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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양조훈의 4·3 발굴취재 秘史
3‧1 발포와 4‧3이 관련없다는 주장의 속내는?4‧3 그 진실을 찾아서(11) … “도망치는 군중 향해 조준 사격했다”
양조훈 전 언론인  |  yjh434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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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01  09:5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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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마경찰이 어린이를 치어 부상을 입힌 사건을 좌익진영에서 역이용, 기마경찰대가 어린이를 치어 죽였다고 흑색 선전해 멋모르는 1만여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해서 부득이 발포하게 됐다.”

이 글은 1982년 판 『제주도지』와 1990년 판 『제주경찰사』 등 공적 기록물에 기술된 ‘1947년 3‧1발포사건의 진상’이다. 14명의 사상자를 낸 이 사건의 진상은 과연 그랬을까?

이 발포사건은 제주 현대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혹자는 이 사건은 4‧3으로 가는 도화선, 즉 불씨가 되었다고 했다.

   
▲ 도망가는 군중을 향해 조준 사격하는 응원경찰 <강요배 그림>
안개 속에 가려진 3‧1발포 진상 찾아 나섰다

연재 순서에 따라 1991년부터 이 사건에 대한 심층 취재에 나선 제민일보 4‧3취재반은 사건의 진실을 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다. 그때까지도 이 사건은 뿌연 안개 속에 가려 있었다. 당시 미군정 정보보고서, 중앙지와 지방지를 포함한 신문기사, 관변자료 등을 입수해 분석했다. 또 사건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들을 찾아 나섰다.

행운이랄까, 수소문 끝에 발포 현장인 관덕정 앞 광장과 교통대 주변에 있었던 목격자 5명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그날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있었던 3‧1절 기념집회를 마친 일부 시위 군중들이 오후 2시 넘어서 관덕정 앞 광장을 S자 형태로 위세를 부리면서 지나간 다음에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즉, 이 사건은 교통대 앞 커브 길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6세 가량의 어린이가 차였는데도 그대로 가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이 몰려들어 돌을 던지며 항의했고, 이에 당황한 기마경관이 경찰서 쪽으로 말을 급히 몰아가는 순간 총성이 울렸다는 것이다. 경찰서 망루에서, 관덕정 앞에 집결했던 경찰관들이 동시에 발포한 것이다.

그 발포 순간 관덕정 광장에는 100~200명가량의 관람 군중만 있었음도 확인됐다. 앞에서도 밝혔지만, 시위대는 관덕정 앞 광장에서 어깨동무를 하고 “왓싸 왓싸”하며 위세를 부리다 서문통 쪽으로 빠져 나간 다음 발포가 있었다는 것이다. ‘1만여 군중이 경찰서를 습격하려고 해서 부득이 발포하게 됐다’는 공적 기록물 내용과는 사뭇 달랐다.

초등학생 등 희생자 대부분 등 뒤에 총 맞아

이 경찰 발포로 민간인 6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 희생자 가운데 광장 복판에 쓰러진 사람은 없었다. 대부분 경찰서와 상당히 떨어진 식산은행 앞 노상, 도립병원으로 들어가는 골목 모퉁이, 제주차부 앞쪽에 쓰러졌다.
   
▲ 3‧1사건 사망자 피격 현장도
다각적인 취재를 통해 이날 사망한 6명의 신원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다. 국민학교 5학년 어린이(허두용), 젖먹이를 안고 있던 여인(박재옥), 40대 후반의 농부(송덕수, 양무봉), 30대 후반의 농부(김태진, 오문수) 등 누가 보더라도 시위군중이라고 볼 수 없는 사람들이, 그것도 등 뒤에 총탄을 맞은 것이다.

   
▲ 젖먹이를 안은 채 피격당한 박재옥 여인의 모습 <강요배 그림>
이 날의 발포는 위협사격의 수준을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도립병원의 검안 결과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 등 뒤에 총을 맞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현장에 있었던 증언자들은 “공포만 쏘아도 군중들이 흩어질 상황이었는데, 도망가는 군중들을 향해 정조준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문제를 제기했다.

또 이날 도립병원 앞에 있던 경찰이 발포해 행인 2명이 중상을 입었다. 도립병원에서 보초를 서던 응원경찰이 갑자기 총성이 나고, 피투성이의 부상자들이 실려 오자 겁에 질려 무차별 발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건의 발포는 모두 일주일 전에 제주에 도착한 충청도 경찰대가 저지른 것이다. 특히 두 번째 발포사건은 응원경찰대의 불안정한 심리상태가 더욱 극명하게 노출된 사건이다.

