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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고대 중국 북방에 역사 속에서 강대한 유목민족 국가가 출현했다. 중원에 세워진 국가와 패권을 벌인 최초의 민족은 흉노(匈奴)다. 흉노 민족 국가의 역사는 유구하여 몇 세기에 걸쳐 이름을 떨쳤다. 기원전 3세기부터 강대해지기 시작하여 몇 백 년을 중원의 한(漢)나라 왕조와 자웅을 겨뤘다.

 

유세군(劉細君)의《오손공주비수가(烏孫公主悲愁歌)》를 먼저 보자.

 

吾家嫁我兮天一方 우리 집에서 나를 시집보내니 하늘한쪽 변방이어라.
遠託異國兮烏孫王 머나먼 타국에 몸을 맡기기를, 오손 왕이로다.
窮廬爲室兮氈爲墻 파오는 방이 되고 모전은 담장이 되었으며,
以肉爲食兮酪爲奬 고기가 밥이 되고 양젖이 국이 되었구나.
居常土思兮心內傷 살면서 항상 고향을 그리니 가슴이 아프다.
願爲黃鵠兮歸故鄕 누런 고니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라.

 

이처럼 원망스러움이 담긴 슬픈 시가는 한나라 왕조가 흉노와 천하를 쟁패하다 화친을 위해 오손(烏孫) 왕에게 시집보낸 세군공주가 지은 것이라 전해 온다. 한 왕조의 공주가 이처럼 처량한 운명을 받아들이고 이렇게 애원어린 감정을 표현한다는 것은 융노가 한 왕조를 위협할 정도로 강대했다는 것을 반영한다.

 

 

 

한나라와 전쟁에서 패한 후 흉노는 남, 북으로 나뉘는데 이때가 기원전 1세기 전후로 동한(東漢)시기에 해당한다.
북흉노는 서쪽으로 쫓겨나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로마제국의 붕괴도 흉노가 유럽민족의 대이동을 유발시킨 것과 관련이 있다. 오호(五胡)시대에 흉노는 중원을 차지했는데 이들이 남쪽으로 이동한 남흉노다.

 

그런데 이렇게 세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민족이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많은 북방민족과 마찬가지로 흉노의 기원에 대해 학술계에서 일치된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다.

 

 

『사기․흉노열전』에서 “흉노는 그 선조가 하후 씨의 후손이다(匈奴其先夏后氏之苗裔也)”라고 하면서 당, 우 이전에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죽(葷粥)으로 북쪽 오랑캐 땅에서 살며 기르는 가축을 따라 옮겨 다녔다고 하였다. 이것은 중국 역사서에 나타난 최초의 기록이다. 이런 기록에 대하여 사람들은 두 가지로 해석한다. 하나는 하후 씨는 흉노의 선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산융, 험윤, 훈죽이 흉노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의 분기는 흉노의 유래에 대해 다른 견해를 만들어 냈다.

 

첫째 관점을 최초로 피력한 사람은 장안(張晏)이다. “순유(淳維)는 은나라 때 북방으로 쫓겨났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사기색은』에 기록돼 있다. 이 뜻은 하나라의 후예인 순유가 상나라 때 북방으로 도망을 쳤는데 이들이 흉노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한 둘이 아닌데 낙산(樂産)도 그중 한 명이다. 그는 『괄지보』에서 하(夏)나라 걸(桀)이 무도하여 탕(湯)왕이 명조로 쫓아냈는데 3년 만에 죽었고 그 아들인 훈죽(獯粥)이 걸의 여러 첩들을 처로 맞아들여 북쪽 평원으로 도망쳐 가축들을 따라 옮겨 다녔는데 중국은 이들을 흉노라 불렀다고 하였다.

 

근대에 들어 많은 저서들이 이런 관점을 옹호하고 나섰다. 예를 들어 여사면(呂思勉)의 『흉노문화색인』, 김원헌(金元憲)의 『북흉노서천고』, 하진아(何震亞)의 『흉노와 헝가리』등이 그것이다. 그중 비교적 신기한 관점을 가진 이가 하진아다. 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흉노는 하나라의 민족으로 기원전 6세기에 지금의 하북 정정(正定)부근에 선우(鮮虞)국을 세웠는데 나중에 중산(中山)국이라 고쳤다. 기원전 295년 중산국은 조(趙)에게 멸망하였는데 그 남은 민족이 열하(熱河 : 청더[承德]), 차하르(察哈尔), 수원(绥远), 영하(寧夏)일대에 거주하였다가 기원전 209년에 모두(冒頓)를 우두머리로 삼았다고 하였다. ‘선우’나 ‘중산’은 춘추전국시대의 소국으로 하진아는 이 두 나라를 통해 화하(華夏)족과 흉노족이 유기적으로 연결돼 있다고 주장하였다.

 

 

둘째, 산융, 험윤, 훈죽이 흉노라는 견해를 가진 학자다. 『맹자․양혜왕』조기(趙岐)주, 『시경․채미』, 『모전』정현(鄭玄)전, 『여씨춘주․심위』고유(高誘)주에서부터 근대 왕국유(王國維)의 『귀방곤이험윤고(鬼方昆夷獫狁考)』등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이 관점을 유지해 왔다.

