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4월을 맞는다. 무섭고 시렸고 한스러웠던 통한의 역사다. 목소리는 커녕 숨소리조차 낼 수 없었던 4·3은 지금으로부터 27년여 전 제주의 한 언론사 취재진들의 용기로 세상 밖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잔인무도였고 통곡이었다. 그 시절부터 20여년에 걸쳐 이뤄진 4·3 진상규명의 역사에 중심부에 있었던 양조훈 전 제주도 부지사의 육필 비사를 연재한다. / 편집자 주 |
4‧3 발발 초기인 1948년 5월1일 민가 10여 채가 불타면서 시작된 이른바 ‘오라리 방화사건’. 하지만 그날의 피해규모는 미미한 것이었다. 4‧3의 진행과정을 볼 때, 큰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주목 받는 사건이 된 것은 그 속에 숨겨진 비밀 때문이다.
의문투성이 미군 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
4‧3취재반이 오라리 방화사건에 일찍부터 관심을 가졌던 것은 무성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May Day in Korea : Cheju-do)’ 때문이었다.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 보관된 이 영화는 미군이 촬영한 유일한 4‧3 기록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의 주 무대가 바로 불타는 오라리였다.
이 영화의 존재가 처음 알려진 것은 존 메릴의 논문에서다. 불타는 마을에서 피어오르는 포연의 모습과 함께 비행기 한 대가 섬의 상공을 선회하는 장면에서 영화가 시작된다고 기술한 존 메릴 논문은 당혹스런 표정의 여인이 경찰에게 자기 마을이 어떻게 게릴라들로부터 습격 받았는지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고 덧붙였다. 이어 남녀 시신들이 비춰지고 다시 불타는 마을이 나오는데, 그게 오라리 마을이란 것이다.
그 영화 필름을 나중에 입수해서 자세히 살펴봤더니, 미군 촬영반은 사전에 상당히 ‘준비된 장면’을 촬영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불타는 오라리를 공중에서 촬영했을 뿐만 아니라 토벌대의 진격 광경을 지상에서 동시에 촬영했기 때문이다. 곳곳에 의도적인 연출을 했다는 장면도 엿보였다. 미군 촬영반이 ‘우발적인 사건’을 그냥 촬영했다고 볼 수는 없었다.
4‧3취재반이 더욱 주목하게 된 것은 그 사건의 발발 시점이 ‘4‧28 평화협상’ 직후라는 점, 그리고 방화범들의 정체가 모호하다는 점이었다. 미군 기록이나 신문기사, 나중에 편찬된 『제주도지』 등에는 모두 ‘폭도들의 행위’로 기록되어 있었다.
즉, 주한 미육군사령부 정보참모부 보고서(1948년 5월 3일자)는 「제주도 폭동/ 오라리 방화」란 제목 아래 “오라리가 5월 1일 낮 12시 30분부터 3시간동안 폭도 50명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경찰이 도착하여 폭도들을 마을에서 축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출처는 ‘경찰 보고’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더하여 [동아일보] 특파원이 쓴 <제주도폭동 현지답사>라는 르포 기사에서도 오라리 사건을 미군 보고서와 비슷하게 다루고 있었다. 1948년 5월 9일자 『동아일보』에 보도된 르포기사는 ‘5월 1일 메이데이에도 농민 참살의 비극’ ‘불바다로 화한 오라리 부락’이란 소제목 아래 오라리에서 3시간의 교전이 있었고, 방화나 학살은 ‘폭도들이 한 행위’로 묘사되고 있었다.
1982년 발간된 『제주도지』에도 ‘오라리 전투’란 표제 아래 “5월 1일 제주읍 오라리에서 경찰 토벌대와 폭도 주력부대가 싸움이 붙어 사건 후 처음으로 경찰이 이들의 주력부대를 격퇴했다…마을은 순식간에 격전장으로 변해서 3시간에의 격전이 계속되었다. 이날의 격전에서 마을 민가 상당 채가 불타고 10여 명의 주민이 희생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런 기록만 본다면, 영락없이 ‘폭도’들이 방화하고, 주민 10여명을 학살한 것처럼 인식할 수밖에 없다. 진실이 밝혀지기 이전에는 그랬다. 그런데 초대 9연대장을 지낸 장창국의 『육사졸업생』에는 이와는 달리, 미묘한 표현을 남겼다.
