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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26) ... 후안무치에 제주시민단체.유족 공분

1999년 8월 이승만 대통령의 양자(이인수)가 ‘불법 계엄령’ 보도에 대해 제민일보사를 상대로 ‘정정보도 및 3억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해왔다. 이 후안무치한 처사에 4‧3 진영뿐만 아니라 제주시민사회단체까지 들고 일어났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 소송은 원고가 패소하고, 피고인 제민일보사가 승소했다. 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2년여가 걸린 이 소송의 진행과정에서 4‧3 피해자들이 처음으로 법정에서 계엄령 하의 양민 학살 실태를 증언하기도 했다.

 

결국 이 소송을 통해 사법부가 공권력에 의한 불법학살극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컸다. 또한 이 송사가 4‧3 진영의 외연 확장과 결속을 다지는 계기가 됐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계엄법도 없는데 계엄령 선포해 논란

 

1997년 4월 1일 『제민일보』는 “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는 기사를 대서특필했다. 신문은 “제주4‧3 때 제주도민 대량학살의 법적 근거로 알려진 계엄령은 당시 이승만 정권에 의해 불법적으로 선포된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 충격파를 던졌다.

 

1996년 10월부터 초토화작전의 참상을 마을별로 전수 조사하던 4‧3취재반에게 ‘계엄령’은 괴물처럼 다가왔다. 글자를 모르는 할머니조차도 ‘계엄령’이란 용어만은 빠뜨리지 않았다.

 

남편이, 혹은 아들이 군경 토벌대에게 무고하게 희생당했다고 강조하면서 말미에는 꼭 “그때는 계엄령 시절”이라며 ‘시국 탓’을 했다. 그들에게 계엄령은 ‘마구잡이로 사람을 죽여도 되는 제도’ 쯤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실제 상황이 그랬기 때문이다.

 

그런데 4‧3계엄령은 그 실체부터가 불분명했다. 자료를 찾아 추적하면 할수록 엇갈리는 부분이 많았다. 계엄 선포 날짜부터가 그랬다.

 

국방부의 『대비정규전사』, 제주도경찰국의 『제주경찰사』, 제주도의 『제주도지』(1982년판) 등 관변자료에는 ‘1948년 10월 8일’에 계엄령이 선포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또한 『김녕리 향토지』는 그해 ‘10월 1일’, 「주한미군사고문단 문서」는 ‘11월 16일’, 「주한 미군사령부 정보보고서」는 ‘11월 17일’, 『조선일보』는 ‘11월 21일’ 등 계엄령 선포 날짜가 각기 다르게 기술돼 있었다.

 

이 뿐만이 아니다. 과연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지조차 의심케 하는 자료도 있었다. 『조선일보』 1948년 11월 20일자에는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는 말이 떠돌고 있으나, (11월) 19일 국방부는 이를 근거 없는 뜬소문이라고 부인했다.”고 보도했다.

 

미군 문서에는 “계엄령 선포된 적 없다”

 

더 희한한 내용은 주한미군 기밀문서에서 발견되었다. 1949년 2월 5일자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보고서」에는 “지난 1948년 11월 17일에 선포됐던 제주도 지역에 대한 비상사태는 한 달 전에 해제됐지만 그 효력에 대한 공식적인 사전 언급은 없었다(중략). 비상사태(the state of emergency)는 한국인과 미국인 모두에 의해 계엄령(martial law)으로 불려 왔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계엄령은 현 한국정부에 의해 선포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기재돼 있었다.

 

이렇게 말만 무성하고 실체는 종잡을 수 없는 계엄령 관련 자료들을 분석하다보면 마치 미로에 빠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이런 고민을 한방에 날린 문건이 발견됐다.

 

제민일보 서울 주재기자인 진행남 기자가 총무처(현 행정자치부) 산하 정부문서기록보존소에서 ‘제주도지구 계엄선포 문건’ 원본을 찾아낸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국무위원 12명의 자필 서명이 선명한 이 문건은 1948년 11월 17일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제주도지구에 계엄을 선포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계엄 공포 날짜는 기존의 관변자료 등이 다 틀린 반면, 「주한미군사령부 정보보고서」만 맞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이 계엄은 1948년 12월 31일자로 해제된 사실도 밝혀졌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국무회의 의결까지 거친 계엄령에 대해 왜 국방부와 언론이 그 사실을 부인했는지, 당시 한국군 작전통제권을 갖고 있던 미군이 왜 뒤늦게 계엄령이 선포된 바가 없다고 부인했는지 등등이다.

 

그 와중에 계엄사령관조차 계엄령의 내용을 몰랐다는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 4‧3 당시 서귀포경찰서장을 지낸 김호겸은 “계엄사령관인 송요찬 연대장조차도 계엄령이 뭔지 몰라 우리 경찰을 찾아왔다”고 증언했다.

