있어야 한다고 해서 어리목에 지금의 관리사무소가 지어지게 됐다. 인력은 사무관 1명(소장)에 임업직 1명, 타자수 1명이 행정직원이었고, 나머지는 상용직(고용직)으로 매출을 담당하고 등반로 관리정도였다.

 

한라산에 근무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이 있나?

 

“한라산은 기상변화가 심하고 안개도 자주 껴 등산객들의 안전을 항상 위협한다. 40대 초반때 쯤으로 기억한다. 한라산 서북벽으로 올라가는데 50대 중반의 남성이 딸과 함께 올라가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멜빵으로 그 남성을 메고 1800고지로 내려왔다. 혈압이 너무 높았었다. 또 한번은 대학생들이 한라산 백록담 물과 백록담 천지 물을 합수한다고 해서 일본 NHK에서 취재를 왔다. 그 취재진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올라왔다고 해 꿀차를 먹이고 밤 8시가 넘어서 같이 내려갔다. 1500고지쯤 내려갔을 때 갑자기 취재진 1명이 호흡곤란으로 쓰러졌다. 인공호흡하고 업어서 1400고지까지 내려가 구급대에 인계했다. 한두 달 뒤에 NHK사장과 당시 취재진이 사무실을 방문해 금일봉을 주고 갔다. 올해 초에 47명이 돈내코 코스로 하산하다 구상나무 숲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길을 잃었다고 생각해 그대로 있었던 거였다. 지금까지 한라산에 근무하면서 70여명이 내 도움으로 조난사고를 면했다”

 

한라산에 근무하면서 기억에 남는 단속 사건이 있다면?

 

“33살 때 장구목에서 1m 정도 되는 구상나무 70여본을 도채한 일행 5명이 뿌리를 묶을 때 덮쳐 3명을 검거했다. 그들을 제주도청 산림과에 넘겼는데, 자기들 담당이 아니라고 했다. 제주시청에도 문의했는데 거기도 미뤘다. 문화재보호구역이어서 문화정책과에 넘겨서 처리했다. 그 건으로 도지사 표창을 받기도 했다.”

 

 

한라산에서 취재진과 학자들의 단골 안내자이자 식물연구가와 사진가로도 알려져 있다.

 

“오가는 등반객들이 등반로 주변에 핀 야생화를 보고 자꾸 물어보기에 한라산의 모든 것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식물도감을 배낭에 넣어 다니면서 관찰했다.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아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식물 사진과 풍경사진을 찍었다. 문순화씨 등 유명 사진작가들이 서울에서 내려오면 안내해주곤 했다. 그들 도움으로 식물사진을 촬영 실력이 어느 정도 늘었다. 제주시내에 ‘악산’이라는 카페에서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 2시간씩 슬라이드 상영을 하기도 했다. 39살때 한라산에서 사진작업을 하던 안승일씨(산악사진가)에게 좋은 카메라를 갖고 싶다고 말했는데, 서울로 돌아가자마자 중형 카메라와 렌즈 3개, 필름 등 모두 350만원어치 장비를 보내왔다. 선물인줄 알고 기뻤는데, 일주일 뒤 청구서가 날아왔다. 돈이 없었지만 장비는 갖고 싶다는 욕심에 돈을 빌려 송금했다. 그것이 재산 1호였다. 재산 1호가 등에 붙어있다고 생각하니 신바람이 나서 한라산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정말 새처럼 날아다닌 것 같았다. 그렇게 찍은 사진은 전국 사진공모전에서도 수차례 입상을 하기도 했다.”

 

그가 지금까지 한라산에서 촬영한 사진은 약 6만 컷 정도 된다. 상태가 좋지 않은 버린 사진까지 하면 약 18만 컷도 넘는다. 이후 디지털카메라로 촬영한 사진까지 하면 25만 컷까지도 짐작이 된다.

 

“슬라이드(포지티브) 필름을 찍기 전에는 네거티브 필름(일반 컬러 필름)으로 촬영했다. 라면박스 2상자 분량이 됐다. 슬라이드 필름으로 촬영하면서 네거티브 필름을 사무실(한라산국립공원사무소)에 기증했다. 거기에는 한라산에서 우마를 방목했던 사진, 등반객들의 모습, 나무 캐는 모습 등 한라산의 거의 모든 기록이 담겨져 있었다. 당시에는 네거티브라서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했다. 최근에 찾아보려고 했는데, 사무실에서 관리가 제대로 안돼서 잊어버렸다. 지금도 그것만 생각하면 너무 후회된다”

 

그는 내년이면 정년을 맞이한다. 정년 후에도 5년간 계약직으로 채용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어 더 근무하겠다고 한다. 한라산을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있을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한라산 품에 있고 싶은 심정이다.

 

한라산에 근무하면서 많은 등반객들을 볼 것이다. 그 중 가장 꼴불견 등반객은?

 

“한라산은 악산이고 때로는 위험하기도 하다. 그래서 제대로 된 복장을 갖추고 다녀야 한다. 정장차림에 구두를 신고 오기도 하고, 치마를 입고 산에 오르기도 한다. 출입금지 안내간판을 무시하고 들어가는 사람도 있다. 수학여행단의 경우 한 코스를 거의 점령해 버리고 코스를 이탈해 훼손하는 경우도 있다. 분산시켜야 하는데도 무시하고 그냥 막 오르게 한다. 유원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탐방로’라는 명칭은 한라산에 맞지 않다. ‘탐방로’라고 하면 가볍게 생각한다. 한라산 방문객 숫자만을 생각하다 보니 이러한 현상이 생긴다.”

 

35년을 한라산에서 근무했다. 이제 정년도 얼마 안 남았다.

 

“후회는 없다. 한라산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한라산에서 배운 것도 많다. 스승이자 내 삶의 터전이다. 겨울 한라산을 특히 좋아하는데, 눈보라 속에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한기에 싸우고 난 뒤에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이겨낼 수 있는 자신감이 생긴다. 퇴직 후 5년 동안 근무할 수도 있는 규정이 있다. 걸어 다닐 수 있는 동안 한라산을 다니면서 글도 쓰고, 사진을 촬영하는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또 후배들이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그 동안 미뤘던 집필 작업도 할 것이다. 한라산의 산악사고, 도체사건 등 한라산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후배 청원경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한라산에 근무하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고생한다. 특히 청원경찰들은 수당도 제대로 못 받으면서 비가 오나 눈이오나 산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더욱 고생이 많다. 하지만, 불만을 갖기 보다는 최선을 다해 근무해야 한다. 그리고 주인의식을 가져야 한다. 한라산은 우리 것이고 제주도민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기 개발에도 힘써야 한다. 한라산이라는 좋은 환경에 근무하면서 많은 공부를 할 수 있다. 한라산을 찾는 모든 분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 자세가 돼야 한다.”

 

그는 한라산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한라산 삶’이라는 사진 동아리를 조직하고 초대회장으로 있다. 각 코스의 근무자들을 자주 볼 기회가 없기 때문에 만남의 기회를 갖기 위해 조직했다. 15명이 참여하고 있으며, 내년 6월에 성판악 탐방안내소가 문을 열면 사진전시회고 계획하고 있다. 또 어리목 광장에서도 상설전시도 계획하고 있다. 그는 후배들에게 “한라산을 오르내릴 때 그냥 지나치지 말고 사진을 찍으면서 한라산을 배우고 소통하라”라고 말한다. 민족의 영산을 지키는 이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그 영산을 존경하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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