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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6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조조(曹操 : 155-220), 자는 맹덕(孟德), 어릴 적 이름은 아만(阿瞞), 위(魏) 무제(武帝)다. 삼국 시대 유명한 정치가, 군사가, 시인으로 초(譙, 현 안휘[安徽]성 박[亳]현) 사람이다. 동한(東漢) 말기 황건 봉기를 진압하면서 군사력을 확대하고 나중에 관도(官渡) 대전에서 원소를 퇴패시킨 후 점차 중국 북부를 통일했다. 위왕(魏王)으로 봉해진 후 농업을 장려하고 수리를 했으며 인재를 등용해 그가 통치하는 지역에 번영을 가져왔다. 병법에 능하고 시를 잘 지었다. 『위무제집』을 저술했다고 하지만 산실됐다.

 

『삼국연의』는 중국은 물론 동아시아에 널리 알려진 소설이다. 그중 적벽대전은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진하고 묘사가 대단히 뛰어난 최고의 장면이라 할 것이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대패했다. 그렇다면 패배한 원인은 무엇일까?

 

이백(李白)은 유명한 시인으로 ‘시선(詩仙)’이라 칭송받는다. “맹렬한 불길이 하늘 가득히 구름바다를 비추고 주유는 세상에서 조공을 깨뜨렸네”라고 적벽대전을 묘사했다. 금나라 원호문(元好問)도 “심한 번개 산을 무너뜨리니 세찬 불 솟아 깃발이 북에서 말아 올려 하늘이 붉게 타오르고”라고 했고 정윤단(鄭允端)도 “기만 가득한 영웅 오나라를 삼키려 했는데 백만 전선 한꺼번에 불타 장작이 되니”라고 했다. 이처럼 화공에 의해 조조가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묘사했다.

 

당나라 호증(胡曾)도 조조가 패한 원인이 화공에 있다고 생각했다. “세찬 불 서쪽의 위제(조조) 깃발 불태운 건 주유가 개국하여 호투를 벌일 때였네. 교전할 때 장검을 휘두를 새 없이 영웅의 백만 정병 좌절시켰네.(烈火西焚魏帝旗,周郎開國虎争時.交兵不假揮長劍,已挫英雄百万師.)” 이 시에서 보면 ‘장검’ 조차 ‘휘두르지’ 않고 전쟁의 승리를 얻게 된 것은 ‘세찬 불’ 때문이었다고 했으니 조조의 군대가 화공에 의해 대패했다고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시는 역사가 아니고 문학 작품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역사서에는 어떻게 기록돼 있을까? 『삼국지․촉서․선주전』에 “손권은 주유, 정보(鄭普) 등의 수군 수만을 보내 선주(先主)와 힘을 합쳐 조공(조조)과 적벽에서 전투를 벌여 크게 무찔렀고 그의 선박을 불살랐다”고 기록돼 있다. “선박을 불살랐다”고 했으니 화공을 했다는 뜻이다.

 

이 기록을 잠시 살펴보자. 먼저 황개(黃蓋)가 “지금 도적은 많고 우리의 수가 적으니 오래 버티기가 어렵다”고 통감하고 “조조 군함을 보니 처음과 끝이 서로 연결돼 있어 불태워 없앨 수 있다”는 묘계를 낸다. 그리고 “돌격선 수십 척을 구해 땔나무와 마른 풀을 싣고 그 가운데에 기름을 부어 막으로 싼 후 휘에 아기(牙旗)를 꽂았다. 먼저 조조에게 편지를 보내 거짓으로 투항할 뜻을 비쳤다”라고 화공을 준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욱이 “화염이 하늘 가득하니 불에 타 죽거나 익사한 인마가 매우 많았다. 결국 조조의 군대는 퇴각했다”는 결과까지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삼국지․오서․주유전』에서 조조의 군대가 화공에 의해 패했다는 것과 같은 내용으로 증거가 확실하다.

 

사마광(司馬光)의 『자치통감』이나 다른 자료들의 기록도 시인들이 묘사한 내용과 근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화공은 실재 있었던 일이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화공에 의해 조조 군대가 패퇴했다는 설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근본적 원인은 질역(疾疫)이 퍼져 병사들이 전투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바로 ‘주혈흡충(住血吸蟲)병’에 의한 것으로 결코 화공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혈흡충병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역사서의 기록에서 증거를 제시한다. 진수(陳壽)는 『삼국지․위서․무제기』에서 적벽대전 때 원래 화공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조공(조조)이 적벽에서 유비와 전투를 벌였는데 불리했다. 대역(大疫)이 번져 죽은 병사들이 많아지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에서 보면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한 것은 ‘대역’ 즉 역병에 의한 것이 분명하다.

 

