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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작업을 맡았다. 그가 번역.정리한 내용으로 <중국, 중국인> 새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치우(蚩尤), 황제(黃帝)시기의 제후의 하나. 전설에 따르면 치우는 횡포하여 황제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반란을 일으켜 판천(阪泉)의 들에서 황제와 교전을 벌여 패망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중원의 탁록(涿鹿)에서 하늘땅도 놀라고 귀신도 흐느끼게 하는 목숨을 건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한쪽은 중국 화하(華夏)족의 선조로 추앙받고 있는 황제(黃帝)와 연합부락인 염제(炎帝)이고 다른 한 쪽은 생김새가 괴이하며 출신도 모르고 어디에서 왔는지 알 길이 없는 치우(蚩尤)였다.

 

이 전쟁은 온 천지가 어두컴컴해지고 귀신이 울부짖게 만들었다고 한다. 황제는 먼저 오랑이, 표범, 곰을 선봉으로 삼아 온 천지를 뒤덮을 기세로 진격하고 강을 막아 치우를 익사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치우는 아무 두려움 없이 용감하게 나섰다. 그리고 풍백(風伯), 우사(雨師)를 청하여 광풍을 일으키고 폭우를 내려 황제의 진군을 막았다. 그렇지만 한발(旱魃)이 고함을 지르자 햇빛이 두루 비추면서 먹구름이 걷히고 비가 멈췄다. 현녀(玄女)가 북을 치자 500리가 진천동지하였다. 이에 치우는 혼비백산하여 갈팡질팡했다.

 

치우가 생각을 가다듬고 급히 하늘 그득히 짙은 안개를 부르고 모래와 돌을 마구 날리자 황제의 대군은 방향을 잃고 적아를 구분하지 못해 서로 전투를 치르는 사이 치우는 도망을 쳤다. 치우는 안개가 승리의 열쇠라고 생각하고 재차 전투를 치를 때 안개를 일으켰다. 그러나 황제는 북두칠성이 방향을 가리킨다는 원리를 이용하여 지남차를 만들어 안개 속에서 방향을 찾아냈다. 그리고 치우의 본영을 그대로 쳐들어갔다. 결국 치우를 죽이고 목을 잘랐다.

이때부터 황제는 중원을 통일하였고 화하(華夏)자손이 번영을 누리며 대대손손 이어왔다는 얘기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으로 이긴 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되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치우는 전쟁에서 지고 목숨을 잃은 후에도 업신여김을 당하거나 욕을 먹지 않고 역대 제왕과 백성들이 ‘전쟁의 신’으로 존중받고 추앙받고 있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치우는 도대체 무엇인가? 사람인가 신인가? 아니면 괴물인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어떤 사람들은 대담한 가설을 내세우기도 한다. 치우가 로봇이었다는 것이다. 탁록 대전은 외계인이 참여한 우주전쟁이었다는 것이다. 이는 신비스런 치우의 여러 행태에 비롯된 것으로 한 학자의 가설을 따라가 보자. 단지 재미로 읽고 치우의 신비스러운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으로 끝낼 수 있기를 바란다.

 

옛 기록에 나타난 치우의 외모는 무척 기이하다. 머리는 동으로 돼 있고 쇠 이마에 몸은 사람이요 쇠족이면서 눈은 네 개, 발가락은 여덟 개, 머리에는 뿔이 나 있으며 귀는 비늘창처럼 생겼고 몸에는 날개가 있어 능히 날아다닐 수 있다고 돼 있다. 모래와 돌을 삼킬 수도 있고 사람 말을 할 줄 아는 괴물이다. 그렇다면 그의 골격과 외모는 금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머리에 나 있는 뿔은 안테나? 네 개의 눈에서는 광선이 나오고. 발가락이 여덟 개라는 것은 운행 장치일 거고. 모래와 돌을 먹는 다는 것은 채집한 광선을 녹이는 것? 날개가 있다면 당연히 자유자재로 날기도 하고 착륙도 되고. 이렇게 보면 로봇일 가능성도 있다 하겠다.

『세본世本․작편作篇』에 치우는 오병(五兵 : 戈[과], 矛[모], 戟[극], 酋矛[추모], 夷矛[이모])을 만들었다고 했다. 『관자管子․지수편地數篇』에는 갈로(葛盧)산에서 나오는 금속을 이용하여 검, 창, 갑옷을 만들었고 옹호(雍狐)산에서 나오는 금속으로 창들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근대 고고학자들은 자료나 실물에서 충분한 증거를 찾지 못해 궁금증을 배가시키고 있다.