 

4‧3취재반은 이런 계엄 관련 문건들을 분석하다가 계엄령이 불법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즉 제헌헌법 제64조(계엄선포권)는 “대통령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계엄을 선포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계엄법(법률 제69호)은 4‧3계엄령을 내린 지 1년이 지난 후인 1949년 11월 24일에야 제정 공포되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당 법률도 없이 계엄을 선포할 수 있단 말인가?

 

행여나 자의적인 해석은 아닌지 염려되어 법률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했다. 당대의 인권변호사로 명성을 날리던 최병모 변호사와 서울대 법대 출신인 김순태 교수(한국방송대‧작고) 등은 우리 해석이 맞다고 동조해왔다.

 

법제처 “일제법령이 근거”라고 반론

 

4‧3계엄령이 불법이라니? 가슴이 뜨거워졌다. ‘4‧3계엄령이 불법’이란 취재 결과에 우리들은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48년 11월 중순부터 벌어진 초토화 작전 때 군경토벌대는 팔순 노인에서부터 서너 살 난 어린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학살했다. 이 행위는 국제법에서 용납될 수 없는 불법적인 것이다. 하물며 그 법적 토대를 이루는 계엄령 선포마저 불법이었다면 문제는 더 심각했다.

 

이런 내용이 보도되자 곧 반향이 나타났다. 서울에서 갓 출범한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추진 범국민위원회’를 비롯하여 새정치국민회의, 제주4‧3연구소, 제주범도민회와 12개 전국 시민운동단체들이 일제히 성명을 발표, 정부 차원의 진상규명을 촉구했다.

 

이에 대해 정부의 법률적 입장을 대변하는 법제처가 반론을 제기했다. 반론의 요지는 ① 일제하의 식민지 조선에서는 일제 칙령에 따라 일본의 계엄령이 시행됐다 ② 해방 후 미군정 하의 남한에서는 군정법령(제21호)에 따라 일본의 계엄령이 존속됐다 ③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제헌헌법(제100조)에 의해 일본의 계엄령이 계속 효력을 가진다는 것이었다.

 

즉, 제주4‧3 때의 계엄 선포는 비록 당시까지 한국의 계엄법은 없었지만, 그때까지 계속 효력을 갖고 있던 일본의 계엄령에 의해 선포된 것이므로 ‘법적 근거 없이 선포됐다’는 보도는 잘못이라는 주장이었다.

 

법제처의 반론을 계기로 계엄령을 둘러싼 문제는 법 해석에 대한 논쟁으로 전환되었다. 4‧3취재반은 법제처가 4‧3계엄령의 법적 근거로 내세운 ‘일본 계엄령’에 대해서도 일본 헌법학자의 자문을 받으면서 그 사실관계를 조사했다.

 

1882년에 제정된 일본 계엄령은 1913년 일제 칙령에 의해 식민지 조선에서도 시행되었다. 그런데 이 계엄령은 ‘관동대지진’(1923년) 등 일본에서 모두 3차례 발효되었을 뿐, 식민지 조선에서는 단 한 번도 선포된 바가 없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그런 일본 계엄령이 같은 민족을 학살한 4‧3계엄령의 근거라니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일본의 계엄령이 과연 해방 후 제주에 계엄이 선포될 때까지 존속했느냐?’는 법률적인 해석 문제이기 때문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순태 교수와 서중석 교수(성균관대‧역사학) 등은 “법제처의 해석이 법률적이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토 없이 급히 보도 내용에 대응하려다보니 그런 근거를 제시한 것 같다”면서 문제점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제민일보』가 이와 관련한 문제점을 계속 제기하자, 법제처는 문제의 보고서에 대해서 “정식으로 문서화된 게 아니라 내부적으로 한 번 검토해본 메모에 불과하다”고 해명했다.

 

그럼에도 1997년 7월 8일 국회 법사위에서 천정배 의원(국민회의)이 신문보도를 토대로 ‘불법 계엄령’ 문제를 따져 물었을 때에도 법제처는 4‧3 때의 계엄령이 일제 법에 근거했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했다.

 

이 문제는 법률학계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언론 보도가 나간 이후 김순태 교수의 「제주4‧3 당시 계엄의 불법성」, 김창록 교수(부산대‧법학)의 「1948년 헌법 제100조-4‧3계엄령을 통해 본 일제법령의 효력」, 이승용 변호사의 「4‧3, 그 문제와 해결의 법적 측면」 등의 논문이 발표됐다.