이 문제는 미군 쪽에서도 인식했음이 드러났다. 미군 정보보고서에는 “제주읍에서 발포한 경관들은 대전에서 훈련을 받았고, 1946년 가을(대구 10‧1사건) 좌익 폭도들이 동료 경찰에게 모욕적인 잔학행위를 범한 기억을 마음에 갖고 있음이 틀림없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1946년 대구 10월 사건의 여파로 군정경찰 200명이 시위대로부터 공격을 당해 숨졌다. 이같은 경험을 했던 육지부 경찰들은 시위군중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노이로제 반응을 보였다. 결국 미군정은 심리가 불안한 경찰관들을 제주에 파견했다가 무차별 발포사건을 일으키게 한 것이다.

분명히 부적절한 발포인데도, 경찰 당국은 ‘대규모의 시위대가 경찰관서를 습격하려고 했기 때문에 부득이 발포하게 됐다’는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불난 집에 기름 끼얹은 격으로 제주사회가 격앙하고 격분했다.

박경훈 도지사 “총탄의 피해자는 관람군중”

당시 『제주신보』는 경찰 성명이 잘못됐음을 조목조목 따지고 나섰다. “시위대가 현장에 없었던 사실을 이야기할 증인이 필요하다면 몇 십 명이라도 증언케 할 수 있다”면서 반박했다.

이에 난처해진 제주도 군정관 스타우드 소령은 “나중에 알아본 결과 군중들은 대로 만든 플래카드를 가지고 있었을 뿐 곤봉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았다.”고 꼬리를 내렸다.

박경훈 도지사는 한 발 더 나아가 “발포사건이 일어난 것은 시위행렬이 경찰서 앞을 지난 다음이었던 것과 총탄의 피해자는 시위군중이 아니고 관람군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고 밝혔다. 이런 사실은 어렵게 찾아낸 『독립신보』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발포 현장 상황이 이런데도 당시 경찰은 잘못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상황을 모면하는 데만 급급했다. 육지부로부터 다시 응원경찰을 끌어들여 되받아치기에 나선 것이다. 통행금지령을 발동하고, 3‧1절 행사 관계자들을 연행했다. 곧이어 고문을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제주사회에 검은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다.

결정적 도움 된 『제주신보』 발굴

4‧3취재를 하면서 언제부터인가 ‘보이지 않는 힘’이 뒤에서 도와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던 일들이 묘하게 술술 풀리는 경우를 여러 번 체험했다. 그 타이밍도 절묘했다. 실종됐던 『제주신보』 신문철 발굴도 그 중의 하나였다.

1990년 12월 제주4‧3연구소는 4‧3발발 시기의 제주도에 하나 밖에 없던 『제주신보』 신문철을 찾아내 영인본 작업에 착수했다. 새롭게 발굴된 『제주신보』는 1947년 1월부터 1948년 4월까지의 신문이었다. 이 시기는 1947년 3‧1 발포사건을 전후로 1948년 4‧3봉기로 이어지는 제주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기였다.

4‧3취재반이 『제주신보』를 찾으려고 제주도내 도서관과 언론기관을 뒤졌지만 1951년판부터 듬성듬성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애타게 찾던 신문을 찾은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발굴된 시기도 절묘했다. 「4‧3은 말한다」 연재가 해방정국부터 1946년까지의 연재를 마치고, 곧 1947년에 일어난 일들을 취재할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제민일보』는 1991년 1월 1일 신년호에 ‘40년 실종 역사자료 「濟州新報」철 찾았다’는 제목아래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새로 발굴된 『제주신보』 기사를 통해 경찰 수뇌의 대형비리사건인 ‘복시환(福市丸) 사건’의 진상, 3‧1발포와 3‧10총파업의 전개과정, 군정당국의 대응, 잇따른 고문치사사건 등 ‘격동의 역사’를 추적할 수 있었다.

   
▲ <제주신보> 기사철 발굴 사실을 보도한 <제민일보> 1991년 1월 1일자 기사.
제주민전 주최 3‧1절 기념식에 3만명 운집

이 『제주신보』 기사와 증언 등을 종합하면, 3‧1발포사건까지 오는 과정은 이랬다.