고증에 따르며 많은 고대 문화 유적 중에서 앞서 말한 두 장소는 청동의 제련과 관련이 있다. 치우와 대체적으로 비슷한 시기인 산동 룽산문화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을 보면 청동 잔류물과 공작석과 같은 청동 제련 원료는 있지만 청동 병기는 발견하지 못했다. 하남 이리두(二里頭) 유적지에서는 청동기가 발굴되기는 했지만 탄소 측정결과 하대의 것으로 치우와는 천년의 차이가 난다. 치우가 병기를 대량으로 만들었고 대규모의 실전에 활용했다는 것은 당시 인류에게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황제의 쪽도 병사들이 많았지만 인간의 육체를 가지고 있었고 나무 몽둥이나 돌을 이용한 것으로 단단하면서 반짝거리는 칼과 창을 가진 치우와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었다. 황제는 이기기 위해 외부의 도움을 받았다는데 혹시 ‘UFO’? ‘현녀’는 사람 몸에 새 머리를 하고 있고 ‘응룡(應龍)’은 날개 달린 용이다. 그렇다면 우주비행선이 아닐까. 그들이 내지른 고함이나 북소리는 어쩌면 전파나 음파일 수도 있고. 그래서 치우의 통신 시스템이나 제어기를 방해하거나 파괴하여 치우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치우가 죽은 후 사람들은 산동 수장(壽張)과 거야(巨野)에 그를 위해 2기의 묘를 만들었는데 7장의 높이였다고 한다. 그의 묘에서는 붉은 연기가 나왔다고 한다. 진홍색 면과 닮은. 꼬리에서 나오는 홍염처럼. 사람들은 그것을 ‘치우기[旗]’라 하였다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외계인들이 잔해를 수습하여 실패의 원인을 연구하고 ‘블랙박스’와 같은 물건을 찾았던 것은 아닐까? 『낙사후기絡史後記』는 치우의 죽음에 대해 분해하다는 ‘解(해)’자를 쓰고 있고 『술이기述異記』에서는 탁록 전쟁에서 기주(冀州)사람들이 파낸 치우의 뼈를 ‘청동과 쇠 같았다(如銅鐵)’라고 하였으며 “지금도 치우의 치아가 남았는데 2촌이나 되며 단단하여 부서지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지금’이란 작자가 생존했던 시기(남조 양梁)까지 그 물건이 존재했었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치우의 뼈는 청동이나 쇠와 같은 것으로 뼈처럼 가벼운 고급 합금이었다고 추론할 수 있고 골격은 여러 성능을 지닌 기계장치였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치우가 죽고 몸과 머리를 다른 곳에 묻었다는 것은 분해했다는 말일 수도 있고. 이렇게 본다면 당시 사람들은 치우를 썩어 문드러지는 피와 살을 가진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가지지 않은 어떤 ‘것’으로 봤다는 것이 된다. 이처럼 치우를 강대하고 신비하며 조자연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모두 전해 내려오는 치우의 생존 시기와 당시 전쟁에서 사용했다는 무기들의 묘사에서 비롯된 추측이다. 전설은 사실이 아니다. 유사한 근거는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지만 ‘있었던 사실’이라 할 수는 없다. 워낙 치우가 신비한 인물이며 당시 전쟁을 벌인 민족에 대한 설명 자료가 없기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전해오는 바에 따르면 치우가 죽고 나서 중원은 또 다시 피바람이 분다. 그러자 황제는 자신의 위엄을 드높이지 않고 오히려 많은 치우의 화상을 그리게 하여 곳곳에 붙이자 놀랍게도 ‘만방이 순복[萬方弭服]’하여 천하가 또 태평스럽게 됐다고 한다.

 

위명을 널리 떨친 진시황과 한무제는 제나라 지역을 순시하고는 ‘팔신주(八神主)’에 제사를 지내면서 치우를 제3위에 올려놓았다. 한 고조 유방(劉邦)은 거병할 때 고향에서 황제와 치우에게 제를 지냈고 승리한 후에는 황제는 푸대접했고 치우의 사당을 수도 장안으로 옮겼다. 송 태종 조광의(趙光義)는 하동을 정벌할 때 출병하기 전 치우에게 큰 제를 올렸다.

민간에는 창장 남북 곳곳에 치우 사당과 묘가 남아있다. 치우의 후손은 천하에 골고루 펴져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치우가 죽은 후 버려진 족쇄와 수갑은 단풍나무로 변했는데 묘족(苗族)들은 자기의 조상인 ‘부우(剖尤)’ ‘우공공(尤公公)’ ‘풍신(楓神)’에게 제를 지내는데 이것이 바로 치우를 기념하는 것이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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