 

18개 시민단체 “몰염치 소송 철회” 촉구

 

그런 와중에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가 부친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면서 정정 보도 뿐만 아니라 제민일보사를 상대로 3억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지난 주 연재에서 밝혔듯이, 이 사태는 내가 신문사 새 경영주에 의해 해직되고, 4‧3연재(「4‧3은 말한다」)마저 중단되던 최악의 상황에서 발생했다. 그리고 1999년 10월 7일 4‧3계엄령 다툼에 대한 첫 공판이 비상한 관심 속에 제주지방법원에서 열렸다.

 

첫 공판이 열리기 하루 전인 10월 6일  4‧3도민연대‧4‧3연구소‧제주지역종교인협의회‧천주교제주교구정의구현사제단 등 제주지역 18개 시민사회단체가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인수의 처사를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집단학살의 최고 책임자였던 이승만 씨의 양자가 망부를 대신해 사죄하기는 커녕 마치 제주 양민 학살의 책임이 없다는 듯 합법 계엄령 운운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이어서 “제민일보 4‧3취재반을 상대로 명예훼손죄로 고발한데 대해 그 뻔뻔스러움과 몰염치함에 혀를 차지 않을 수 없고, 이 행위가 다시금 유족들과 도민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은 이어 이인수에게는 후안무치한 소송의 즉각 철회와 제주도민에 대한 사과를, 재판부에게는 본 사건이 갖는 중대성을 감안해 진실을 밝히는 공정한 재판을 해줄 것을 요구했다.

 

문성윤 변호사, 제주지법 이송신청으로 기선 제압

 

한편 재판을 앞두고 양쪽의 변호사 사이에 한바탕 기 싸움이 벌어졌다. 이인수 측 이진우 변호사는 이 소송을 서울지법에 제기했다. 이 변호사는 민정당 정책위의장과 국회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는 등 정치 성향이 강한 거물 법조인이었다.

 

이에 맞선 소장 그룹의 피고 측 문성윤 변호사는 먼저 재판을 제주지법으로 옮기는 이송신청을 했다. 이 재판은 서울보다는 제주에서 진행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서울지법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결정을 하자 뒤통수를 맞은 원고 측 변호사는 화들짝 놀라면서 즉각 반발했다. 이 결정에 불복한 원고 측이 항고, 재항고까지 했지만 결국 대법원에서마저 지고 말았다.

 

재판을 제주지법으로 옮기면서 기선을 잡은 문 변호사는 피고 측 증인으로 관련기사를 썼던 김종민 기자를 내세워 상대방 주장의 빈 틈을 파고드는 전략을 썼다. 김 기자가 법정에 선 것은 3차 공판이 열린 2000년 1월 20일이었다.

 

김 기자는 “4‧3때 계엄령이란 이름 아래 60세 이상 노인부터 10세 미만의 어린아이까지 무차별 학살당했음에도 이런 중요한 계엄령에 대해 자료마다 그 선포날짜가 제각각이어서 특별히 주목하게 된 계기가 됐다”고 취재 배경부터 설명했다.

 

이어 취재과정에서 1948년 11월 17일의 계엄령이 계엄법 제정보다 1년이나 앞서 선포됐고, 미군 보고서에도 ‘비상사태’를 ‘계엄령’으로 잘못 사용했다고 기록된 내용 등을 찾아내어 국내외 학자와 전문가의 자문을 받은 결과 ‘불법 계엄령’이란 결론을 내리게 됐다고 밝혔다.

 

재판 사상 처음으로 증언석에 선 4‧3유족들

 

재판은 회를 거듭할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재판 때마다 방청석은 만원을 이뤘다. 하이라이트는 2000년 3월 27일 4‧3 피해자 5명이 법정 증언석에 섰던 5차 공판 때였다. 사상 처음으로 유족들을 직접 법정에 세우게 된 데에는 이보다 두 달 앞서 내려진 서울고법의 판결이 영향을 미쳤다.

 

이인수 측은 『제민일보』뿐만 아니라 ‘계엄령 불법’ 기사를 함께 보도한 『한겨레신문』을 상대로 정정보도 등의 청구소송을 제기했는데, 이에 대해 서울고법은 2000년 1월 20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계엄선포는 불법이었다’는 보도는 근거가 없는 만큼 정정보도하라”는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이 전 대통령이 미군정과 공모해 의도적으로 양민을 학살했다’는 부분에 대해선 정정보도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3월 27일 제5차 공판이 열린 제주지법 법정은 4‧3 유족과 시민사회단체 인사들로 가득 찼다. 방청석 한 켠에는 이인수 쪽을 지지하는 반공인사와 제주경우회 임원들이 자리를 잡아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이날 법정에서 피고 측 증인 5명이 차례로 증인석에 섰다. 김홍석(의귀리), 오국만(가시리), 양복천(교래리), 고남보(소길리), 임완송(와흘리) 등 증인 5명은 모두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피해를 입은 유족들이었다.

