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부모인문학(1) ... 새 연재를 시작하며

 

긴장할 수 있기에 행복한 우리의 아이들

 

‘누군가 불확실성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껴안으라고 내게 말해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예측가능한 길의 바깥으로 내려서야만, 고정관념에 의문을 던져야만, 그리고 세상을 기회와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곳으로 바라보아야만 진정 멋진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내게 말해줬더라면?’(티나 실리그)

 

아이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가정이든 사회든
아이로서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때입니다.
아이를 살리는 일은
가정도 사회도 살리는 일입니다.
아이의 목에 도금 가짜 금은동메달 대신 순금일 수 있을 희망의 목걸이를 걸어줘야 합니다.
아이의 가슴에 엉터리 스티커 대신 희망의 배지를 달아줘야 합니다.

 

우리 아이를
제대로 멋지게 키우고 싶은 마음을 가졌던,
우리 아이들 앞에서
온전하고도 멋진 부모이길 바라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이 글을 씁니다.

 

그렇게도 사랑한다면서 소홀하진 않았나?

 

지나쳐버렸다지만 과거라는 것은 회상하기에 언제나 현재입니다.
나의 추억은 대체로 ‘아픔’으로 떠오르지만 자식과의 추억은 대개 ‘저려옴’으로 더듬게 됩니다. ‘아픔’도 ‘저려옴’도 다하지 못한 ‘아쉬움’을 동반하지만 ‘아픔’은 상대적이되 ‘저려옴’은 절대적입니다. 이래서 가슴을 에는 아픔은 마음을 울컥, 저릿하게 하고 맙니다. 나의 자식을, 우리의 자식을 떠올리면 모든 부모는 이렇습니다.
나의 여자, 아내와 나의 남자, 남편과의 사랑을 매개로 세상에 나온 아이와의 첫 대면, 어떻게 기억하시는지요?

 

신비함 그리고 신기함

 

‘우리는 생물학적 절차와는 다른 삶을 산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을 되새겨봅니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은 신비스러움 속에서 만납니다. 신기해서 눈물도 흘리게 하는 우리의 만남은 어떠한 만남보다도 매우 특별합니다.
수능시험을 보는 날, 수험장 밖에서 한 어머니를 보았습니다. 딸이 들어간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머니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아들을 키우는 나도 따라 눈물을 흘립니다.

 

공감의 전염, 동감의 전이

 

정말 우리는 생물학적 눈물이 아닌 다른 눈물도 흘리는 유일한 동물인가 봅니다.
저릿한 마음.
두 사람은 왜 울었을까요?
부모들은 왜 눈물이 났을까요?
이 또한 신비하지 않을 수 없고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부모) 아닌 남(자식)에게서 더 나를 의식하며 나보다 더 나인 남, ‘행복한 긴장’을 그 어머니에게서 보았고 역시 ‘행복한 긴장’을 나에게서도 느낍니다.

 

 

행복한 긴장

 

이것은 소망하며 꿈을 꿀 때만 느끼는 감정입니다. 흥분하면서도 기쁜 감정입니다. 불확실하기에 두렵지만 품고 있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이 꿈은 긴장함으로써 실현 쪽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행복한 긴장’은 미래를 향한 행동이기에 현재에 느끼는 전율입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은 꿈과 같아서 언제나 긴장하면서도 행복합니다. 자식은 이렇게 부모를 행복하게 긴장시킵니다.

 

‘우리는 확신 없이 살아야할지라도 망설이며 주저할 수만은 없다. 철학적으로 산다는 말은 불확실함을 기쁨으로 바꾸는 원천임을 의미한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의 말에 의하면, 모든 부모는 철학자입니다. 철학자 중에서도 더 철학자입니다. 자식의 미래는 비록 불분명하고 불확실하지만 늘 기쁨으로 소망하는 이들이 바로 우리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하면, 자식을 가진 부모는 꿈꾸는 철학자이며, 자식을 가질 예비 부모 역시 꿈꾸는 철학자여야 할 것입니다. 자식으로 꿈꾸지 않는 부모는 한 명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또 꿈꾸는 부모는 아이도 꿈꾸게 합니다.
한 아이의 엄마이자 유치원 선생이기도 한 나는, 딸이 수능을 보던 날 수험장 교문 밖에서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던 어머니입니다. 한 아이의 어머니지만 또 여러 아이들의 선생이기도 한 나는 딸이 시험을 보고 있는 동안 교문 밖에 내내 서서 또 다른 시험을 치룹니다.

 

다시 시작하는 부모라면?
다시 시작하는 선생이라면?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삶이라면?

 

이젠, 가족입니다.
가족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가족사랑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잃고 나면 절대 되찾을 수 없는 게 가족일 테니까요.