미군정 장교도 인정했듯이, 제주도에서는 1947년 봄까지 실질적으로 인민위원회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육지부의 인민위원회가 대부분 1945년 12월 지나면서 무력화되었고, 좌파세력도 1946년 10월 대구사건 이후 미군정과 극단적인 대립관계에 놓였던 것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었다.

또한 제주도 좌파는 중앙의 좌파세력과 일정한 거리감을 두면서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46년 10월 좌익 주도의 봉기에는 불참한 반면, 좌파가 전면 거부한 1946년 10월 입법의원 선거에는 참여한 것이었다. 그리고 영향력을 발휘해 입법의원으로 구좌면 인민위원장(문도배)과 조천면 인민위원회 문예부장(김시탁)을 턱하니 당선시켰다.

그런 제주도 좌파도 1947년에 이르러 재정비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47년 2월 23일 제주도 민주주의 민족전선(민전)을 결성시켰다. 이 민전의 결성은 육지부와 비교하면, 1년이 늦은 것이었다.

제주도 좌파의 이런 변화는 1947년 들면서 미군정의 좌파 탄압이 강화됐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를 통해 한국의 통일정부 수립방안은 이미 어려워지고 있었다.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도 요원해졌다. 한때 동맹국이었던 미국과 소련이 세계 재편을 둘러싸고 냉전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남로당을 비롯한 좌파는 1947년 제28주년 3‧1절 기념식이 다가오자 전국적으로 무기 휴회에 들어간 미‧소 공위의 재개 투쟁과 결부시켰다. 좌파세력의 통일전선인 민전이 이 행사를 주도했다. 제주도 민전도 이때 비로소 전국 행렬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제주도 민전은 조직을 총동원해서 3월 1일 제주북국민학교에서 3‧1절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장에 3만 인파가 모였다. 이날 서울‧인천 등 여러 지역에서 좌파 따로, 우파 따로 기념식이 열렸지만 제주읍 행사는 좌우 공히 참석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 행사가 끝난 후, 일부 참석자들이 가두시위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돌발적인 발포사건이 생긴 것이었다.

이날 제주를 비롯해서 서울‧부산‧정읍‧순천‧영암 등지에서 경찰 발포 등으로 16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제주도의 발포사건은 피해 인원도 가장 많았고, 대부분 시위와 무관한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컸다.

제주경찰 간부도 사전에 몰랐던 응원경찰 파견

그런데 이 지점에서 문제의 발포를 했던 응원경찰의 제주 파견은 적절했느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그런 의문은 제주경찰 내부에서부터 제기되었다. 1947년 2월 23일 난데없이 충남‧충북 경찰청 소속 각 50명씩 100명으로 구성된 응원경찰대가 제주에 도착하자 심지어 제주출신인 강동효 제주경찰서장 조차도 어리둥절했다는 것이다.

조선 말기 제주도에서는 모두 여섯 차례의 민란이 있었다. 이런 봉기가 있을 때마다 중앙정부는 본토의 군사를 제주섬에 급파, 민란을 진압하였다. 일제시대에도 유사한 일들이 있었다. 1919년 조천 만세운동, 1931년 제주농업학교 동맹휴학사건, 1932년 해녀 봉기사건이 일어나자 전라도 경찰들을 급파해서 탄압하였다.

응원경찰의 제주파견 역사를 보면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사태발발 이후에 진압병력이 도착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처음으로 시도된 1947년의 응원경찰 파견은 이런 관례를 깨고 소요사태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졌다는 점이 특이했다.

그 무렵 제주사회가 응원경찰을 파견할 정도로 위급상황이었는가? 당시 제주경찰의 한 관계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1991년에 취재과정에서 만났던 박운봉 씨(1947년 당시 제주경찰서 사찰계장)는 뜻밖의 증언을 했다.

“비리 감찰청장이 제주경찰 모략했다”

“3‧1절 기념행사를 둘러싼 비상상황은 제주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국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주경찰에서 요구하지도 않았던 응원경찰대가 갑자기 들이닥치자 우리도 놀랐습니다. 상관들에게 물어 보아도 ‘모르겠다’는 대답뿐이었습니다.

