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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수의 원도심 만들기(5) 원도심의 타임캡슐을 복원하라

제주성은 내성-탱자성-해자-외성의 철벽 구조였다

 

유배인 조정철은 제주 여인 홍윤애와 애달픈 사랑만 한 것이 아니라 1811년 목사로 부임해 와서는 제주성의 정비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특히 그는 성 밖의 이중성, 즉 외성(外城)을 새로 둘렀다. 이런 엄청난 사실은 '비변사등록'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음에도 그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있었던 것은 의아한 일이다.

 

조정철은 왕에게 "탐라의 내성(內城)과 바깥 지성(枳城 : 탱자성)은 예로부터 없었던 성의 체제이며 천험(天險)의 요지"였다며 상당히 훼손된 사실을 안타까워하는 글을 올린다. 본성을 내성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가 성 밖에 성을 한 바퀴 더 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일에 착수하기 전에 왕의 허락을 구한다.

 

"성첩(城堞)은 예전과 같이 그대로 두고 바깥에 성을 쌓아 그 사이에 12개의 과실 정원을 설치하여 모두 귤과 유자를 심고 다시 성과 정원을 주관할 사람을 두어 수리 보호하고 감수하는 일을 맡기게 하소서."

 

성첩이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병을 쏘거나 방어하는 곳이다. 기존의 성을 보수하는 대신에 아예 성 밖에 성을 다시 두르겠으니 허락해 달라는 메시지다. 이렇게 하여 제주성은 안에서 볼 때 내성-탱자성-해자-외성이라는 4중 구조의 철옹성을 구축하게 된 것이다. 조정철은 기쁜 마음으로 왕에게 "지금 성은 완공되었고 호(壕)는 깊으며 그 사이 12개 과원(果園)의 귤나무 숲은 무성하여 볼만 한 아름다움이 있어 실로 매우 다행스럽습니다."라고 보고한다.

 

호가 깊다는 것은 해자를 잘 정비했다는 뜻이며, 황폐했던 탱자성을 귤나무 과수원으로 바꾸었다는 뜻이다. 귤나무라고 해서 방어의 기능이 사라졌다면 오산이다. 당시 귤나무는 탱자나무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센 가시가 돋쳐 있었다. 제주민속자연사 박물관에 가보면 산물이라는 재래귤 나무에서 볼 수 있다.

 

12과원은 상당히 넓은 구역이었다. 지금은 귤이나 탱자나무는 흔적도 없고 모두 주택지로 변했으나 지적도에 나타난 동일지번으로 그 윤곽을 쉽게 유추해볼 수 있다. 외성 터는 상당 부분 고스란히 원도심의 골목길로 남아 있다. 이 사실에 주목한 학자는 양상호 교수였다. 그는 원도심의 도로체계에 대한 2011년의 논문에서 "성곽에서 약 35m 간격을 두고 성곽을 둘러싸면서 연결된 도로가 두드러지게 확인된다. 이 도로는 읍성 동남쪽의 험난한 지형 부분을 제외하곤 성곽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고 탁월한 안목을 보였다. 그는 이를 해자와 외성의 결합체인 것을 파악하지 못해 편의상 '둘레길'이라 부르긴 했으나 방위의 기능이 있었다고 정확히 밝혔다.

 

"이 '둘레길'은 일차적으로는 성 밖의 각 마을을 이어주는 연결도로 및 순라(巡邏)의 역할을 수행하겠으나, 유사시에는 성곽의 방어를 위한 시설물이 될 수 있다. 도로를 만들면 도로의 양옆에는 돌담을 쌓게 되는데, 이 돌담은 해안을 통해 상륙한 적군의 직선적인 수월한 침입을 방지할 수 있는 2중, 3중의 방어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 도로의 안쪽으로 9m 너비의 밭을 만들어 같이 돌아가게 했는데, 이 밭에도 밭담을 쌓게 되므로 또 하나의 방어 시설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둘레길'은 지형적으로 험난한 구릉지인 동남쪽을 제외한 성곽의 전체에서 방어를 위한 보조수단으로서 의도적으로 설치했다고 할 수 있다."

 

조교의 형태, 길주읍성과 서안성에서 본다

 

그렇다면 조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664년 과거시험 장면을 그린 북새선은도(北塞宣恩圖)에 그 모양이 확연하다. 함경북도 길주읍성 안팎의 묘사가 매우 세밀하기로 흔치않은 이 그림의 동문 밖에 개울 같은 해자가 있고, 그 위에 놓인 나무다리가 곧 조교다. 여기에 연결된 밧줄이 홍살문 같은 기둥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가 감기는 구조로 되어 있다. 길주읍성은 고려시대에 여진족을 견제하기 위하여 1107년 축성되었다가 1430년 세종 때 인근으로 이전한 최북방 전초기지였다.

 

‘북새선은’이란 북쪽 국경과 가까운 오지에서 과거를 실시하여 변방에 사는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주었다는 뜻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정에서는 최북단 평안도와 함경도, 최남단 제주도에 특별 과거를 실시해 인재를 등용, 우대하는 정책을 취했다고 한다. 과거를 보러 한양까지 가지 않아도 되었다는 것이다. 그림에서 치러진 특별 과거는 문과 합격의 정원이 3명인데 비해 무과는 무려 300명을 뽑았다고 한다.

