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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6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왕망(기원전 45 - 기원후 23), 자는 거군(巨君), 신(新) 왕조의 건립자다. 서한(西漢) 말년, 왕망은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고 녹시(祿始) 원년(8)에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신(新)’이라 했다. 재위 기간 동안 개혁으로 국가 경제의 위기를 바꾸려 노력했으나 갈등이 격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갱시(更始) 원년(23) 신 왕조는 적미(赤眉), 녹림(綠林) 등 농민봉기군의 공격에 의해 멸망했고 왕망도 전란 중에 죽었다.

 

한나라 400년 동안 중간에 단명한 왕조가 왕망의 ‘신(新)’ 왕조로 역사서에는 습관적으로 ‘신망(新莽)’이라 부른다. 짧은 시기에 끝난 이 왕조에 대해 역사의 평가는 상반된다.

 

군주였던 왕망은 악독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역대 왕조의 봉건 통치자들은 자기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해 이구동성으로 왕망을 비난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왕망의 신 왕조가 이른바 ‘찬권(簒權)’해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왕망은 어떤 인물인가? 그의 개혁은 어떻게 진행됐는가?

 

 

 

 

서한(西漢) 말년, 통치 계층의 부패로 인해 여러 사회 모순이 불거져 나왔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한 왕실은 이미 끝났고 새로운 시대가 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목홍(睦弘)이 소제(昭帝)에게 “한 황제는 천하의 뜻을 받들어 현인을 찾아 제위를 선양하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릴 정도였다. 개관요(蓋寬饒)는 환제(宦帝)에게 “가문은 아들에게 전하고 관은 현자에게 전합니다. 사시(四時)의 운은 성공한 자에게 가고 그 사람을 얻지 못하면 그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곡영(谷永)도 성제(成帝)에게 “왕이 된 자는 삼통(三統)을 명확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천제의 자리를 줄 수 있는 자가 많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오로지 성(姓)에 따르는 것은 아닙니다”라고 했다. 심지어 애제(哀帝) 자신도 새로이 하늘의 명을 받았다고 했고 스스로 ‘진성유태평황제(陳聖劉太平皇帝)’라 칭했다. 이렇듯 당시 사람들은 왕조란 꼭 유 씨만 다스려야 한다는 사상이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왕망은 외척 출신이지만 어릴 적부터 가난했고 의지할 데 없었다. 그는 자신의 노력으로 “근신하고 박학하여 유생과 같았다”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당시 그와 경쟁하던 부류들과는 달리 당시 사회 위기상황과 하층 백성들의 생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위기의 시대에 살면서 자제하고 처신을 잘했다는 점은 대단한 것이다.

 

정치의 일선에 들어선 이후 옳은 일을 많이 했다. 빈농에게 전답을 나누어 주었고 장안성 내에 상만창(常滿倉)을 세웠으며 황실 유원지를 폐지했다. 사자를 보내 황충(蝗蟲)을 잡게 했으며 재난을 당한 빈민에게 세금을 면제시켜 유민이 되는 것을 막았다. 전국의 과부, 고아, 독거노인들에게 직물을 하사했다. 이러한 행동은 그에 대한 기대를 높였으며 그의 공적을 칭송해 상소한 사람이 48만여 명이나 됐다.

 

반고(班固)는 『한서』에서 왕망을 야심가라 했다. 그러나 동한(東漢) 통치권력 아래서 관직에 있던 반고가 서한 왕조를 종결시킨 왕망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었겠는가 하는데 의문이 든다.

 

당시 왕망은 전국에 통지하여 일례(逸禮), 고서, 천문, 역학, 병법, 의학, 사학 등에 능통한 사인(士人) 수천 명을 도성에 소집해 중국 역사상 제1차 과학전문가 회의를 개최했다. 이것은 획기적이며 강한 시대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학자들을 위해 건물을 지었고 각 지방에 학교를 세워 인재를 배양했다. 심지어 왕망을 반대하던 유수(劉秀) 조차 왕망의 태학에서 공부했던 인물이다. 왕망의 정치무대에 등장한 것은 처가의 덧을 본 것은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부패한 서한의 구조와 눈앞에 닥친 사회 위기 속에서 자신의 포부와 재능으로 이룬 것은 분명하다. 옳은 것은 일으키고 해로운 것은 없애기 위해 개혁해 나갔던 능력 있는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왕망의 개혁은 실패로 끝났다. 그의 개혁은 ‘개인의 야심에 의한 것일 뿐’이라고 낮춰 보는 사람이 있다. 이런 관점은 승자는 왕이 되고 패자는 역적이 된다는 단순 논리에 불과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역사상 어떤 개혁이든 특정적 역사 조건 하의 산물로, 개혁이 성공하느냐 못하느냐는 조건에 따른 제약을 받게 마련이다. 서한의 동중서(董仲舒), 사단(師丹)은 모두 노예와 전답 소유를 제한할 것을 건의했으나 실행되지 못하자 포기했고 동한의 유수도 전답의 실상을 파악하고 실재로 운영하려고 했으나 끝내 실패했다. 그렇다면 그것도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 아니던가?

