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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속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13)

 

목초개발이 끝나자 맥그린치의 눈길은 목축용 소로 쏠렸다. 양돈도 좋지만 목초가 개발되었으니 소가 좀 더 경쟁력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맥그린치 신부의 부친은 수의사였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다니다 보니 소에 대해 좀 아는 편이었다. 10살 때는 감자가 목에 걸려 죽어가던 소를 치료, 동네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수의사가 될 것”이라고 칭찬을 받았던 적도 있다.

 

맥그린치 신부가 처음 제주에서 본 소는 볼품이 없었다. 반면 육지에서 본 한우는 매우 우수한 품종이라고 생각했다. 섬이기 때문에 다른 우수 품종과 교배할 기회가 없기 때문에 근친교배로 인한 열성유전 때문이었다. 밭갈이는 좋을지 모르지만 육식이나 비육용, 즉 경제용으로는 좋은 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목초도 없어서 먹이도 시원치 않으니 제주소가 육지에서 키우는 소보도 빈약할 수 밖에 없었다.

 

품종이 좋은 소를 수입하여 종자용 겸 식용으로 키울 마음을 먹었다. 당시 우수 비육소 품종은 뉴질랜드와 호주, 케나다, 미국 등이 정평이 나 있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가격·품종 등을 고려할 때 뉴질랜드가 적당하다고 보고 뉴질랜드 소 500마리를 수입키로 결정했다.

 

뉴질랜드 수출회사에 소 500마리에 대한 가격협상을 벌여 품종·수량·예상가격을 받았다. 이 예산서를 가지고 독일 주교회의 산하 국제개발원조기구인 세계적인 원조단체인 미제레오르(Misereor)에 지원을 요청했다. 1960년대 이후 한국 지원을 본격화했던 구호단체다. 전후 복구시기가 아닌 경제개발 사업시기에 우리를 도와준 특이한 단체이다. 한국 가톨릭이 선진국 교회에 신청한 개발원조 요청 가운데 사업수 면에서 전체의 43%를 이 단체에 신청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주요 선진국 교회가 한국에 보내준 실제 지원액 1538만 달러 가운데 66%를 미제레오르가 보내주었다고 한다.

 

 

이 단체의 대표적인 지역개발지원사업은 사라호 태풍 수재민 구호, 제주도 양모가공공장 건축(이시돌), 부산 성모의원 건립, 나환자촌 양계사업, 북한강댐 건설지원 등이다. 독일은 2차대전으로 패전국이 돼 모든 시설 파괴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외국의 구호가 독일국민들에게 기아선상에서 벗어나게 하여 주었고, 국가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가 도울 때라는 분위기가 충만할 때였다. 이 단체는 규모도 컸지만 심사가 엄격하기로 유명한 단체다. 그런데도 맥그린치 신부의 계획안, 즉 소 500마리 수입에 소요되는 예산 75%를 부담해 달라는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맥그린치 신부는 기쁜 마음으로 뉴질랜드를 직접 방문, 소를 수출하는 무역회사로 갔다. 그러나 그 회사는 막상 계약을 하려고 하자 자신들이 실어 나르는 배는 1000마리 분량의 소를 싣고 나른다며 500마리론 곤란하다는 얼굴이었다. 당시(1970년)에 제주도 한우사육규모는 약 4만 마리다. 북제주군에서 1만 마리를 사육하고 있는데 그 10%를 수입한다는 건 무리였다. 맥그린치는 포기했다.

다시 이웃 목축국가인 호주로 갔다. 호주에서 가장 큰 가축수출회사인 엘더스(Elders)사로 갔다. 협상을 시작하였다. 500마리 밖에 살 수 없는 사정을 줄곧 설명하였다. 하지만 그 회사는 650마리는 돼야 보낼 수 있다고 버텼다. 그러더니 그들은 외상조건을 걸었다. 150마리 값은 2~3년내 갚으라는 것이다. 대신 단체보증을 세우라는 것이다. 캄캄했다. 낯선 호주에서 제주가 어디인 줄도 모르는데 믿고 보증을 할 사람이나 단체가 있을 수 있겠는가?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뜻밖에 그런 단체가 나타났다. 호주에 있는 골롬반 선교회가 150마리에 대한 보증을 해 주겠다고 자원해서 나선 것이다. 계약은 신속하게 끝났다.

 

맥그린치 신부는 환한 얼굴로 귀국, 소들을 맞이할 채비로 분주했다. 축사정리 등 할 일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검역문제도 보통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에 이렇게 많은 소를 수입해 오는 경우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아마 이시돌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그러는 데 2~3개월이 지나도 소식이 없었다. 불안하기 시작했다. Elders사는 세계적인 회사이기 때문에 동경에도 사무실이 있었다. 동경 사무실로 항의를 했더니 그 직원이 찾아 와서 하는 말이 "650마리를 수송하는 배가 아직 유럽에 가 있기 때문에 좀 늦는 것“이라고 핑계를 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은근히 1000마리를 사라고 다시 들이댔다. 650마리를 실을 수 있는 실은 배를 기다리려면 한참 걸린 다는 것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그 직원에게 2주내에 확실한 답변을 달라고 화를 내고 돌려보냈다. 때맞춰 소를 보내주지 않으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엄포도 놓았다. 그러나 계약서상으로 보면 불리한 것은 맥그린치 신부였다. 풀지 못할 문제가 풀 수 있는 문제보다 더 많은 것 같았다. 신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뿐이었다.

