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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작업을 맡았다. 그가 번역.정리한 내용으로 <중국, 중국인> 새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요(堯), 사람됨이 어질고 덕이 있었으며 부귀하였으나 교만하지 않았고 구족을 친목하게 하여 만세에 화합케 했다. 졸하자 천하는 3년 동안 음악을 켜지 않았다.

순(舜), 이름은 중화(重華). 품행이 고결하고 요를 이어 제위에 오른 후 덕을 행했으며 간사한 자들을 멀리했고 오랑캐들이 모두 복종했다. 39년 재위하였고 창오(蒼梧)에서 졸했다.

 

중국학자들의 표현을 그대로 옮기면 ‘옛날 역사 전설 속에서 황제 이후 요(堯), 순(舜), 우(禹)는 원시사회에서 계급사회로 넘어가는 군사민주제 단계’라 한다. 부락연맹의 수령인 요, 순, 우의 ‘선양(禪讓)’은 바로 군사민주제 시기에 부락연맹의 수령을 민주적인 선거로 뽑은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염제(炎帝)부락의 공공씨(共工氏)가 황제 부락과 연맹을 맺어 치우(蚩尤)부락과 전쟁을 벌여 치우 씨를 멸망케 하였고 황제 부락은 또 염제 부락을 패퇴시켜 점차 이인(夷人)부락과 강인(羌人)과 연합하여 새로운 연맹을 결성했다고 한다. 황제를 시조로 받드는 부락 이외에 전욱(顓頊), 제곡(帝嚳), 사악(四岳), 백익(伯益), 고부(皋附) 등 부락이 모두 부락연맹에 참가했다. 부락연맹은 연맹에 참가한 각 씨족부락 수령으로 구성된 연맹의사회였다. 연맹의 수령은 의사회에서 선거로 뽑혔다.

 

이런 연맹의사회가 수령을 추거하는 제도가 고대 전설 중의 ‘선양禪讓’제도라 본다. 전설 중의 당요(唐堯), 우순(虞舜), 하우(夏禹) 부락연맹 수령의 교체는 바로 선양의 결과라는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요는 도당씨(陶唐氏) 부락 수령으로 황제의 직계 후손이라 한다. 원래 익방(翼方:현 하북 당현[唐縣] 일대)에 거주하다 나중에 진양(晋陽:현 산서 태원[太原])으로 이주한 후 씨족 부락의 선거로 염황 부락연맹의 수령이 되었다. 요가 늙자 연맹의사회는 순을 승계자로 선출하였다. 순은 우씨(虞氏)부락의 수령으로 주로 우(虞:현 하남 우성북[虞城北]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요는 순에게 양위하기 전 3년 동안 심사를 거쳐 요가 죽자 순이 연맹 수령을 계승하였다.

 

순이 늙자 연맹이사회에서는 또 계승자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사(似) 성 하후씨(夏后氏) 부락 수령인 우는 풍찬노숙하며 10여 년 동안 치수 끝에 민심을 얻어 부락연맹 수령으로 추거되었다. 우가 직위한 후 고도(皐陶)를 계승인으로 삼았으나 고도가 일찍 죽어 백익(伯翼)을 계승인으로 삼았다. 이렇듯 요, 순, 우는 모두 현인을 추천하는 ‘선양’ 방식으로 선출된 부락연맹의 수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맹의 수령은 의사회 선거에 의해 뽑혔기에 이사회가 모든 책임을 가지고 있었고 의사회의 결정에 복종해야 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연맹회의에서 홍수를 다스릴 사람을 선출하게 됐는데 사람들은 곤(鯀:禹의 아버지)을 추천하였으나 요는 반대하였다. 하지만 부락 수령들이 곤을 끝까지 추천하자 요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전설은 부락연맹 의사회가 공동으로 협의하였고 민주적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전설은 고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이 될 수는 없다. 상고시대 낭만적 색채를 담고 있는 ‘선양제’는 정말 존재했었을까? 이것은 후대 사람들에게 해결하기 힘든 문제로 남겨두게 되었다. 

 

 

 

선양은 『상서尙書』에 최초로 기록돼 있다. 「요전堯典」에 ‘요순선양(堯舜禪讓)’이란 말이 보이고 「대우모大禹謨」에 ‘순우선양(舜禹禪讓)’이란 기록이 있다. 이외에 『논어論語』『맹자孟子』에도 ‘요순선양(堯舜禪讓)’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러나 『논어』의 요가 순에게 선양했다는 말은 대다수 학자들이 후대 사람들이 붙인 것으로 공자의 말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맹자』에서 말한 ‘선양’도 애매한 부분이 많다.
맹자는 정식적으로 요순 양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 일단은 다음과 같다.

