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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6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한나라 영제(靈帝 : 156-189) 유굉(劉宏)은 동한(東漢)의 황제로 168년에 즉위했다. 그의 통치기간에 당고(黨錮)가 횡횡했고 환관(宦官)이 대권을 장악해 공개적으로 매관(賣官)을 자행했으며 대대적이 토목공사를 벌여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중평(中平) 원년(184)에 기세 드높은 황건(黃巾) 봉기가 일어났다.

 

호화로운 궁궐에서 살기는 했지만 동한 황제 유굉은 스스로 하늘가를 유랑하는 방랑자처럼 느껴졌다. 고독하고 적막했으며 심경을 쉽게 표현하지 못했다. 환관들이 제멋대로 날뛰고 있었고 대신들은 격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자신의 무력감을 피부로 느꼈다. 그래서 그는 탐욕스런 호색한으로 변해 황당하고 괴벽스런 행동을 자행한다.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런 그의 영혼에서 어린 천자의 생기발랄함은 전혀 느낄 수 없다. 그저 한나라 말기 사회 혼란을 볼 따름이다.

 

 

 

 

181년 동한의 도성 낙양(洛陽) 후궁에는 장사하는 거리가 생겨났다. 여느 도시의 시장처럼 점포가 늘어서고 여행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일반 시장과 다른 것은 영제의 명령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궁정의 보물과 비단, 그리고 각종 잡동사니들을 늘어놓은 상점에서 장사를 하는 것은 궁궐의 궁녀들이었다. 영제도 스스로 상인의 복장으로 갈아입고 건들건들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이른바 고객들과 섞여 시시덕거렸다. 술집에서 흥을 돋우고 나서 술에 취한 듯 휘적휘적 여러 상점으로 물건을 사러 다녔다. 점원들과 값을 흥정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어떤 때에는 점원을 쫓아내고 자신이 대신 팔기도 했다. 그럴 때면 취한 듯한 자세를 바꿔 옹골진 표정으로 만면에 웃음을 띠고 점포에서 장사를 했다. 궁녀들은 다른 점포에서 몰래 훔쳐온 물건을 가지고서 서로 아귀다툼을 벌였다. 영제는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하며 즐겼다. 그해는 바로 선비족(鮮卑族)들이 유(幽), 병(幷) 지역을 침범하면서 변방에는 봉화가 난무할 때였다. 그런대도 궁궐은 뒤죽박죽 난잡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영제는 그런 놀이가 시들해 지자 서원 유락장에서 막돼먹은 자제들과 개를 가지고 놀았다. 개들에게 진현관(進賢冠)을 씌우고 비단 띠를 두르게 했다. 동한의 진현관은 문관들이 사용하는 것으로 앞 높이 7촌(寸), 뒤 높이 8촌, 길이 8촌이나 됐다. 이런 문관의 모자를 개에게 씌웠다는 것은 관리들에게 모욕을 주는 것이었다. 당시 어떤 관리들은 백성들을 착취하기 위해 온갖 못된 일을 자행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흉악한 개와 다름이 없었다. 영제는 그렇게 그들을 풍자했던 것이다.

 

영제는 또 노새로 수레를 몰게 했다. 자신이 직접 고삐를 잡고 노새가 모는 수레를 타고 궁궐을 달리기도 했다. 이 일은 도성의 백성들이 알고 앞 다퉈 모방하게 되면서 싸게 팔리던 노새 값이 갑자기 말의 값과 같을 정도로 비싸졌다. 당시 노새는 무거운 물건을 운반하는데 이용했었다. 일반 백성들만 사용했지 제왕이나 대신들은 이용하지 않았다. 영제는 그런 관례를 위반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자 정인군자들은 불길한 징조라 여겼다.

