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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작업을 맡았다. 그가 번역.정리한 내용으로 <중국, 중국인> 새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기원전 3500년경에 시작된 용봉(龍鳳)문화는 중국문화 중 오래되고 특이한 문화 현상으로 자리 잡았다. 제가(齊家)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항아리 도기에 용의 형상이 조각돼 있었다. 어느 시기부터 용과 봉황의 토템을 숭배하기 시작했고 원시인들이 자신의 몸에 용봉을 그려 넣었는가가 관심사가 되었다.

 

문신은 인체에 예리한 도구로 도안의 윤곽을 만들고 안료를 뿌려 색소를 피부 내에 스며들게 하여 오래도록 무늬를 남기는 것이다. 문신에 사용된 안료는 흑색이 위주였다. 입묵하기 때문에 문신이라는 말 이외에 먹물뜨기하다 뜻을 가진 ‘자청(刺靑)’이라 하기도 한다.

 

고대인들은 왜 몸에 도안을 새겼을까? 도대체 오래된 이런 습속에는 어떤 의미가 내포돼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각양각색의 해석을 내놓고 있다.  문신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현대 여러 국가와 지역에서 젊은이들 사이에 문신이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문신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문화적 습속 중의 하나다. 중국에는 문신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 춘추시대에 쓰인 『예기禮記』에 보인다. 당시 중국 동부의 오랑캐인 이(夷), 남쪽의 오랑캐인 만(蠻) 등의 민족은 생식하고 머리를 풀어 헤치며 몸에는 문신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로써 서주시기부터 중국의 동이나 남만 등 고대 민족들은 문신 습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서기전 12세기경 주공단(周公旦)의 두 아들이 형만(荊蠻)의 풍속을 따라 머리를 깎고 전신에 회색 칠을 하는 문신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모든 민족, 모든 지역의 문신이 똑 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지역, 민족마다 문신의 도안이 차이가 있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용과 뱀’, ‘조익’, ‘수목’, ‘화초’ 등 도안이 주를 이루었다. 문신하는 부위도 달랐다. 얼굴, 가슴, 등, 다리, 배 등 신체 모든 부위에 문신을 했다.

 

문신의 기원에 대해서 가장 보편적인 것은 토템 숭배에서 비롯됐다는 설이다. 고대인들은 자기의 씨족이 어떤 동물이나 식물, 혹은 무생물과 친족 관계에 있거나 다른 특수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선조나 수호신으로 여겼다. 이런 자기 씨족의 대표물의 도안이 씨족이 숭배하는 토템으로 변한 것이다. 고대인들은 토템을 몸에 새기고 맹목적으로 숭배하면서 신령의 보호를 구하였다. 이것이 원시 종교의식이었다. 

이런 토템 숭배설을 뒷받침하는 좋은 예가 대만 소수민족의 문신습속과 그 기원에 대한 신화 전설이다. 파이완(Paiwan)족의 어떤 촌락의 전설에 따르면 그들 씨족의 선조는 뱀이 낳았다거나 태양의 알에서 부화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은 뱀과 태양을 그들 씨족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고 자연계의 뱀과 태양도 그들의 토템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이 문신을 할 때도 대부분 뱀 문양이나 태양 문양을 한다. 그러한 목적은 그들이 숭배하는 토템의 영혼이 자신의 몸에 들어오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자신의 몸에 들어온 숭배의 토템이 자신을 보호한다고 믿는다.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빌면서 파이완족이 문신을 할 때에는 또 성대한 의식을 치른다.

