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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53)… 보수단체의 개관저지 활동 전말

보수진영 조직적인 반격 시작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했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으로 이어지던 진보정권 10년을 마감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보수정권이 닻을 올린 것이다. 겨우 제자리를 찾던 4·3 진실 찾기와 명예회복 운동도 이 때부터 시련을 맞게 됐다.

 

보수진영의 조직적인 반격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보수진영은 자기들 세상이나 만난 양 의기양양하게 김대중·노무현 정권에서 이루어낸 과거사위원회의 성과물들을 한꺼번에 뒤엎을 기세였다.

 

다른 과거사위원회의 성과물에 대해서도 공격했지만 가장 화력을 집중시킨 것이 이념적 쟁점이 많았던 바로 4·3이었다. 그들의 공격 목표는 제주4·3위원회의 폐지, 4·3진상조사보고서의 수정, 4·3희생자 결정의 무효화, 4·3평화기념관의 개관 중지로 모아졌다.

 

이번 회에서는 4·3평화기념관의 개관을 둘러싼 갈등의 전말을 소개하려고 한다. 제주4·3평화기념관은 4·3 발발 60주년인 2008년 3월에 개관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시점은 하필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였다.

 

그래서 더욱 4·3진영과 보수진영이 평화기념관 개관을 둘러싸고 “개관해야 한다”, “개관해선 안된다”고 첨예하게 맞부딪친 것이다.
 

 

 

 

4·3평화기념관은 이제는 해마다 20만 명 이상이 관람하는 다크투어(Dark Tourism)의 명소이자 한국현대사의 대표적인 기념관으로 꼽힌다. 그러나 그 기념관이 문을 열기까지에는 남다른 진통이 있었다.

 

제주시 봉개동에 자리 잡은 4·3평화공원 조성 사업은 2000년부터 3단계로 추진됐다. 그 가운데 핵심 시설인 4·3평화기념관 건립은 제2단계 사업에 포함되어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착수됐다.

 

평화기념관은 지상 3층, 지하 2층 규모의 건물(연면적 11,455㎡)로 설계되었고, 전시 시설까지 포함해서 모두 국비 380억 원이 투입되는 대규모 사업이었다.

 

상설전시실은 제1관 도입 부분(역사의 동굴), 제2관 4·3의 전사(前史·흔들리는 섬), 제3관 4·3 봉기(바람타는 섬), 제4관 학살(불타는 섬), 제5관 후유증과 진상규명 역사(흐르는 섬), 제6관 새로운 시작으로 연출됐고, 다랑쉬굴 참상이 재연된 특별전시관 등이 별도로 준비됐다.

 

아트워크 작품 중에는 박재동 화백의 애니메이션 ‘3·1절 기념대회 발포상황’, 강요배 화백의 회화 ‘제주도민의 5·10’, 김창경 화백의 미디어 아트 ‘한라산의 평화’, 오석훈 화백의 저부조 ‘제주 저항의 역사’, 이가경 화백의 애니메이션 ‘불타는 섬’, 고길천 화백의 조소 ‘죽음의 섬’ 등이 인상적이었다.

 

전시내용을 연출하는 과정에서는 수정이 거듭됐다. 전시의 눈높이를 중학생 수준에 맞춘다는 원칙이 정해지면서 내용을 보다 쉽게 풀어쓰는 작업이 계속됐고, 시각적 효과를 살리는데 비중을 두었다.

 

선봉엔 재향군인회 박세직 회장
그런데 뜻하지 않은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명박 정부 출범을 계기로 보수단체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2008년 2월, 재향군인회, 뉴라이트 전국연합 등 94개 보수단체로 결성된 ‘대한민국 국가정체성회복국민협의회’가 청와대와 국무총리실에 4·3진상조사보고서 수정과 4·3평화기념관 개관 연기를 골자로 한 진정서를 제출했다.