 

 

 

 

상상할 수 없는 일도 벌인다. 영제는 서원에 관원(官員) 거래소를 설치하고 가격을 매겨 관직을 매매했다. 지방 관직은 일반적으로 조관보다 2배나 높았고 현관 가격은 각각 달랐다. 관직을 사고자 하는 사람들은 가격을 매겨 공개 입찰에 참여했다. 가장 높은 가격을 제시한 사람에게 관직이 돌아갔다. 고정적인 가격 이외에 관직을 구하는 사람들의 신분과 가지고 있는 재산에 따라 가격이 조정됐다. 예를 들어 2000석의 관직 가격은 2000만, 400석의 관직은 400만이란 현금으로 거래 됐다. 외상으로도 거래 됐는데 관직에 오른 후 2배로 상환하면 됐다. 그런 관원이 관직에 오른 후 미친 듯이 수탈하니 백성들은 ‘추워도 입을 옷이 없고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야말로 왕조의 위기였다.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른 난세의 군왕과 같이 영제도 호색한이었다. 그 방법 또한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186년 영제는 서원에 나유관(裸游館) 1000칸을 지었다. 매년 여름이 되면 영제는 그곳으로 피서를 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잔치를 벌였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면 “이렇게 10000년을 살 수만 있다면 신선 중의 신선이 아니겠느냐”며 탄식했다고 한다. 당시 궁녀들은 14세 이상 18세 이하로 화장을 하고 농염하게 꾸몄다. 영제는 그녀들의 상의를 벗게 하고 내의만 입게 했고 때때로 그녀들과 목욕을 즐기기도 했다. 목욕이 끝나면 기름을 용수에 부었는데 ‘유향거(流香渠)’라 불렀다. 영제는 환관들에게 노새처럼 소리 내게 하기도 했다. 나유관 북쪽에 계명당(鷄鳴堂)을 지어 닭을 기르면서 매일 해가 뜰 때며 환관들에게 닭소리를 내게 했다. 영제의 음란의 정도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서한 무제 때 장건이 서역을 개척하면서부터 한나라와 서역, 그리고 주변 민족들 사이에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됐다. 외족들의 풍습, 의복과 기물들은 동한 왕조의 귀족 계층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영제 때에 이르러 오랑캐화[胡化] 물결이 일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영제는 호복(胡服), 호좌(胡座), 공후(箜篌), 호적(胡笛), 호무(胡舞)를 즐겼다고 돼 있다. 이렇게 되자 수도의 왕족과 귀족들이 앞 다퉈 모방하면서 ‘오랑캐 물건[胡物]’을 애호하는 풍조가 유행했다.

 

영제는 황음무도했지만 다재다능했다. 탄금에 능했으며 퉁소를 잘 불어 『황희편(皇羲篇)』50장을 짓기도 했다. 그는 기예 배우기를 즐겼다. 대신 유관(劉寬)에게 경전을 강론하게 하면서도 민간의 이야기들을 즐겨 들었다. 민간의 기문이설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했다.

 

178년 2월 영제는 홍도문학(鴻都門學)을 건립하고 서간 사부에 능한 사람들과 서화 전각에 능한 사람들 1000여 명을 초빙하면서 명경수행(明經修行)에 의거 벼슬길에 오르던 전통을 개혁했다. 그렇게 초빙된 사람들은 재주를 파는 자들이라 폄훼되기도 했지만 민간 속어를 대대적으로 운용해 사부를 창작함으로써 민간문학의 지위를 높였다. 영제는 조류를 거슬러 올라감으로써 금문경학(今文經學)과 참위지설(讖緯之說)에 경도돼 질식 일로를 걷던 동한 문예의 영역을 탈피하고 동한 말년의 시가를 내용과 형식을 모두 중시하는 풍조를 낳게 했다. 서정성을 넓혔으며 서법과 전각, 회화에 있어서도 번영의 틀을 만들었다.

 

188년 22년 간 통치했던 영제는 34세 나이를 끝으로 문릉(文陵)에 안치된다. 높이 20장(丈), 둘레 300보(步)의 좁고 작은 어두운 세계에 구차하게 누워 있다. 난세의 기형아로 황당무계하고 도리를 벗어난 행위에 대해 후대 사람들이 비웃든 말든.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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