 

이 소송의 쟁점은 계엄령의 불법성과 양민학살의 실체 여부 등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피고 측 문성윤 변호사는 양민학살의 실체를 입증하기 위해 유족들을 증언석에 세운 것이다. 문 변호사는 이에 앞서 4‧3취재반과 함께 증인들의 집을 일일이 찾아가 피해 실상에 대한 증언을 듣는 등 사전 준비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다.

 

증인 5명은 저마다 50여 년 전의 참상을 또렷하게 진술해 법정을 숙연케 만들었다. 그런데 원고 측 반대신문이 벌어지면서 일순 분위기가 바뀌었다. 원고 측 변호사가 갑자기 일이 생겨 불참하는 바람에 소송 제기 당사자인 이인수가 직접 신문에 나섰다. 그가 4‧3을 공산폭동으로 규정하고 질문을 시작하자 방청석이 웅성거렸다.

이인수 ‘폭도짓’ 발언했다 곤욕 치러

 

이런 흥분된 분위기는 양복천 할머니에 대한 반대신문 과정에서 폭발하고 말았다. 이인수는 “토벌대가 9살 난 아들을 사살하고 나에게도 총을 쏘는 바람에 옆구리를 관통, 등에 업힌 3살 난 딸의 다리를 박살냈다”는 양 할머니의 증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폭도들이 한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 그리곤 질문지를 양 할머니 얼굴 쪽으로 들이댔다.

 

그 순간 방청석에서 “글자도 모르는 할머니에게 무슨 짓이냐?”는 고함이 터졌다. 재판장인 김창보 부장판사(현 제주지법원장)가 “고함을 지른 사람이 누구냐?”고 소리쳤다. 그때 “접니다.”하면서 오른팔을 들어 올리며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있었다.

 

4‧3행방불명인유족회 공동대표 송승문이었다. 재판정은 순간적으로 고요해졌다. 법정 소란죄로 퇴정을 명할지, 아니면 감치처분을 내릴지 모든 시선이 재판장의 입으로 쏠렸다.

 

사안이 미묘해서인지 재판장은 몇 마디 말을 주고받더니 “조용히 하세요”란 말로 끝을 냈다. 공판이 끝난 후 이인수는 거칠게 항의하는 유족들에 둘러싸여 곤욕을 치르다 재판정 뒷문으로 피신했다.

 

이 소송은 제민일보 쪽이 승소했다. 제주지법 민사합의부(재판장 김창보)는 2000년 7월 20일 선고공판을 통해 원고의 청구를 모두 기각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을 통해 ‘양민학살’에 대해서는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재판부는 “제주도 중산간마을이 초토화되었고, 무장대와 직접 관련이 없는 많은 주민들이 재판절차도 없이 살상당하는 등의 피해를 입은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재판부는 ‘4‧3계엄령 불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계엄이 법령에 근거 없이 선포된 위법한 것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면서도 “계엄선포 자체가 아무런 법적 근거 없이 이뤄진 불법적인 조치라고 단정하기 어렵다”며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대법원도 ‘4‧3 불법학살극’ 인정

 

그럼에도 노심초사하던 4‧3 진영은 재판부가 정정보도 뿐만 아니라 3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던 이인수 측의 무리한 요구에 쐐기를 박고, 4‧3 당시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일제히 환영했다.

 

이날 선고공판장에는 연로한 유족들도 많이 나왔는데, 기각 판결이 나오자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눈물을 흘리는 유족들도 있었다.

 

그러나 원고 측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항고했지만 2심인 광주고법 제주부는 2000년 12월 22일 역시 원고의 항소를 기각했다. 그러자 원고 이인수는 대법원으로 상고했고, 대법원은 2001년 4월 27일 관여 대법관 4명의 일치된 의견으로 원고의 상고를 기각했다.

 

특히 우리나라의 사법절차상 최종심인 대법원의 판결은 소송사건을 확정시킨다는 점에서 현대사 최대비극인 제주4‧3에 대한 제민일보 보도의 진실성을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입증했다는 의미가 있다.

 

대법원의 판결에서도 그동안 금기시되고 터부시됐던 4‧3 당시 공권력에 의한 양민학살을 인정했다는 점도 그 의미가 컸다. 나는 나중에 정부 차원의 4‧3진상조사보고서를 작성할 때에도 이 대법원의 판결문을 유익하게 활용했다.

 

한편, 이 소송을 승리로 이끈 문성윤 변호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일약 ‘4‧3 변호사’란 명성을 얻게 됐다. 그는 이후에도 4‧3중앙위원회의 헌법소원 및 행정소송과 4‧3유족회의 민사소송 등을 맡아 대변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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