『오서․오주전』에는 조조가 스스로 전선에 불을 붙이고 퇴각했다고 기록돼 있다. 게다가 교전을 벌인 주인공인 조조가 화공에 의해 패배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적벽대전 후 손권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 중에 “적벽의 일은 질병에 의한 것이요. 내가 배를 불태워 퇴각했는데 주유가 그러했다고 허명을 얻게 했구려.”(『삼국지』배주(裵注)의 『강표전(姜表戰)』인용)라고 했다. 이런 근거로 조조가 패한 근본적인 원인은 ‘질역’이지 화공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질역’이 바로 ‘주혈흡충병’이다.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주역(周易)․괘상(卦象) ‘산풍고(山風蠱)’의 증상이 기록된 의서(醫書)가 있다. 그리고 7세기 초엽의 『제병원후론』에 주혈흡충과 유사한 기록이 보인다. 이렇다면 주혈흡충은 중국 고대에 일찍부터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3년 장사(長沙) 마왕퇴(馬王堆) 1호 한묘(漢墓)에서 출토된 여인의 시신 중 장벽(腸壁)과 간장(肝臟) 조직에서 주혈흡충의 알이 발견됐다. 이는 한나라 때 장사 부근에 주혈흡충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여러 가지 조사 자료에 의거하면 호북(湖北)․호남(湖南) 지역, 즉 적벽대전과 관련 있는 지역은 바로 주혈흡충병이 유행했던 지역이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에게 감염되는 주혈흡충은 일본주혈흡충, 만손주혈흡충, 방광주혈흡충의 세 종류가 중요하다. 일본주혈흡충은 그 이름처럼 중국과 일본, 필리핀 등 아시아 지역에 분포하고, 만손주혈흡충은 원래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반도에서 유행했는데 아프리카 노예를 데려다 일을 시킨 노예무역 때문에 브라질과 베네수엘라 등 남미 대륙에서도 유행하게 됐다. 북미에도 노예들이 갔을 텐데 유행하지 않은 이유는 중간숙주인 특별한 달팽이가 없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방광주혈흡충은 나일 강 유역에서 유행하는데, 이 종은 신기하게도 방광 근처의 혈관에 살며 앞의 두 종이 간경화를 일으키는 것과 달리 방광주혈흡충은 소변에 피가 섞여 나오는 혈뇨를 일으킨다. 셋 중 증상이 가장 경미한 것 같지만 연구에 따르면 방광주혈흡충의 존재는 방광암과도 관계가 있다고 하니, 주혈흡충 중 우습게 볼 종은 하나도 없다.

 

주혈흡충은 주로 물속에 맨발로 들어갔을 때 감염된다. 주혈흡충을 예방하려면 중간 숙주인 달팽이가 사는 물을 마신다든지 그 물속에 들어가는 걸 피해야 하지만 그 물을 식수원으로 하는 사람들, 그 물에서 빨래를 하고 농사를 짓거나 목욕을 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주혈흡충 예방은 사치에 가깝다. (『생물산책』)

 

적벽대전이 벌어졌던 시기와 주혈흡충에 쉽게 감염되는 시기를 규명해 보자.
가을이 주혈흡충에 감염되기 쉬운 시기다. 마침 조조의 군대 이동시기가 가을이었다. 조조의 군사 대부분은 북방인이다. 주혈흡충이 휴행하고 있던 지역에서 수전을 준비하던 그들은 어떻게 식수를 해결했을까? 식수원은 무엇이었을까? 빨래는? 도강하기 위해 훈련을 하는 도중 관병들은 계속 발병했다. 충체가 숙주에서 1개월 이상 살면서 발육한 후에 전형적인 급성 증상이 나타난다. 겨울에 결전을 벌여야 하는데 질병이 발작을 하니 조조의 군대는 피로와 질병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의문은 남는다. 적군인 유비와 손권의 군대는 주혈흡충에 영향을 왜 받지 않았을까? 똑같이 강에서 수전을 준비하고 훈련하고 있었는데? 이 물음에 대해 유비와 손권의 군대는 대부분 남방 사람들이고 장기간 질병이 유행하는 지역에 거주하면서 면역 능력이 비교적 강했을 것이라 해석한다. 발병 증상도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이고. 반면 조조의 군대는 대부분 북방 사람들로 면역력이 비교적 약했기 때문에 산이 무너지는 것같이 갑자기 병이 오면서 패퇴할 수밖에 없었고.

 

 

 

 

그러나 이러한 주혈흡충에 의한 것이라는 설은 대부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반대자들은 조조의 군대가 수군을 훈련시킨 지역이 업(鄴)으로 지금의 하남성 안양현 경내로 그곳은 주혈흡충이 유행하는 지역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곳에서 감염될 가능성은 많지 않다는 것이 이유다. 그리고 조조가 전선을 불태우고 퇴각한 지역은 적벽이 아니고 파구(巴丘)로 조조의 군대가 퇴각한 것은 파구에 주둔할 때일 뿐 적벽대전이 벌어질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선을 불태운 것도 퇴각 후 남긴 전선을 적들이 이용할까 염려한 결과이고.

 

주혈흡충의 잠복기는 일반적으로 1개월 내외다. 온도에 따라 길고 짧음이 차이가 있다. 잠복기가 길면 길수록 발병 시 증상도 가볍다고 한다. 2개월 이상은 소수일 뿐이라고도 한다. 조조의 군대가 가을에 주혈흡충에 감염됐고 적벽대전이 발발한 12월에 발병했다면 증상은 그리 심하지 않았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조조의 병사 중 수군은 호북(湖北)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유표(劉表)의 병사들이었다. 이전에 주혈흡충의 유행 지역에 주둔하고 있어서 손권과 유비 연합군의 면역역과 별 차이가 없었다고 본다. 이외에 유장(劉璋)이 보낸 보충병들도 사천(四川) 군인으로 역시 역병 유행 지역에서 왔다.

 

이렇게 본다면 조조가 패퇴한 원인은 역병보다는 화공일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적벽대전의 결과는 화공에 있다는 전통적인 관점을 더 신뢰하고 있다. 만약 질병이 발병했다 하더라도 그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질병’이라고 기록된 병이 주혈흡충병인지도 의문이다.

 

결국 다시 꼬리를 문다. 조조 군대가 패퇴한 것은 화공일까 질병일까? 질병이라면 어떤 종류의 병일까? 그리고 단순히 화공에 의해 수군이 패했다고 대군을 이끌고 남하한 조조가 회군했을까? 아직도 많은 의문들이 남아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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