 

 

 

 

왕망의 개혁의 목적, 내용과 효과에 대해 분석하고 평가하는 것은 맞지만 개혁을 실행했다는 그 자체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가 처한 시대는 사회 모순이 극열했던 시기다. 부강한 관료들은 토지를 겸병하고 노예를 축적해 노역에 동원했다. 부상(富商)들은 매점매석하고 고리로 착취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경농들은 파산하고 유민이 됐다.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지만 통치계급은 무절제한 사치를 누리고 있었다. 각지에서 폭동이 끊이지 않았다. 서한 사회는 이미 막바지에 이른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망이 사회의 위기를 간파하고 개혁에 힘쓴 것은 통치 그룹 중에서 홀로 탁월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거섭(巨攝) 3년(8) 왕망은 개혁을 시작한다. 토지 겸병을 금지하고 노비의 매매를 제한했으며 도량형을 통일했다. 이러한 조치는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왕망이 실시한 화폐 정책이 경제적 혼란을 가져왔지만 개인의 욕심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이외에 왕망은 봉록제도도 개혁했다. 관료의 대우를 낮춘 것이다. 그의 목적은 대지주의 눈앞의 이익을 희생시켜 새로이 통치 구조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서한 말기의 실제 상황에서 보면 이러한 그의 조치는 진보적 의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영국의 조지프 니덤(Joseph Terence Montgomery Needham)은 『중국과학기술사』에서 왕망을 높이 평가했다. 왕망은 왕안석(王安石)과 함께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개혁가라고 했다. 그러나 왕망의 개혁은 대지주와 대관료들의 이익을 건드리면서 그들의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그들의 압력으로 왕망은 어쩔 수 없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개혁을 진행하는데 있어 의탁하고 있던 세력이 바로 그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왕망의 정권을 유지하게 하는 기반이었고. 끝내 전쟁이 발발하자 많은 비용을 쓰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붕괴되고 개혁의 공든 탑이 무너져 버린다.

 

어떤 면에서 왕망은 중국 역사상 첫 번째 혁명가라고 할 것이다. 중국 역사상 정부가 나서서 개혁한 것은 그가 중심이 돼 추진한 것이 첫 번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경험이 없었고 계급적 한계가 있었다. 그의 큰 뜻은 대지주 계급을 상대로 개혁하는 것이었으나 자신의 권력을 지탱하고 있는 그들을 개혁할 수 없었다. 개혁의 대상이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으니 철저한 개혁을 진행시킬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백성들에게 대재앙이 돼 버렸다. 그리고 어쩌면 당시 사회를 안정시켜야 자신의 가지고 있는 권력을 영원토록 누릴 수 있다는 개인적 욕심이 앞섰던 것일 수도 있고.

 

 

 

 


중국 역사상 위기의 시대, 사회 모순이 대폭발하기 이전에 용감하게 나서 대폭적으로 정책을 조정하고 개혁을 통해 위기 국면을 만회하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개혁에는 성패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성패로 개혁이라는 그 자체를 평가하는 기준이 돼서는 안 된다. 어쩌면 왕망은 서한의 부패한 통치계급의 속죄양일 수도 있다. 그런데 개혁을 하려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중요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개혁이란 실패하면 참극만 남는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감히 나서 개혁을 하려 했던 그의 정신만큼은 높이 사야 할 것이다.

 

그렇더라도 왕망의 사람됨은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개혁가라는 미명을 부정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그가 저지른 일들은 사람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물론 농민 노동자를 위해 혁명전선에서 투쟁했으면서도 결국 자신의 과오를 덮기 위해 ‘문화대혁명’을 발동하여 중국 현대사를 핏빛으로 물들인 인물도 있기는 하지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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