 

지금, 딸과 함께, 제자들과 함께 그 답을 적어내는 시험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자면?
질문에 대한 답은 그것이 정답이든 오답이든 ‘답(答)’, 답변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즉 반응이 있어야 한다는 거지요. 침묵으로는 어떤 대화도 이뤄질 수 없고, 침묵으로는 어떤 변화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은 권력을 쥔 자 또는 그를 부추기거나 그에게 부역하는 학자(지식인)들이 저항을 막고 끝까지 권력을 자기만 쥐고자 하려는 통치차원에서 만들어진 조작어에 불과합니다. 권력의 최고부역자인 공자 같은 이들이나 하는 말이지요. 침묵은 절대 금일 수 없습니다. 그저 돌, 소통을 불가하게 하는 바위와 다르지 않습니다. 바위와 대화를 하려면 침묵만이 가능하겠지요. 침묵을 깨야만 대화와 그리고 변화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침묵하는 가정이 늘어만 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침묵이 하나의 대화형식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침묵은 거부·거절, 부정을 훨씬 뛰어넘는 무관심이며 무시이며 모멸이 될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 이러해서야 되겠는지요.

 

침묵하는 가정, 침묵으로 단절된 사회에서 감히 침묵을 깨야한다고 제안합니다. 생각이 같든 다르든 침묵을 깨지 않으면 어떤 소통도 없습니다. 침묵은 흐르지 못하게 하는 정체이며 끝내 움직이지 않아 썩게 만들고 맙니다. 침묵을 깨는 일은 입부터 여는 것입니다. 말을 하자는 것입니다.
침묵은 알고자 함에 있어 우선 타인이해를 말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정의 침묵은 어디서부터 시작되고 있을까요?

 

침묵은 대화의 균형이 깨질 때 일어나는 일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래요. 엄마의 말이 많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빠가 말을 줄였는지도 모릅니다. 엄마가 말을 줄이면 아빠도 말을 더 하게 될 것 같지 않은지요.

 

‘침묵하는 가정을 깨라’ 함은, 엄마의 말수를 줄이고 아빠가 좀 더 말을 해야 한다는 것으로도 들립니다.
어느 아빠든 자식들에게 이런 말을 자주 하고 싶지 않을까요.

 

‘아빠는 너를 사랑해.’
아이들은 이렇게 듣겠지요.

 

‘아빠는 나를 사랑하는구나.’
어느 여자꼬마 아이의 웃옷에 적힌 문구를 그대로 옮겨봅니다.

 

Papa ♡ Me

 

아이의 마음으로만 듣게 할 말은 아닌 듯합니다. 귀로 더 듣고 싶은 게 아이들의 소망일 겁니다. 새겨듣기보다는 직접 들어야 감흥이 더 클 아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알고자 하는 진정한 사랑에의 열망을 철학이라고 한다. 사랑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철학자의 몫이며, 철학자라는 말은 지혜를 사랑하는 뜻이기도 하다.’(플라톤)

 

플라톤의 말에 의한다면, 자식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부모 역시 모두 철학자이며 따라서 부모는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모가 지혜를 사랑할 때 진정한 자식사랑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말로도 들립니다. 또 한 번 티나 실리그가 쓴 글의 한 부분을 새겨봅니다.

 

‘... 진정 멋진 일들이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 내게 말해줬더라면?’

 

불행을 막는 일은 행복을 뒤로 미루지 않는 데에 있습니다. 지금 당장.
미룰 수 없는 것, 무엇일까요? 가족입니다. 그리고 사랑입니다.
말이 아닌 행동이어야 합니다.
이제 말로만이 아닌 행동하는 사랑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행동으로 옮겨져야 하는 사랑 말입니다.
‘Papa ♡ Me.’
‘아빠는 나를 사랑해.’
행동으로 옮겨져야 하는 사랑은,
아빠의 마음을 가슴만이 아닌 귀로 먼저 들려줘야 하는 일입니다.
가슴에 담고만 있으면 아이들은 오히려 오해를 합니다.
지금,
내게 진정 멋진 일이란,
바로 사랑의 행동입니다. 

 

☞오동명은? =서울 출생.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사진에 천착, 20년 가까이 광고회사인 제일기획을 거쳐 국민일보·중앙일보에서 사진기자 생활을 했다. 1998년 한국기자상과 99년 민주시민언론상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사진으로 세상읽기』,『당신 기자 맞아?』, 『신문소 습격사건』, 『자전거에 텐트 싣고 규슈 한 바퀴』,『부모로 산다는 것』,『아빠는 언제나 네 편이야』,『울지 마라, 이것도 내 인생이다』와 소설 『바늘구멍 사진기』, 『설마 침팬지보다 못 찍을까』 등을 냈다. 3년여 제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을 주제로 카메라와 펜, 또는 붓을 들었다. 한라산학교에서 ‘옛날감성 흑백사진’을, 제주대 언론홍보학과에서 신문학 원론을 강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지리산 주변에 보금자리를 마련, 세상의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고 있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