뒤늦게야 ‘복시환 사건’으로 쫓겨 나간 신우균 제주감찰청장의 모략에 의해 제주경찰이 불신을 받게 된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 ‘복시환 사건’은 무엇인가? 1947년 1월 11일 일본에서 화물을 싣고 서귀포항으로 가던 화물선 복시환(30t 규모)이 밀수선으로 나포되면서 시작된다. 그 배 안에는 서귀포 법환마을 출신 재일동포 단체인 건친회가 고향에 보내는 전기가설 자재, 학용품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 화물의 처분을 둘러싸고 모리배들이 개입했고, 드디어 군정 관리까지 뇌물을 받고 관여하면서 확산된 사건이다.

   
▲ 복시환사건 전말서. 일본 건친회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바로 『제주신보』가 특종 보도한 ‘복시환 사건’은 모리배 의혹사건으로 전국적으로 화제를 모았다. ‘해방은 모리, 오리배 해방?’이라는 결기 있는 기사 제목도 눈길을 끌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경찰 책임자인 신우균 제주감찰청장이 경무부의 소환 조사를 받은 후 파면되었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 “해방은 모리, 오리배 해방?”이란 제목을 단 『제주신보』 기사(1947년 2월 12일자)와 신우균 제주도감찰청장을 소환 취조 중이라고 보도한 『대동신문』 기사(1947년 2월 27일자).
미군정의 실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일제 통치기구의 관리들을 그대로 채용한 것이다. 특히 경찰 쪽이 심했다. 미군정 경찰 경위급 이상의 간부 82%(1157명 중 949명)가 친일경찰 출신이란 통계가 이를 말해주고 있다.

일제 경찰 출신들은 ‘친일파’라고 공격을 받을 때마다 반공이데올로기를 앞세워 상대를 좌익 사상범으로 몰고 가면서 ‘새로운 애국자’인양 변신을 시도했다. 궁지에 몰린 일제 경찰 출신 신 제주감찰청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복시환 사건이 사회문제로 비화되자 제주출신 소장파 경찰관들이 이 사건에 연루된 그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고, 신 청장은 사면초가였다. 경무부의 소환을 받은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면서 중앙무대에서 ‘사상적으로 문제가 많은 제주경찰’이라고 역공을 폈다는 것이다. 1947년 2월 23일 난데없는 응원경찰대 100명의 제주 급파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일부 보수논객 “3‧1발포와 4‧3은 별개” 주장

4‧3을 취재하다보면 이렇게 어이없는 사건이 많았다. 민심에 조금만 신경을 쓰면 해결될 일인데도 마치 ‘유혈사태’를 향해 마구 달리는 기관차처럼 최악의 상황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고 안쓰러웠다.

결국 1947년 3‧1발포사건은 제주 현대사의 비극을 증폭시킨 전환점이 되고 말았다. 발생 경위도 그렇지만, 그 후 진행된 미군정의 대응방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4‧3’이란 불행한 사태도 여기서 잉태되고 있었다. 도화선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일부 보수논객들은 ‘3‧1발포’와 ‘4‧3’은 별개라고 주장한다. 3‧1발포사건이 4‧3의 도화선이나 기점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다. 4‧3은 어디까지나 5‧10선거를 파탄내기 위한 남로당의 전략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4‧3의 기점도 1948년 4월 3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민심의 흐름은 아랑곳없이 4‧3을 오로지 이데올로기 문제로만 접근해서 생기는 오류다. 미군정이나 경찰의 잘못은 덮고 어쨌든 남로당의 책임만 부각하고 싶은 것이 그들의 속셈이다.

미군 보고서 “1947년 3월 1일 유혈사태의 촉발”

그런데 어쩌나, 미군 보고서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주한미군사령부 정보참모부가 1949년 4월 1일 작성한 ‘제주도’란 4‧3 종합보고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제주도는 미군정 하의 1947년 3월 1일 경찰이 제주읍에서 삼일절 행사에 참가한 좌익의 무리들을 공격, 몇 명의 사람들을 죽이기 전까지는 상대적으로 평온한 편이었다. 경찰에 대한 즉각적인 반발이 공격적인 섬 주민들에 의해 일어났고 ‘이는 긴 기간의 유혈사태의 촉발’이 되었다.”

이래도 3‧1발포는 ‘4‧3의 도화선’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1999년 12월 여야 합의로 국회를 통과한 4‧3특별법의 정의(제2조)에서 “제주4‧3사건이라 함은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하여...”라고 규정한 것도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12편으로 이어집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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