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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갑골문(甲骨文)은 은허(殷墟)에서 출토된 점복(占卜)으로 쓴 귀갑(龜甲)이나 동물 뼈, 골각기(骨角器) 등에 새겨진 문자를 가리킨다. 상(商)나라 때 통용되면 글자체로 ‘귀갑문자(龜甲文字)’, ‘각사(刻辭)’ 등으로 불린다. 은허(하남[河南] 안양[安陽])에서 출토된 갑골문은 약 15만 편, 5000여 자에 달한다. 상형, 지사, 회의, 형성 등 조자원칙을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갑골문은 중원문명이 찬란했었다는 증거다.

 

청(淸)나라 광서(光緖)년간 원하(洹河) 남쪽 기슭의 하남성 안양시 소둔촌(小屯村)의 농민 몇몇이 경작지를 개간하고 있다가 흙과 함께 골편(骨片)이 나오자 황급히 주워들었다. 골편은 이미 화석이 돼 있었고 위에는 무엇인가를 새기거나 그린 흔적이 있는 것도 있었다. 순박한 농민들이 자신들의 손에 들린 것이 3000여 년 전의 유물이며 골편 위에 새겨진 것이 문자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으랴. 그들은 그저 골편의 연대가 오래됐고 어쩌면 약방에 약재로 팔아 용돈으로 쓸 수 있을 것이라고만 여겼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비교적 큰 골편을 들고 약방을 찾아가자 약방에서는 ‘용골(龍骨:용의 뼈)’이라며 사들였다.

 

청나라 말기 중국의 지방에 있는 약방에서는 ‘용골’이라는 약재로 상처를 치료하는데 사용했다. 속칭 ‘도첨약(刀尖藥)’이 그것이다. 용골을 갈아 상처 부위에 바르면 지혈이 됐고 상처가 아물었다. 이외에도 어린이, 산부인과 관련 질병 및 남자의 신허(腎虛) 등 질환 치료에도 쓰였다. 이렇게 많은 골편들이 용골이 되어 약방에 팔려나갔고 어떤 사람들은 분말을 만들어 안양 지역의 봄가을 열리는 시장에서 팔기도 했다. 이러한 골편의 외관은 큰 것도 있었고 작은 것도 있었으며 글자가 있는 것도 있고 글자가 없는 것도 있었다. 심지어 글자에는 주사(朱砂)나 검은 먹으로 칠해져 있는 것도 있었다. 약방에서는 글자가 있는 용골은 원하지 않자 사람들은 글자를 없애고 위에 칠해진 색깔도 지워 버렸다. 이렇게 가치를 따질 수 없는 보물들이 무자비하게 사라져 버렸다. 마을에는 또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전문적으로 용골을 수매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순식간에 용골이 되어 북경, 하북(河北) 등지로 팔려나가 진귀한 문물이 사람들에 의해 약으로 복용되었다. 이렇게 없어진 골편들이 몇이 되는지 알 길이 없다.

 

 

이런 신기한 용골은 진짜 용의 뼈일 리야 있겠는가. 땅에 묻혀 있던 화석이 된 동물의 뼈일 따름인데. 그렇다면 어떤 동물의 뼈인가? 어디에 묻혀 있던 것인가? 그것은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데 사용하는 것인가? 사실 거기에는 위대한 역사 문화의 수수께끼가 담겨 있었다.

 

사람들이 용골로 여긴 그러한 골편은 어느 정도로 진귀한 유물일까?
이 비밀을 파헤치는데 중요한 인물이 등장한다. 당시 북경에서 단련대신(團練大臣)으로 있던 산동 복산(福山)사람 왕의영(王懿榮)이 바로 그이다. 1899년(광서 25년), 청나라 최고 학부인 국자감 제주(祭酒) 왕의영이 학질에 걸리자 한의사가 ‘용골’이라 부르는 약을 처방해 줬다. 골동품연구가였던 왕의영은 골편 위에 고대의 문자가 새겨져 있음을 발견했다. 연구를 거쳐 ‘용골’이라 불리는 것은 귀갑과 동물의 뼈(귀갑은 주로 복갑[腹甲], 동물의 뼈는 소나 양의 견갑골[肩胛骨])임을 알게 되었다. 그것들은 상(商)나라 수도의 유적 ― 하남성 안양 서북쪽 소둔촌 일대에서 출토된 것으로 3000년 이전의 상나라 유적임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약방에서 글자가 새겨진 골편을 수매하게 하였다. 이후 그는 거금을 들여 글자 한 자에 2, 3은전이란 높은 가격으로 계속 사들였다.