 

한국인들의 뇌리에선 사라져버린 이런 다리를 중국 서안성(西安城)에 가면 볼 수 있다. 1370년 명나라 때 건설된 이 성의 공식 명칭은 서안성벽(西安城墙)이며 시안청창이라 발음된다. 이 성벽은 중국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제일 완전하게 보전된 경우라 한다. 사대문 가운데 영녕문(永寧門) 앞에 이 다리가 있다. 제주성의 조교는 감히 서안성벽에 견질 수는 없을 것이나, 길주읍성보다는 컸을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 있다. 성의 둘레 1,400미터인 길주읍성보다 제주읍성은 거의 배에 달하는 2,563미터였기 때문이다.

 

탐라문화광장의 취지 살려 백년 복원 계획 세우라

 

이렇게 제주읍성 밖 대부분을 인공해자로 둘렀다는 것은 1900년대 초반의 지적도만 보아도 선명하다. 제주읍성에는 동쪽 산지천과 서쪽 병문천 만을 '자연' 해자로 삼았다는 게 많은 사람들의 상식이다. 사실 제주성 뿐만 아니라 나라 전체의 해자가 언제 어떤 식으로 없어졌는지 아는 사람이 없다. 주기적으로 바닥을 파내고 내부를 강화하해야만 제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데, 바닥에 쓰레기 등이 쌓여서 저절로 메꿔져서 해자의 기능을 상실했을 것이다.

 

북성 밖의 해자는 지금의 해짓골이라 불리는 지역이다. 행정적으로는 일도중로라 한다. 해변에 자리 잡으면서도 못이 있어서 해지(海池)골이라 불렸다거나 바닷가에 있어서 해저 (海底)고을이라고 지명유래를 푼 경우가 있으나 이는 해자가 있던 고을이어서 그렇게 불린 것이 명백해 보인다. 왜냐하면 어느 고을이 길게 난 길을 따라 형성되는 경우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짓골, 즉 일도중로는 외성이 헐리면서 그 자리에 길이 생겼고, 그 길 좌우에 형성된 긴 시가지가 해짓골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산지천 북수구에서 성이 북쪽으로 이어지다 서쪽으로 구부러지는 지점을 ‘곱은 성굽’이라 하는 사유도 산지천 간성(間城)이 외성과 연결된 지점이기 때문이다.

 

해짓골은 바닷가라서 파면 바닷물이나 용천수가 나오던 곳이어서 해자 안에 물이 고여 있었을 것이다. 모기들이 살기 좋아 여름이면 성 전체가 모기들에 시달렸을 것이다. 수인성 전염병의 온상이기도 했을 테니 성이 방어적 기능을 상실한 20세기에 들면서 매립대상 일번이었을 것이다. 일본이 제주성을 다 허물어 축항 공사에 쓸 무렵 해자가 있었던 지역이 대부분 택지로 분할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조선 말기에 해자는 거의 매립되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해자에서 이외의 유산이 나오기도 한다. 동래읍성의 해자 유적에서 철제 비늘갑옷이 나온 것은 좋은 예다. 해자의 뻘 속에 묻혀 공기가 차단된 덕분에 400여 년 전 것으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좋다. 제주에는 삼읍의 세 성 뿐만 아니라 방어를 위한 아홉 개의 진성이 있었는데, 지금 50대 중반인 김윤현 씨는 초등학교 다닐 때 수산진성 해자 속을 넘나들며 놀았다고 증언했다. 진성에도 해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해짓골에 포클레인과 불도저 소리가 요란하다. 당국에서는 “제주시 해짓골 도시계획도로 62년 만에 착공”이라며 동네 사람들의 오랜 숙원을 풀어줄 것이라 한다. 올해 말까지 왕복 2차선(폭 15m) 도로 356m를 개설한다고 한다. 시는 이 도로가 준공되면 주민 생활불편 해결과 탐라문화광장, 차 없는 거리 등과 연계한 관광객 유치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밝혔다. 

 

그런데 이 도로의 상당 부분이 지성(탱자성, 12과원)은 물론 해자와 겹친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이 지역의 지층에 대해 심도 있는 조사와 발굴이 필요하다. 지면을 포장하고 나면 완전히 묻혀버릴 귀한 탐라의 자원을 살려내야 할 것이다.

 

해짓골의 많은 가옥이 매입되어 소위 '명품도로'로 터파기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다. 원도심의 타임캡슐을 열 최상의 기회다. 짧은 구간만이라도 4중 구조의 성곽을 복원하는 것만이 탐라문화광장의 조성 취지에도 걸맞다 할 것이다.

 

한 번에 다 하려 들지 말고 일 년에 삼십 미터면 어떠랴? 백년대계로 조금씩 복원하며 콘텐츠를 만들어 가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유적으로 자리매김 되지 않을까?  

 

☞강민수는?
=어느 대기업 회장실과 특급호텔 홍보실장을 거쳐 어느 영어교재 전문출판사의 초대 편집장과 총괄임원으로 3백여 권의 교재를 만들어 1억불 수출탑을 받는데 기여했다. 어린이를 위한 영어 스토리 Rainbow Readers 42편을 썼고, 제주도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관한 제주문화 콘텐츠 전국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기도 했다. 대안 중심의 환경운동가로 제주 최초의 마을 만들기 사례인 예래생태마을의 입안자이며 펭귄수영대회 등의 이벤트 개발자이기도 하다. 현재 제주의 한 고등학교 초빙으로 영어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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