 

그 진정서에는 “4·3평화기념관은 날조·왜곡된 4·3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로 군경은 악으로, 폭도들은 봉기자로 미화하는 등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들을 전시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 선봉에 재향군인회 박세직 회장이 나섰다. 육군 소장 출신인 그는 총무처장관·체육부장관·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안기부장·서울시장과 국회의원을 두루 거친 거물이었다.

 

그 무렵에는 보수정권을 재탈환하는데 기여한 공로로 기세가 등등했다.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와 총리실 등에 바로 전화를 거는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열흘도 안 된 3월 5일, 한승수 국무총리가 원세훈 행정안전부장관과 박성일 4·3지원단장을 호출했다. 놀랍게도 재향군인회 등에서 제기한 4·3평화기념관 개관 연기 주장 등에 관해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국무총리까지 나서서 대책회의
당시 4·3위원회에 근무하던 나는 박성일 단장으로부터 이 이야기를 듣고 쉽게 짐작이 갔다. 이 주장에 앞장서고 있는 재향군인회 박세직 회장이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들이 전시 준비 중인데 4·3중앙위원회 위원장인 국무총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는가”라고 따졌을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4·3평화기념관 건립 사업도 4·3중앙위원회 소관이다. 4·3위원회는 2004년 3월 9일 제9차 전체회의에서 기념관 건립 사업 등을 의결했고, 그 집행을 4·3실무위원회(위원장 제주도지사)에 위임한 상태였다.

 

나는 그날 박성일 지원단장과 함께 정부 중앙청사 총리 집무실로 향하면서 두 가지 점을 강조했다.

 

만일 기념관 전시물 문제가 제기되면 그것은 제주도지사에게 위임한 사실임을 밝혀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가능하면 그 과정을 잘 아는 수석전문위원인 나를 배석시켜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총리 집무실에 나의 입장은 허용되지 않았다. 나는 총리 비서실에서 대기할 수밖에 없었다. 한 총리와 원 장관, 박 단장 등 3자 회동이 30분간 진행됐다. 한참 후 총리 집무실 문을 열고 나오는 박 단장의 얼굴은 백짓장처럼 하얘져 있었다. 나의 예상이 적중했다.

 

박세직 회장의 문제 제기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다는 것이었다. 박성일 단장이 기념관 전시물은 제주도지사에게 위임돼 있다고 설명하자 원 장관으로부터 심한 질책을 받은 것이다. 정권이 바뀐 줄 모르느냐는 식으로.

 

그래도 어쩌겠는가. 박 단장이 특별법 상의 집행기구인 실무위원회에 위임된 사항이라고 계속 버티자 화가 난 원 장관은 그 자리서 바로 김태환 도지사와의 직접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김 지사는 이에 대해 3월 말 평화기념관 개관 계획은 이미 공표된 사실이고, 전시물에 문제가 있다면 개관 전에 수정하겠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김 지사는 통화 과정에서 박세직 회장 등의 문제 제기가 심각하다는 원 장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그러면 박 회장을 직접 만나 의견을 교환하겠다고 버텼다.

 

김태환 지사와 박세직 측 서울서 간담회
3월 18일, 김태환 지사와 박세직 회장을 축으로 한 양쪽 진영의 조찬 간담회가 서울 광화문에 위치한 코리아나호텔에서 열렸다.

 

제주도에선 김 지사와 강택상 기획관리실장, 박영부 행정자치국장, 진창섭 4·3사업소장 등이 상경했다. 필자도 김 지사의 요청에 의해 4·3전문가의 자격으로 자리를 같이하게 됐다.

 

보수진영에서는 박세직 회장과 류기남 자유시민연대 공동의장 등 6명이 참석했다. 그런데 그 일행 속에 뜻밖에도 이선교 목사가 끼어 있었다. 그는 나를 보는 순간 움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이 목사는 자칭 ‘제주4·3사건 왜곡을 바로잡기 위한 대책위원회’를 만들어 진상조사보고서와 대통령 사과를 취소하라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내는가하면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 진정서를 보내 4·3희생자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등 맹렬하게 4·3 명예회복 반대운동을 펴온 인물이다.

