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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주(紂)는 수(受) 또는 제신(帝辛)으로도 쓴다. 은(殷)의 마지막 임금이다. 제을(帝乙)의 아들로 이름은 신(辛)이다. 재주와 용력이 남달라 맨손으로 맹수와 싸워 때려 죽였다. 일찍이 동이(東夷)를 평정했는데 이 때문에 국력을 소모했다. 술을 좋아하고 음란했으며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는 데다 형벌이 엄중했다고 한다. 그래서 백성들의 원망이 높아갔다. 구후(九侯)와 악후(鄂侯)를 죽이고 서백(西伯: 주 문왕[周 文王])을 가두자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충간을 올리는 신하 비간(比干) 등을 살해하고 기자(箕子)를 옥에 가두었다. 달기(妲己)의 미모에 빠져 주색을 즐기고 백성들에게 부역을 과중하게 부과하는 등 폭정을 일삼아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재위 33년에 목야(牧野) 전투에서 패하고 주 무왕(武王)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말았다.

 

자연과학에 있어 물질 법칙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인물에 대해 재인식이 필요할 때가 있다. 상(商)의 주(紂)는 중국 고대의 폭군의 전형이라고 정설이 돼 버렸다. 최근에 폭군 주왕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과 드라마가 폭군의 형상을 과장하여 주왕을 고대의 가장 무서운 파시스트가 돼 버렸다. 그러나 역사의 진실이 과연 그러한가? 지금도 역시 단정하기 어렵다.

 

『사기․은본기』에 주왕을 형벌을 중히 하였고 포락(炮烙)의 법이 있었으며 구후(九侯)의 딸이 뜻에 따르지 않자 죽여 버렸고 악후(鄂侯)의 시신에 포를 떴으며 비간(比干)의 배를 갈라 심장을 꺼냈다는 등 읽어 내려가면 등골이 오싹하게 만드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부터 역대 사가들은 폭군을 말할 때면 하(夏)의 걸(桀)과 상(商)의 주(紂)를 내세웠다. 위진시대 주는 폭군이었다는 설이 더욱 퍼졌고 색다른 줄거리들이 더 보태졌다. 당시 서주 태공망이 지었다는 위서인 병서『육도』와 황보밀(皇甫謐)이 편찬하였다는 『제왕세기』에 폭군 주왕을 살인광, 흡혈귀, 포락지형을 즐기는 악마로 서술돼 있다.

 

북위(北魏) 역도원(酈道元)은 『수경』에 주를 달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보탰다. 서진(西晉) 영가(永嘉)의 난 때 『금문상서』는 하나도 남지 않고 없어졌는데 남조 양(梁) 무제(武帝) 때에 한(漢)대 공안국(孔安國)이 주를 단 『공전고문상서』가 출현하면서 폭군이라는 설에 이른바 상주(商周)시기의 문헌 근거가 보태졌다. 그러나 진정한 상 왕조와 주 왕조의 사료인 『금문상서』의 「상서」「주서」편에는 모두 상의 주왕이 무도하여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는 죄상이 보이지 않고 충신을 죽이고 무고한 사람을 마구잡이로 학살하였다거나 흡혈하였다는 기록도 없다.

 

세상 사람들 대부분 폭군이라 매도하더라도 세상 사람의 손짓을 아랑곳하지 않고 감히 이 폭군을 엄호하는 말을 한 사람이 있다. 2000여 년 전에 공자의 학생 자공(子貢)은 “주왕의 착하지 않는 것은 이와 같이 심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군자는 하류에 처하기를 싫어하는 것으로 천하의 악이 모두 그에게로 돌아오기 때문이다”(『논어』)라고 하였다. 이는 주왕의 죄상이 역사서에 나와 있는 것과 같이 그럴 정도로 포악하지는 않았을 것인데 다만 후대 사람들이 최상을 모두 주왕에게로 돌렸다는 뜻이 담겨 있다.