 

이 때부터 사람들은 골편을 ‘용골’로 보지 않게 되었다. 이 공로는 응당히 왕의영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그는 비록 그것이 상나라 때의 갑골문이라는 것을 명확히 알지는 못했지만 그가 거금을 들여 사들임으로써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된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갑골문에 대한 연구가 대세를 이루었다.

 

갑골을 수집한 사람 중에는 외국인들도 많았다. 그들은 직접 소둔촌에서 매입하였는데 이로써 많은 갑골들이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산동 유현(濰縣)에 있던 미국 선교사 칼휀트(Frank H. Chalfant)가 1903년부터 1908년 사이 중국에서 2700여 갑골을 실어 날랐다. 캐나다 전교사 제임스 멘지(James Mellon Menzies)는 1914년부터 소둔촌을 여러 차례 방문하였고 1926년까지 중국에서 3, 4만 편의 갑골을 수집하였다. 일본인 하야시는 특별히 중국으로 갑골을 수집하기 위해 오기도 하였다. 현재 중국의 갑골문은 영국, 프랑스, 독일, 벨기에, 스웨덴, 스위스, 미국, 캐나다, 러시아, 일본, 한국 등 11개 나라에서 소장하고 있고 그중 캐나다와 일본이 가장 많다.

갑골문의 출토지역을 확인하고 중국정부가 발굴 계획을 세우고 나서는 갑골의 유출을 어느 정도는 막을 수 있었다. 결국 소둔촌으로 확정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곳은 바로 고문헌에 나타난 이른바 ‘은허(殷墟)’임이 명확해진 것이다. 갑골 출토지역으로 소둔촌이 확정된 후 1928년 10월 막 성립된 중앙연구원 역사언어연구소가 수차례 조사를 끝내고 소둔촌에서 과학적 발굴을 전면적으로 진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1928년 10월부터 1937년 6월까지 15차례 발굴을 실시하였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어쩔 수 없이 중단했다가 현 중국이 성립된 후 계속해서 20여 차례 발굴을 진행하였다. 역대 반세기에 가까운 발굴 중 갑골 15만 편을 얻었고 대형 궁전유적 56좌, 은나라 말기 묘 11좌, 대형 제사 갱 3곳을 발굴하였다. 그중 순장되었거나 제사의 희생으로 쓴 노예가 5000여 명이나 됐다. 이러한 자료는 중국 북방에 있던 일반 마을인 소둔촌이 3000여 년 전 상나라 시기의 수도였음이 증명되었다.

 

소둔촌의 가치는 갑골문 발굴이라는 점을 넘어선다. 상나라는 기원전 14세기 말부터 기원전 11세기까지 273년 동안 존재했었다. 서주(西周)가 상나라를 멸망시킨 후 그곳은 점차 쇠락해졌고 끝내는 폐허가 됐다. 명나라 때 그곳에 소둔촌을 설치할 때에는 이미 철저히 들판이 돼 버린 상태였다. 그곳은 상나라 때 ‘은(殷)’이라 불렀고 이미 폐허가 됐기 때문에 ‘은허(殷墟)’라 부르게 된 것이다.

중국 고대 문헌 중 상나라 역사와 관련된 기록은 많지 않다. 사마천이 쓴 『사기』에서조차 자료를 찾기 힘들다. 그런데 갑골문이 발굴 되면서 역사 기록이 부족한 것을 메울 수 있었다. 갑골문으로 기재된 내용은 광범위하다. 농업, 목축업, 사냥을 포함하여 천문, 역법, 의학, 제사 등의 내용을 망라한다. 상나라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상나라 사회를 기록한 백과전서라 할만하다. 따라서 소둔촌의 발굴은 중국 고고학상 의의가 깊은 발견이라 할 것이다.