 

 

헬기가 날아왔다. 호주 회사 직원이 돌아간 일주일 후에 하늘에서 헬리콥터 소리가 크게 났다. 헬기가 이시돌 목장에 나타난 것은 초유의 일이다. 돌연 목장 한 가운데에 헬기 한 대가 내렸다. 구경인파가 몰렸다. 한진그룹의 조중훈 회장이 타고 온 헬기였다. 그는 멋쟁이였고, 행동이나 말투도 무척 신사다웠다. 그의 말이 걸작이었다. "제가 제동목장에 350마리를 수입하려고 하는데 그 쪽에서 물량이 적다고 해서 못하고 있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신부님께서도 수입 소 물량이 적어서 못하고 있다고 해서 같이 합하여 수입하는 것을 제안하러 찾아 왔습니다."

 

정말 하늘이 도움을 주셔서 조회장에게 영감을 준 것 같았다. 조 회장 역시 제주도가 목축업 최적지가 될 것이라 생각하고 제동목장 부지를 구입, 막 목장을 조성하는 단계였다. 수입은 성사됐고, 소는 즉시 들어왔다.

 

그런데 수입선이 한림 항에 다다르자 또 문제가 생겼다. 화물선이 너무 커서 한림 항은 물론이거니와 제주항에도 댈 수가 없었다. 게다가 부산항에 대고 거기에서 검역을 마치고 다시 실어 와야 하는 난제가 나타났다. 부산에 소를 내리면 임시로 가두어 두어야 할 곳도 없었다. 임시축사도 문제지만 옮겨 올 때까지 먹이도 주고, 보살펴야 할 비용과 인원을 생각하니 눈 앞이 캄캄했다.

 

 

 

 

다시 머리를 쥐어짰다. 드디어 방안을 생각해 냈다. 한림 앞바다에 호주 소전문화물선을 세워 놓고 바지선을 가져다가 거기에서 소를 싣고 운반하면 될 것 같았다. ‘정주영’식 방법인 셈이다. 바지선을 구하러 전국을 돌아 다녔다. 그 당시에 그만한 바지선은 부산항에 주둔하던 미국 해군밖에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조건 사령관을 찾아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협력을 구했다. 그들이 선선히 응해줬다. 호주의 소들을 싣고 오는 큰 화물선이 마치 함대의 진격 같았다. “소가 온다”는 주민들의 함성이 이시돌 언덕을 가로 질렀다.

 

그 시절 맥그린치를 도와주던 켈리(Jeremiah Kelly) 신부는 이 광경을 목격한 후에 “임피제 신부는 군중 가운데서 가장 조용히 있었다. 그리고 그는 무엇을 잃어버린 듯이 두리번거렸다. 도착한 1000마리 소를 약 20km 떨어진 이시돌 목장으로 끌고 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1972년의 일이다.

 

드라마가 성공했다. 정부도 소 검역을 목장 내에서 받도록 협조해 주었다. 이 소는 경제성이 모자라는 제주소를 대신하여 농가에 종축개량용으로 활용됐다. 당시에 제주도내 모든 가톨릭교회를 주관할 뿐만 아니라 이시돌농촌개발협회의 이사장이었던 해럴드 헨리 대주교는 “맥그린치 신부는 하루에 22가지를 생각해 내는 아이디어맨이다. 나는 한 달에 두 번 그와 만나 이시돌에 관한 일을 처리한다. 맥그린치 신부에게 만일 다음 달에 소를 구입하기 위한 계획된 돈이 1만 달러가 있는데, 그가 이것을 이번 달에 앞당겨 다 쓰려고 할 때 나는 간섭 없이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그는 그것을 좋아한다. 나는 군대(2차 대전에 참전했음)에서 누구에게 임무를 주면, 그것을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말라고 배웠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의기투합이다. 1년 뒤인 1973년에 또 호주에서 육용 종자용으로 980마리와 우량 양돈 종돈용으로 39마리를 들여왔다. 1981년 5월에는 캐나다에서 농가 종축 개량용으로 축우인 심멘탈 600마리를 도입하였다. 1982년에는 호주에서 육우 870마리, 젖소 156마리, 면양 70마리를 수입했다. 뿐만 아니라 1983년 4월부터 1984년 6월에는 제주도에서 추천한 소 없는 농가에 번식용 소 350마리를 시가의 반값으로 분양하기도 하였다. 이시돌 목장에 소가 가장 많을 때는 2500마리나 됐다.

 

한편의 영화, 드라마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다. <글=양영철/ 14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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