 

만장이 맹자에게 물었다. “요임금이 천하를 순에게 주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맹자가 대답했다. “아니다. 천자가 천하를 남에게 주지는 못한다.” 만장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순이 천하를 차지한 것은, 누가 준 것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하늘이 준 것이다.” ……“천자는 어떠한 사람을 하늘에 천거할 수 있으나, 하늘이 그에게 천하를 주도록 할 수는 없다.” …… “옛날에 요가 순을 하늘에 천거하였더니 하늘이 그를 받아들인 후에 그를 백성에게 내놓았는데 백성이 그를 받아들였다.” 「만장상편萬章上篇」

 

하늘의 뜻과 백성의 뜻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천의(天意)와 민의(民意)를 설파하기 위한 방편으로 쓰였다.

 

『사기史記』의「오제본기五帝本紀」와 「하본기夏本紀」는 『상서』『논어』『맹자』의 말을 종합하여 찬술한 것이다.

 

그러나 실로 ‘선양’이 있었는가 하는 것에 대해 전국시대부터 회의를 품기 시작했다. 최초로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순자(荀子)다. 공자가 요순의 선양을 얘기한 것은 ‘허언(虛言)’이라 단정하고 천박한 말이라 했다.(『순자荀子․정론正論』) 전국시대 말기의 한비(韓非)는 더 나아가 순과 우의 제위 계승은 ‘신하가 임금을 시해’한 결과라 하였다. “순은 요를 핍박하였고 우는 순을 핍박하였으며 탕(湯)은 걸(桀)을 내쫓고 무왕은 주(紂)를 토벌했다. 이 네 왕은 신하가 그 임금을 시해한 것이다.”(『한비자韓非子․설의說疑』)

 

이 한비자의 격한 표현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대 유지기(劉知幾)는 순임금은 우에게 쫓겨나 창오(蒼梧)에서 죽었다고 단정했다. 역사학자 사마정(司馬貞) 등도 순은 요를 평양(平陽)으로 쫓아냈다거나 순이 요를 감옥에 가둬 아무도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연구 결과 『상서』「요전」은 전국시대에 지어졌고 「대우모」는 진나라 사람의 위작임이 밝혀졌다. 즉 『상서』속 요순선양의 기록은 근본적으로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역사상 선양제도가 없었는데 어디에서 선양의 전설이 시작된 것일까? 근대 학자 중 일부는 ‘요순선양’의 설은 전국시대 초기 묵가(墨家)가 창조한 것이라 보았다. 왜냐하면 『상서』와 『논어』를 제외하면 『묵자墨子․상현尙賢』에 ‘선양’의 기록이 최초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일단은 다음과 같다.

 

옛날 요임금이 순임금을 복택이라는 고장의 북쪽에서 등용하여 그에게 정사를 맡기니 천하가 태평스러웠다. 우임금은 백익(伯益)을 음방이라는 고장에서 등용하여 정사를 맡기니 아홉 주가 다스려 졌다. 탕임금은 이윤을 부엌에서 찾아내어 정사를 맡기니 그의 계책이 이루어졌다. 문왕은 굉요(閎夭)와 태전(泰顚)을 고기잡이 어부나 사냥꾼 중에서 찾아 등용하여 정사를 맡기니 서쪽의 여러 나라들이 복종케 되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옛날에는 비록 높은 녹과 귀한 지위에 있는 신하라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고, 농업이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백성이라 할지라도 서로 다투어 면려하고 덕을 숭상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 말은 묵자는 서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자신의 논리를 세우기 위해 ‘선양’이라는 미덕을 ‘상현(尙賢)’의 방편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듯 묵가는 그저 ‘요순선양’을 한 예로 제기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순우(舜禹) 선양’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근대 학자들은 유가에서 창조한 것이라 본다. 바로 맹자가 묵가의 ‘요순선양’설을 이어받아 ‘순우선양’의 이야기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유가는 어느 정도 ‘거현(擧賢)’을 찬성하였기 때문에 제후였던 우의 출신을 일반인으로 만든 것이라 본다. 전국시대 이후 묵가는 쇠락했고 ‘선양’설은 유가의 전유물이 되었다. 이러한 관점 또한 선양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학자들은 사회발전사적 고증한바 선양이란 제도는 역사적으로 분명 존재했을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로 부락 선거 방식이 그것이라 보는 것이다. 중국 역사기록이 보이는 오항(烏恒)이라는 민족은 한나라 때 수천이 넘는 부락이 연합하여 ‘대인(大人)’을 선출하는데 용감하고 건장한 사람은 침략자를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선출된 대인의 뜻을 위반할 수 없었다. 이 ‘대인’이 중국인들이 말하는 제왕이라 보는 것이다.

 

이외에도 거란, 몽골 등 민족도 이런 예가 있다고 한다. 한족의 상고시대에도 예외는 없을 것이라 추론하는 것이다. ‘선양’이라는 것은 역사 발전 단계의 일반적인 선출 방식이었는데 후인들이 아주 성스러우면서 숭고한 고차원적 방법으로 높인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 관점도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있다.

어쩌면 2000여년을 내려온 ‘선양’설을 완전히 부정한다는 것은 전통을 중시하는 중국인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이다. 그저 인류 발전 과정에 있어 어느 시기에 행해졌던 미덕의 하나로 남겨두는 것은 어떨까. <중국, 중국인 11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국립 중국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종문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는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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