 

현재 발견된 갑골문자는 4000여 자이다. 그중 역사학자와 고문자학자들이 절반가량 고증하여 해석해 냈다. 갑골문자의 조자 방식도 다양하다. 상형자가 있을 뿐만 아니라 회의자, 형성자, 가차자 및 지사자도 있다. 이것은 갑골문이 비교적 성숙한 문자라는 것을 나타낸다. 하(夏)나라 때 문자가 출현하기는 하였으나 현재 자료로 본다면 수량이 많지 않다. 따라서 상나라 갑골문은 중국의 가장 이르고 비교적 성숙된 문자인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왜 문자를 갑골에 새겼을까? 당시에 복점(卜占)이 성행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일, 예를 들어 전쟁의 승부, 사냥의 수확, 질병의 경중, 농작물 수확 정도, 비바람이 일지 않을지, 아들을 낳을지 딸을 낳을지 등 모든 것에 대해 점을 쳤다. 노예제 사회에서 귀족은 점복을 행하여 귀신[鬼神, 鬼와 神을 통칭한다. 이후 혼선을 막기 위해 신령(神靈)이라 하겠다]에게 길흉화복을 묻고 실행할지 안 할지를 결정하였다.

 

점복의 방법은 먼저 갑골에 타원형의 홈을 파거나 혹은 구멍을 뚫은 후 불에 구웠다. 갑골에 판 홈이나 구멍이 불에 구울 때 금이 생기는데 사람들은 이 금이 신령의 뜻을 나타낸다고 생각하고 금의 형상으로 길흉을 판단하였다. 점복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은 물은 일과 점복의 결과를 문자로 갑골 위에 새겨 두었다. 이후 적중한 영험의 상황도 갑골에 새겨 넣었다. 갑골에 새긴 굴자는 모두 점복의 기록이기 때문에 그것을 ‘복사(卜辭)’라 부른다. 복사에는 짧은 것은 한 두 글자이고 많은 것은 몇 십 자에 이른다. 

 

갑골문의 중요한 기능은 점복이기 때문에 기상에 대한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다. 예를 들어 강우량을 큰비(大雨), 작은비(小雨), 가랑비(糸雨), 끊임없이 내리는 비(祉雨) 등으로 묘사하고 있다. 비에 대한 예보는 어느 정도는 정확하다. 예를 들어 복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己酉,自今旬雨?三月,辛亥雨.” 이는 “3월 기유(己酉) 날에 점을 쳐서 묻는데 지금부터 一旬(일순, 열흘)에 비가 올 것인가? 삼일이 지나니 비가 왔다”라는 뜻이다. 이러한 예측은 문자로만 보면 미신적 요소가 많으나 풍부한 기상 관측 경험이 없다면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이것 또한 중국 상나라시기에 강우라는 자연현상에 대해 예보까지 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음을 말해준다.

 

갑골문에 일식, 월식, 성신과 관련된 기록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천문학 관련 자료를 포함하고 있다. 세계 천문학 연구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다음과 같은 복사가 있다. “癸酉貞:日夕有食,隹若?癸酉貞:日夕有食,非若?” 이는 계유 날에 점을 쳐서 물었다 : 저녁에 일식이 있을 텐데 길한 것인가 아니면 길하지 않은 것인가? 즉 일식의 길흉을 묻는 것이다. 일식은 일반적으로 낮에 발생하는데 이번에는 저녁에 일어나니 상나라 왕은 걱정이 되어 점을 쳐서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신성(新星), 조성(鳥星) 등 성신 관련 기록도 보인다.

 

이외에도 갑골문에는 남자를 낳을지 여자를 낳을지, 사냥이 순조로울지, 정벌이 성공할지, 경작지에서 노동하는 노예가 도망을 칠지 등의 내용도 있다. 결국 풍부한 갑골 복사는 상나라 역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갑골문은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수수께끼를 후대에 남겨두고 있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발견된 갑골문자는 4500자에 이르는데 지금까지 해석된 글자는 2000여 자에 불과하다. 남아 있는 2500자는 대부분 한 글자로 돼 있고 지명, 인명 혹은 고유명사다. 갑골이 아직까지 학자들에게 도전을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미 식별된 글자 중에서도 정확하게 그 뜻을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日又哉’라는 복사는 일식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최초의 태양 흑점에 대한 기록이라 보는 사람도 있다. 어느 것이 정확한 것인지는 역시 더 깊이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갑골문 자체의 발견은 중국 문자발전사에 있어 중대한 의의를 갖는다. 그것은 중국에서 지금까지 발견된 문자 중 최초의 문자이며 일정한 계통과 규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갑골문의 발견은 중국이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에 이미 어느 정도 완전한 문자 계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갑골에 글자를 새겼기 때문에 필획은 곧게 왔다 갔다 하여 중국 사각형의 문자의 풍격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갑골문에서부터 금문(金文), 소전(小篆),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로 이루어지면서 중국의 한자가 끊임없이 성숙돼 갔고 중원 사람들의 인지능력도 넓어 졌는데 그 근원이 갑골문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7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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