“5월 1일, 소위 메이데이(노동절) 날 상오 11시 귀순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제주읍 외곽 오라리 마을에 날벼락이 났다. 정체불명의 청년 일당이 부락을 기습‧방화한 것이다. 다수의 사망자도 났다. 경찰은 하산‧귀순한 자를 배신자라고 간주하는 폭도들의 보복행위라 했고, 반도들은 경찰이 서청을 시켜서 한 행위라고 주장했다.”
방화 행위자는 누구인가?
4‧3취재반이 이런 자료들을 입수해서 분석하면서 방화범의 정체가 도대체 누구냐고 궁금하던 차에, 1989년 6월 9연대 정보주임 출신 이윤락 중위로부터 중요한 정보를 듣게 된 것이다. 김익렬 연대장을 수행해서 무장대 측 총책 김달삼과의 협상자리에 참석했던 그는 “평화협상을 깨기 위한 경찰의 지원 아래 우익청년단이 방화했다”는 놀라운 증언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사건의 진위를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물증’을 현장에서 찾기로 했다. 그래서 4‧3취재반 기자들을 대거 투입하여 오라리 마을을 샅샅이 누비기 시작했다.
4‧3취재반은 다행히 오라리 방화사건 그 현장에 있었던 목격자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주민 30여 명을 만나 증언을 채록하다보니 기존의 기록들과는 다른 사건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그 중에도 오라리 주민 고시성‧고난향‧고매향‧고덕진‧이규술‧허두구‧박내수‧진창순‧임갑생‧김창주‧박기찬 등이 의미 있는 증언을 해주었다. 취재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오라리에서는 4‧3 발발 이후 무장대와 토벌대에 의해 여러 차례 인명 피해가 있었다. 4월 30일 대동청년단(대청) 단원 부인 2명이 무장대에 의해 ‘민오름’으로 납치됐는데, 그 중 한 명이 탈출하는 와중에 다른 한 명(강공부 여인)은 피살됐다.
둘째, 그 다음날인 5월 1일 강공부 여인 장례식이 있었는데, 그 직후에 경찰의 지원을 받은 서청‧대청 등 우익청년단체원들이 일부 주민의 집들을 좌익활동을 했다고 지목하면서 그들의 가옥에 불을 질렀다. 즉 강병일-허두경-박태형-강윤희-박전형 집을 차례로 방화한 것이다.
셋째, 마을이 불에 타자 20명 가량의 무장대가 우익청년들을 추격했고, 그 과정에서 경찰관 가족 1명(김규찬 순경의 어머니)이 피살됐다.
넷째, 그 이후 경찰기동대가 출동해서 마을 입구에서 총기를 난사하는 바람에 주민 1명(고무생 여인)이 피살됐으나, 쌍방 간의 전투는 없었다.
그러면서 마을 주민들은 당시 방화를 한 대청 단원이 제주시내에 살고 있다고 증언했다. 4‧3취재반은 사건의 실체를 정확히 알기 위해서는 마을 주민들이 방화범으로 지목한 대청 단원의 진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그와의 접촉을 시도했다.
방화범 “박진경 연대장이 풀어줬다”
오라리 마을 주민들이 방화범으로 지목한 대동청년단 단원 박 아무개는 제주시 이도2동에 살고 있었다. 칠십대 초반의 건장한 체구를 갖고 있었다. 그는 4‧3취재반과의 첫 만남에서 1948년 5월 1일 강공부 여인의 시신을 경찰 트럭에 싣고 오라리 인근 장지에 갔던 일, 그 트럭에는 경찰관과 서청‧대청 단원 등 30여 명이 동승한 사실, 장례가 끝난 후 경찰트럭에 경찰관만 타고 철수하고 서청‧대청 단원들이 현지에 남게 된 일 등은 시인했다. 그러나 방화 사실만은 부인했다.