 

청대 이자명(李慈銘)도 주왕의 죄라고 하는 비간을 죽이고 기자를 가두고 달기를 총애했고 문왕을 핍박한 것은 후세의 폭군과 비교하면 그렇게 중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현대 역사학자인 고힐강(顧頡剛)은 현재 전해오는 주왕의 악행은 후대에 오면 올수록 누적된 것으로 시대가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주왕의 죄는 커졌고 따라서 갈수록 믿을 바가 못 된다고 하였다. 고힐강은 이러한 현상을 상세히 고증하였는데 주왕의 폭행은 『봉신연의』등 소설에서 가공된 것이라 하였다.

 

 

1960년대에 이르러 곽말약(郭末若)은 「체은주왕번안(替殷紂王飜案)」에서 주왕은 사실 재능을 가진 인물이었다고 했다. 그는 고대 중국의 영토를 개척한 공헌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른바 ‘주가 동이를 정벌하다[紂克東夷]’는 말은 바로 회하(淮河)유역과 장장 유역을 개척한 공적을 말하는 것이라 보았다. 서주(西周)는 바로 ‘동이 정벌’의 기회를 틈타 동진하여 상을 멸망시켰다는 것이다. 『사기․은본기』에 주왕이 “분별력이 빠른 자질이 있고 듣고 보는 데에 매우 민첩하여 재질이 다른 사람을 앞섰다”고 한 점은 영걸의 자질을 가지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다. 주왕은 동이를 평정하고 회하와 장강 유역을 개척하여 북방문화를 남방으로 전파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고대 중국의 통일과 중원문화 발전에 분명 공헌을 한 사람이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주왕이 중국 사회 발전에 중대한 공헌을 하 정도가 무정(武丁)이나 주무왕(周武王)보다도 뛰어난데도 폭군이라는 이름을 적대적인 부류가 덮어 씌웠다고 하기도 한다. 이른바 죄악의 기록은 대부분 우화(寓話)가 거반인 전국시대 및 후인들의 과장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는 것이다.

 

주왕을 옹호하는 학자들은 『상서』를 근거로 하여 『상서』에 나온 죄상이 사실이냐는 것을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나라 사람들이 선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인신공격을 하였다고 본다. 이른바 과음하여 술주정한 것은 본래 은나라 사람들이 술을 좋아하고 주왕이 주량이 좀 센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왕족과 노신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비판은 주왕의 형인 미자계(微子啓)를 우두머리로 하는 반대파가 권력을 상실하게 된 원인을 주왕에게 돌렸기 때문이며 소인을 남용하여 노예를 재상 등에 기용했다는 비판은 반대로 진보적 조치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부녀자의 말을 너무 믿었다는 것은 사실 상나라의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고 주왕의 왕후는 어쩌면 여걸이라 후대 망국의 죄를 뒤집어썼다고 본다.

 

 

그렇다면 상나라가 주왕 통치시기에 멸망을 하였다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 원인은 복잡하다. 단순히 주왕의 잘못으로만 돌리기는 무리라고 한다. 당시 은나라 왕족 내부에 대분열이 일어났다. 제을(帝乙)은 왕위를 장자인 미자계에게 주지 않고 차남인 주에게 넘긴 까닭에 조정은 양분이 됐다.

미자계 일파는 계속해서 주를 공격했다. 중상모략을 넘어 내부분열을 획책했고 암살 음모를 꾸미기도 했으며 나라를 팔아 개인 영달을 추구하기도 했다. 더욱이 주왕이 동이를 정벌하면서 병력의 거반을 상실하였고 휴식기간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혼란을 틈타 거병한 주 무왕에게 힘없이 무너졌다.

주나라 군대는 장기간 준비를 하였고 강하고 조직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끌고 있는 무왕도 중국 역사상 걸출한 인물이기에 목야(牧野)전투에서 속수무책으로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상나라 주왕은 현명한 군주였을까 아니면 아둔한 군주였을까? 흡혈을 즐겼던 폭군이었을까 아니면 총명하고 유능한 황제였을까? 아직까지 논쟁이 분분한 이 인물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해야 객관적일까 하는 문제는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16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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