 

왕국유는 흉노의 명칭의 상(商)나라에서부터 진나라까지 변화 과정을 계통적으로 개괄하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상나라와 주나라 사이에 ‘귀방’, ‘혼이’, ‘훈국’이라 부르는 것을 찾을 수 있고 주나라 분파를 ‘험윤’이라 하였으며, 춘추시기에 와서는 처음으로 ‘융(戎)’이라 불렀고 이어 ‘적(狄)’이라고 하였다. 전국시대에 와서 ‘호(胡)’라 부르기도 하고 ‘흉노’라 하기도 했다. 왕국유 이후 많은 근대의 학자들은 그와 견해를 같이 하고 있다. 양계초(梁啓超), 맹세걸(孟世杰), 방장유(方壯猷), 호군박(胡君泊), 정서인(鄭瑞仁), 풍가승(馮家升), 정사허(鄭師許) 등이 그들이다.

 

이러한 학자 중에서 정사걸이 가장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그는 귀방, 혼이, 훈국, 험윤, 융적, 호 등이 흉노의 다른 이름일 뿐만 아니라 귀융(鬼戎), 의거(義渠), 연경(燕京), 여무(余无), 임호(林胡), 루번(樓煩), 면제(綿諸), 대려(大荔), 오씨(烏氏) 등이 역사 기록에 보이는 이민족들로 모두 흉노에 속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왕국유와 견해가 똑 같은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몽문통(蒙文通)은 귀방, 견이(畎夷), 훈죽, 험윤과 같은 민족은 흉노족이라 볼 수 없으며 흉노와 같은 민족은 의거(義渠)라고 하였다.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학자는 황문필(黃文弼)인데 그는 귀방, 훈죽, 혼이, 험윤은 고대 강(羌)족으로 흉노와는 다르다고 보았다. 태사공(太史公)부터 하나의 민족으로 혼용하였기 때문에 그 후부터 강(羌)과 호(胡)가 나뉨 없이 같이 쓰게 되었다고 하였다.

 

무슨 말인가? ‘머리를 산발하고 옷섶을 왼쪽으로 여민 차림새[披髮左衽]’를 하고 있었던 강(羌)족과 ‘호복에 몽둥이 형태의 머리모양[胡服椎結]’을 했다는 흉노는 원래 전혀 다른 갈래라는 것이다. 즉 전혀 다른 민족을 사마천이 같은 민족으로 혼동하여 기술한 후 후대 사람들이 강족과 흉노를 구분하지 않고 동족으로 혼용했다는 말이다. 그는 임호, 루번, 의거가 흉노의 조상이라고 보고 있다. 그들은 ‘호(胡)’라고 자주 불렸기 때문이다. 춘추시대에는 또 ‘적(狄)’이라 불렸다. 그런데 귀방, 험윤 등은 강족의 조상이다. 다시 말하면 황문필이 보기에는 흉노의 선조는 춘추시대의 백적(白狄 : 백적白翟, 북적北狄)이고 전국시대의 임호, 루번, 의거라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두 가지가 확실의 흉노의 기원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반론을 펴는 학자들도 많다. 그중 한 명이 조영년(曹永年)이다. 그는 선진시대 당시 흉노는 허다한 다른 민족에서 유래한 부락이나 부족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후에 흉노가 강대해지자 다른 부족과 부락을 병합하여 거대한 세력을 만들었는데 이를 일러 흉노라고 통칭하였다고 본다. 당시 중원에 있던 한족들이 보기에는 북방에서 활동하던 민족들은 흉노와 일맥상통한다고 여겼다고 풀이하는 것이다.

 

이 외에 흉노는 서방 초원에서 온 유목민족이라고 보는 학자도 있다. 손차주(孫次舟)는 진시황 이전에 중국 북부에는 흉노족이 없었다고 하였다. 진인각(陳寅恪)도 같은 관점을 가지고 있다. 이외에도 잠중면(岑仲勉)같은 학자도 그들의 관점을 지지하면서 흉노는 서쪽에서 도래한 민족이라 하였다.

 

이상과 같이 흉노의 기원에 대해 관점이 많고 복잡하다. 의론이 너무 분분하여 중구난방 흐리터분하다. 이렇기에 아직까지 흉노의 종족에 대해서 통일된 의견이 없다. 간단히 말하면 몽골족에 속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돌궐족이라 하는 부류도 있으며 슬라브족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흉노에 관한 문제는 어느 하나 확실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다. 흉노가 도대체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정확한 결론은 역시 후일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흉노의 문제에 대해 잡다한 학자들의 견해를 나열해 놓은 까닭은 하나다. 흉노가 바로 우리 민족의 연원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초원의 길에서 황금루트를 따라 역사 속에서 명멸했다고 기록돼 있는 다양한 듯 보이나 통일성을 갖는 하나의 DNA를 가진 민족군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한국과 일본, 그리고 세계 학자들의 관점을 기록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중국인들은 과연 어떤 관점에서 한족 이외의 이민족을 보고 있느냐 하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중화사상, 그 뿌리가 얼마나 깊고 지금도 어떤 맹위를 떨치고 있는지를 이번 기회에 느낄 수 있었으면 한다. 자민족이 기록한 역사서에서 기록의 진위를 가리지 않고 단순한 용어만을 가지고 복잡 다양한 동북아 민족의 흐름을 파악하고 있는 학자들이 있음을 기억해 둬야 할 것이다. <22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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