그러나 두 번째 만남에서 취재반이 반증자료를 제시하고 목격자들이 대질 증언이라도 하겠다는 말을 전하자 그때야 비로소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하면 그렇게 했다고 합시다.”는 표현으로 방화 사실을 시인했다.
방화 이후의 그의 행적이 더욱 놀라웠다. 그는 방화사건 다음날인 5월 2일 제주읍내에서 9연대 조사반에 의해 연행되어 모슬포 연대본부 영창에 감금되었다. 오라리 현장을 직접 조사한 김익렬 연대장의 특별지시로 검거된 것이다. 그의 죄목은 ‘방화’ 혐의였다.
그것은 이윤락 중위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미군 CIC 장교가 연대장과 자신의 조사 결과를 묵살하고, 오라리 사건은 폭도들의 행위라고 다그쳐도 자신들은 포기하지 않고 오라리사건의 방증 자료조사에 더욱 힘썼다는 것이다. 그리고 방화범을 찾아내 군 영창에 가두었다고 증언했었다.
그런데 방화범은 딘 장군에 의해 김익렬 중령이 5월 6일 전격 해임된 후 김 중령의 후임으로 9연대장에 부임한 박진경 중령의 손에 의해 풀려났다. 군 영창에서 22일간 구금생활을 하던 어느 날 밤 박진경 중령이 직접 찾아와 몇 마디 질문을 한 뒤 자신을 석방시켰다는 것이 그가 취재반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구금기간 동안 대청 본부 등에서 구명운동을 벌였다는 사실도 그의 입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 어이없는 일은 그가 경찰관으로 변신한 것이다. 그는 방화사건이 일어난 지 4개월 뒤인 1948년 9월 15일 제주경찰학교 제9기생으로 입교한 뒤 경찰제복을 입게 된다. 오라리 방화사건 방화범이 4‧3의 소용돌이 한복판에서 경찰관의 신분으로 바꾸어서 맹렬한 토벌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오라리사건 취재는 경찰뿐만 아니라 미군정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기록영화 ‘제주도 메이데이’도 사전에 준비된 각본에 의해 촬영된 것이고, 마치 무장대가 오라리를 방화한 것처럼 조작 편집함으로써 평화협상 파기와 강경진압 작전을 위한 선전용으로 활용한 것이라고 분석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나는 4‧3취재반장을 맡을 초기만 해도 4‧3과 미군은 상당히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체험자들을 상대로 증언 채록을 할 때 빼놓지 않고 던진 질문은 “미군을 본 적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때마다 촌로들은 “미군과 4‧3사태가 무슨 관계가 있느냐?”고 오히려 퉁명스럽게 반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4‧3의 취재범위가 넓고 깊어지면서 미군의 실체가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중요한 고비마다 그들이 개입하지 않은 사건이 없을 정도로 깊숙이 관계돼 있음을 인식하게 됐다. 그것은 마치 고구마 덩굴 같은 것이었다.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그 속에 미군이 도사리고 있었다.
「김익렬 유고」, 6시간 설득 끝에 입수
나는 4‧28 평화협상과 오라리 방화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1988년 작고한 제9연대장 출신 김익렬 장군이 4‧3 유고록을 남겼다는 정보를 듣게 됐다. 즉각 유족들과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1989년 8월 초순께 김익렬 장군의 가족들을 만나러 상경했다.
김 장군의 집은 서울 중구 필동 골목길에 자리한 허름한 2층 집이었다. 서울 주재기자 부영주(정경부 차장)와 함께 김 장군의 집을 방문했을 때 장군의 부인(최재선)과 아들.딸, 그리고 사위가 기다리고 있었다. 김 장군의 부인은 첫 아들을 모슬포에서 낳았다면서 제주에서의 생활상을 떠올렸다.