 

조찬 간담회는 긴장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보수진영 측 참석자들은 “군경에 의한 진압과정에서 발생한 불행했던 사태들을 침소봉대하고, 남로당 폭도들의 만행은 축소·은폐한 4·3진상조사보고서를 중심으로 4·3평화기념관 전시물이 만들어지고 있는 것은 대한민국 정통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들 중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학살자로 묘사되고 있다면서 “초대 대통령이 어떻게 악마인가?”고 따져 묻기도 했다. 그들은 평화기념관 개관을 연기해서 전시물을 전면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창 논의가 진행됐지만 결론이 쉽게 나지 않았다. 나는 어떤 논리를 편다고 해도 그들이 수긍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박세직 회장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박 회장님, 평화기념관 전시물이 잘못됐다는데 직접 보셨습니까?”
“아니, 내가 직접 본 것은 아니고, 부하직원들이 다녀와서 문제가 많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추상적으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박 회장님이 직접 제주에 가셔서 기념관 전시물을 보고 문제 여부를 논의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나는 어떻게 하든 3월 28일로 정해진 기념관 개관 날짜를 늦춰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런 제안을 했다. 김태환 지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면서 그 이전이라도 자체적으로 전시내용을 점검해서 수정 사항이 있으면 수정하겠다고 거들었다.

 

3월 20일 4·3위원회 소위원회의 평화기념관 점검 회의도 그런 일환으로 이뤄졌다. 박세직 회장도 이런 제안에 토를 달지 못했다.

 

반대 광고 속에 기념관 개관식 강행
개관 예정일인 3월 28일이 다가오면서 개관 준비는 초읽기에 들어갔다. 그 시점에서는 그날에 개관할 수 있느냐 마느냐가 초미의 관심이었다. 제주도는 어떻게 하든 그날 기념관 문을 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이에 반해 보수단체에서는 중앙지와 지방지 등에 “제주4·3평화기념관 개관은 연기되어야 한다.”는 광고를 내는 등 저지 운동에 총력전을 폈다.

 

그 광고 문안에는 ‘날조·왜곡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먼저 시정하라’, ‘초대 대통령이 악마인가’는 등 격한 표현이 많았다.
 

 

 

 

2008년 3월 28일, 보수단체들의 반대 속에 제주4·3평화기념관이 개관됐다. 당초 전시연출자문단에서는 개관에 맞춰 외신기자를 초청한 대대적인 홍보전과 기념관 오픈 기념 국제심포지엄까지 구상했다.

 

그러나 개관식 계획이 뒤죽박죽되면서 이런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결국 4·3평화기념관 개관식은 제주 지역 인사들만 참석하는 지역 행사가 되고 말았다. 기념관 전시물 설명도 공무원인 진창섭 4·3사업소장이 맡아 안내했다. 나도 개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기념관 개관을 눈앞에 두고 아트워크 작품 일부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돼 전시되지 못하면서 논란이 일기도 했다. 그중에도 가장 논쟁이 됐던 것은 김대중 화백의 ‘오라리사건의 진실’이다.

 

오라리사건 표현한 전시작품 논란
이 작품은 오라리 방화와 이를 무장대의 소행으로 조작 기록한 미군 쪽 영상자료를 테마로 시사만화 형식의 카툰과 포스터로 그려진 가로 10m에 달하는 대형작품이었다.

 

그런데 이 작품이 이런 조작사건을 백악관과 직접 연결된 것처럼 표현한 부분과 격한 포스터 표현 등이 과도하게 그려졌다는 지적이 나왔다.

 

3월 20일 4·3중앙위원회 소위원회(위원장 박재승 변호사)의 평화기념관 전시물 최종 점검 과정에서도 이 문제가 제기됐다.
 