또 다른 설은 문신을 자신의 신체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생겨났다고 것이다. 한 일본 학자는 대만의 소수민족들이 자신의 몸을 더욱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문신을 한다는 실례를 들고 있다. 아타얄(Atayal)족의 문신의 기원에 대한 신화전설 중에 아름다움을 위해 문신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아주 오래 전에 한 남자가 여자에게 말했다. “당신의 용모는 추하다. 만약 얼굴에 꽃무늬를 새기면 분명 예쁠 것이다.” 여자는 자신의 얼굴에 꽃무늬를 새기겠다고 동의를 하자, 남자는 검은 연기로 여자의 옷 위에 꽃무늬를 그려주고 그녀에게 문신하는 방법을 알려 줬다. 이렇게 문신이 아름답다는 관념이 아타얄족 사람들에게 생겨났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이 있다. 옛날 두 명의 남자가 자신들이 잘라온 적의 머리에 문신이 있었는데 오래되도록 퇴색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보기가 좋았다. 이에 그들은 그 모양을 본떠 자신들의 얼굴에 꽃무늬를 새기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남자들이 꽃무늬를 새기는 습속이 되었다고 한다. 원래 아타얄족은 털을 뽑는 습속이 있었다. 문신을 한 몸에는 털이 자라지 않고 주름도 생기지 않아 청춘의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그들의 습속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이에 아타얄족은 얼굴에 문신하는 것을 가장 중요시하게 되었고 문신을 화려하고 정교하게 하는 풍속이 후대에 와서 아름다움의 장식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의 기록에 보면 당(唐)대에 문신이 무척 성행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전문적인 직업이 등장했고 시장에는 문신 전문 도구를 팔기도 했다. 심지어 문신 도장도 있었는데 그 형태가 가지각색이어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대 이후에도 꾸준히 성행했는데 문신은 중국 고대의 문화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다.

탕현조(湯顯祖)는 『여녀가黎女歌』라는 시에서 원대 해남도의 여(리:黎)족 부녀자들 사이에 성행했던 문신에 대해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중 여족 부녀자들의 얼굴에 문신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술했다. 그 시에 따르면 부유한 여족 여인이 열세네 살이 되면 계례(笄禮:여자의 성년식)를 치르는데 집안에서 주석을 차리고 친족들을 초청하여 성대하게 거행했다고 한다. 그중 하나가 얼굴에 문신을 하는 것으로 모든 의식이 복잡하고 융성하게 진행됐다고 한다.

대만 고산족에서 얼굴 문식에 대한 전설을 보면 문신이 혼인을 위한 의식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랜 옛날 커다란 바위가 오누이로 변했다고 한다. 오누이라서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신을 속여 오누이가 결혼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얼굴에 문신을 하게 됐다고 한다. 해남도의 여족에게도 비슷한 전설이 남아있다. 이렇게 보면 문신 풍속의 기원은 혼인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 여족에게 있어 문신은 성인 의식의 중요한 일부였음도 알 수 있다. 문신을 함으로써 청소년에서 성년이 되는 것이고 문신이야 말로 성인의 표식이며 그때서야 비로소 혼인 상대를 찾는 자격이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문신의 규칙은 여러 방면이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리우한(劉咸)교수가 50년대 이전에 해남도에서 조사를 하였는데 여족 부녀자들은 혼인 형태에 따라 문신을 하는 신체부위가 달랐고 문신의 연령이나 도안도 시기에 맞는 규칙이 있어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다고 한다.

또 다른 관점은 문신이 일종의 상징이며 기념이었다는 것이다. 공로가 있는 사람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 보는 것이다. 바로 공헌의 기록설이다. 대만 소수민족의 문신 풍속 중에서 일반적인 규칙에 의하면 문신은 자격이 있어야 한다. 성년 의식을 통과한 사람 중 그 씨족에 공헌을 한 남녀에게 문신을 새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공헌이 많고 적음에 따라 문신하는 부위와 도안이 달랐다고 한다.

 

이렇게 본다면 문신은 공을 기록하기 위한 것으로 현재의 훈장과도 같은 것이라 하겠다. 아타얄족이나 다른 민족의 남자들에게 있어 문신의 자격이나 문신하는 특수 부위와 문양은 모두 사냥, 적의 머릿수 혹은 사냥한 물품과 관련이 있었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이렇듯 문신이 어디에서 기원했냐는 문제에 대해 전문가 마다 다르고 나름대로 설득력을 갖고 있다. 역사적 자료에도 각각의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문신의 기원은 무엇일까 하는 수수께끼는 여전히 연구하고 해답을 구해야 하는 대상으로 남아있다. <중국, 중국인 8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국립 중국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종문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는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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