“아이가 설사 나고, 산모인 내가 힘들어하자 사병들이 쌀을 조금 가져 왔어요. 영감이 그걸 알고 당장 돌려보내라고 호통을 치더군요.”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낸 김익렬 장군은 1969년 국방대학원장(중장)을 끝으로 군복을 벗었다. 1970년대에 이르러 4‧3 기록들이 왜곡되고 미군정과 경찰의 실책과 죄상이 은폐되는데 공분을 느껴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9연대장으로 재직할 당시의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증인을 자처한 것이다.
김 장군은 이 회고록 때문에 아픔과 시련을 겪었다. 첫 번째는 1970년대 중반 중량감 있는 제주출신 국회의원에게 회고록의 존재를 알려 발표하려 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두 번째는 제주지역 주간지인 『제남신문』에 연재하려 했으나 이마저 수포로 돌아갔다. 당시 강천종 기자가 직접 김 장군의 유고록을 입수, 발표하려 했지만 공안당국의 제동으로 무산된 것이다.
이어 초대 9연대장을 지낸 선배 장창국 장군(합참의장‧육군 대장 예편)이 1980년대 초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1984년 [육사졸업생]으로 출간됨)를 연재할 때, 김 장군의 회고록 일부가 건네졌는데, 신문에 발표된 4‧3 관련 내용은 김 장군의 회고록과 기존에 나왔던 왜곡 투성이의 자료를 짜깁기한 것이었다.
김 장군은 “김 중령이나 김달삼도 일본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나온 일본군 소위였다.”는 대목에 분노가 폭발했다. 사실도 아닌 내용을 갖고, 김익렬과 김달삼을 얽으려는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이다. 1948년 김달삼과 벌인 ‘4‧28 평화협상’ 때 “연대장이 폭도 두목과 내통했다.”는 등의 루머에 시달렸던 기억이 되살아나 김 장군은 가족들에게 단호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 원고가 가필되지 않은 그대로 세상에 알릴 수 있을 때 역사 앞에 밝히되 그 전에는 발표하지 말라.”
김 장군은 1988년 12월 영면했으니, 그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장군의 원고를 가필하지 않고 원문 그대로 신문에 발표할 테니 믿고 맡겨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장군의 부인은 “아직은 시기상조다. 노태우 장군이 대통령을 맡고 있는데, 이 세상을 어떻게 믿겠느냐?”며 오히려 반문했다. 유족들의 생각은 확고했다. 몇 차례 간곡한 청을 해도 요지부동이었다. 그래서 떼를 쓰기 시작했다. 그때 내가 말했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장군께 욕이 되어도 할 수 없다. 아시다시피 기존의 자료들은 김익렬 연대장의 평화협상에도 의심을 품고 있다. 명예스럽지 못한 자료들이 난무하고 있다. 김 장군의 유고록을 이 시점에서 발표하지 않으면 우리는 기존 자료를 갖고 4‧3 신문 연재물을 쓸 수밖에 없다. 저 세상에 계신 장군께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달라.”
이 말을 들은 장군의 부인 얼굴에서 동요의 빛이 엿보였다. 장군의 집에 간 시간이 오후 3시께였는데, 벌써 오후 6시를 넘기고 있었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언뜻 스쳤다. 염치 불구하고 저녁식사라도 하면서 진지하게 이야기를 하자고 운을 뗐더니 장군의 부인이 국수라도 삶겠다면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사이에 아들과 사위를 설득했다. 사위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원군을 얻은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지리한 협상을 계속했다.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 우리에게 질렸는지 장군 부인의 입에서 “그럼 양 부장을 믿고 원고를 건넬 테니 모든 책임을 져라!”고 다짐받는 게 아닌가? 날아갈 듯이 기뻤다.
장장 6시간의 설득 끝에 입수된 김익렬 장군의 유고는 200자 원고지 346장이었다. 장군이 만년필로 한 자 한 자 직접 쓴 원고를 건네받자 나도 모르게 “하늘이 돕는구나.”는 독백이 흘러나왔다. <8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