 

 

 

 

소위원회는 3월 25일 “백악관과 중앙청이 전화선으로 연결되어 오라리 조작사건 배후에 미국정부가 있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추측, 추상적 표현, 자극적인 그림을 자제하고 진상조사보고서에 근거해 충실한 내용으로 수정할 것”을 제주도에 통보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화백은 “미정부의 대응-미군정의 대응-평화협상-오라리사건-제주도 메이데이로 이루어지는 작품의 한 축은 사실로서 드러나지 않았으나 당연히 추론 가능한 부분을 보여준 것”이라면서 수정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해당 그림은 가려졌고, 그 위에 오라리사건에 대한 패널이 설치됐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예술적 표현의 자유 침해라는 입장과 공공 영역에서 역사적으로 규명 안 된 사실을 추론하여 표현하는 것이 더 큰 문제를 촉발할 수 있다는 입장이 맞서 있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도 한 짐을 지고 있다. 4·3중앙위원회 소위원회의 현장 확인 과정 때 한 위원이 나에게 “이 문제는 자칫 외교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는데 대응할 자신이 있느냐”고 묻기에 “자신이 없다.”고 답변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내가 4·3취재반장으로 활동할 때 오라리 조작사건의 진실 규명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적했던 사안이다. 따라서 오라리 사건의 실체는 누구 못지않게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이 사건의 배후에 미군정과 미국정부에 대한 의심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연결됐다는 식의 표현에는 쉽게 동의할 수 없는 입장이다.

 

재향군인회 임원단과의 설전
한편, 4·3평화기념관이 개관된 지 보름쯤 지난 4월 중순께 재향군인회 박세직 회장 일행이 기념관을 방문했다. 방문단은 재향군인회 중앙회 임원과 각 시도 지회장 등 30여 명에 이르렀다. 대부분 예비역 장성 출신들이었다.

 

나는 지난 3월 18일 서울 회동 때 평화기념관 개관을 반대하는 박 회장에게 “기념관 전시물을 직접 보고 문제가 있는지 그 여부를 논의하자”고 제안했고, 제주에 가게 되면 내가 안내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동석할 수밖에 없었다.

 

방문단은 전시관 초입부터 전시물에 불만을 드러냈다. 인민위원회 활동 등을 미화하고 군경의 진압과정을 매우 부정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야기들이 들렸다.

 

나는 제4관 ‘불타는 섬’ 입구에 설치된 초토화되는 제주도 지형이 있는 곳에서 4·3 당시 군인들이 제주에서 감행했던 초토화작전의 실상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중산간마을을 쓸어버린 이런 초토화작전이 정당한 진압작전인지, 그리고 오늘의 재향군인회가 왜 과거의 잘못된 군사행위까지 변호하고자 하는지 알고 싶다.”고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있었다. 몇몇 예비역 장성이 베트남 전쟁을 예로 들면서 피아간의 구분이 어려울 때에는 불가피하게 민간인 희생도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나는 더 이상 정상적인 대화가 어렵다고 보고 그들과의 대화를 중단하고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아가자 박세직 회장이 뒤따라오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면서 “양 위원, 사람이 한 대 맞으면 화가 나서 두 대 때릴 수 있는 것이 아닌가”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두 대가 아니라 백배, 이백배의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기 때문에 제주도민들이 억울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냐”고 반박했다.

 

평화기념관 개관을 둘러싸고 그처럼 아옹다옹 말다툼하던 박세직 회장은 그 이듬해인 2009년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승만 양자 등 전시금지 소송냈지만 패소
2015년 3월, 이승만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씨와 이선교 목사 등 6명은 제주도와 4·3평화재단을 상대로 4·3평화기념관의 전시 금지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은 진상조사보고서와 희생자 심사 등이 잘못되었다고 수차례 헌법소원, 행정소송 등을 제기한데 이어 이번에는 기념관 전시물까지 문제 삼은 것이다. 참으로 끈질기게 4·3 명예회복에 반기를 들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4·3기념관이 제주4·3사건을 ‘이승만 정부가 무참한 살육으로 진압한 사건’”으로 규정하고 있고, “기념관의 편향적인 전시는 현대사를 왜곡해 대한민국 건국의 정당성을 부정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서울중앙지법은 금년 1월 29일 “기념관 전시물들은 수년에 걸친 진상조사를 토대로 작성한 4·3사건보고서에 근거하고 있다”면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 판결한 것이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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