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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7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노신(魯迅)은 조조(曹操)를 “능력 있는 사람이다. 적어도 영웅이다”고 평가했다. 조조의 능력은 살아생전에 국가대사를 주물렀고 죽어서는 자신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게 해 사람들을 우둔하게 만들었으니 가히 증명된다 하겠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조는 죽기 전에 자신을 안장하기 위해 ‘72의총(疑冢)’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조조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직까지도 의문투성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조조가 낙양(洛陽)에서 임종하게 되자 아들과 심복을 불러 “아직도 천하는 안정되지 못했다. 옛날 방식의 장례식으로 나를 묻지 마라. 내가 두통을 앓아 일찍부터 두건을 썼다. 내가 죽은 후에 내가 입던 옷과 두건을 같이 묻으면 된다”고 유언했다고 한다. 이것으로 보면 조조의 인간됨은 소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문학작품이면서도 사실인양 받아들이고 있는 『삼국지연의』의 묘사를 보면 그렇지 않다. 제78회에는 조조가 병이 위중할 때를 사실인양 서술한다. 병상에 누운 조조는 시종에게 평상시 소장하고 있던 좋은 향을 가져오게 해 여러 시첩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분부한다. “내가 죽은 후 너희들은 아낙이 해야 할 일들을 부지런히 익혀야 한다. 실로 짠 신발[絲履]을 많이 만들어 시장에 내다 팔면 돈을 벌어 자급자족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첩들에게는 동작대에서 살도록 하고 날마다 제사를 지내되 여기(女伎)들을 시켜 반드시 음악을 연주하면서 상식을 올리도록 하라고 명한다. 또 유언하기를 창덕부(彰德府) 강무성(講武城) 밖에 의총 72기를 만들어 “후세 사람들이 내 무덤이 어디 있는지를 알지 못하도록 하라.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내 무덤을 파헤칠까 염려된다”고 했다. 분부를 마치고 나더니 호흡이 끊어져 죽었다는 내용이다.

 

『삼국지연의』에 나오는 내용은 기본적으로 조조의 임종 전 사실을 그대로 묘사한 것일까? 그러나 의총에 대해 사서에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증거를 찾을 수가 없다. 당시 조조의 기품이나 명성, 그가 처한 환경 등을 감안해 볼 때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삼국지ㆍ무제기』에 조조는 낙양에서 죽었는데 무덤을 높게 해 장사지냈다고 했다. 또 조조는 「유령(遺令)」에서 “업성의 서쪽 언덕 위에 장사지내되 서문표(西門約)의 사당과 가깝게 하라”고 하고 아울러 여러 비첩들에게 “때때로 동작대에 올라 서쪽에 있는 나의 능묘를 바라보라”고 일렀다고 했다. 「종령(終令)」에서도 규모는 서문표 사당의 서쪽 언덕이 수릉(壽陵)으로 그 높이를 기초로 해 북돋우지도 말고 나무도 심지 말며 묘역은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이로 하라고 했다.

 

 

 

 

당시 조조의 명성은 하늘을 찔렀다. 죽기 얼마 전에 손권이 편지를 보내 황제가 되라고 권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조조는 사치를 반대하고 항상 검소한 생활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들 조비(曹丕)가 대신들의 추대에 의해 황제의 자리를 선양받았다. 『삼국지』를 지은 진수는 「무제기찬(武帝紀贊)」에서 “밝은 계책이 가장 뛰어나고”, “비상한 사람이며, 세상의 걸출한 인물들을 능가하니”라고 칭송했다. 유비를 뛰어넘으며 제갈량보다도 위에 있었다. 그런 인물이 도굴을 막기 위해 거짓으로 만든 무덤, 즉 의총을 축조하라 했을 리 만무하다.

 

『삼국지ㆍ선주전』에는 조조와 유비가 영웅을 논한 일이 있었다. 조조는 스스로를 영웅이라고 여겼고 결코 자신을 간신이나 악명을 떨친 죄인이라 여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찌 후인들이 간신을 징벌하고 비분을 씻으려고 묘를 파헤칠 것을 두려워했겠는가?

 

문헌들을 보면 조조의 의총이란 말은 남송(南宋) 때에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장하(漳河)변에 여러 개의 큰 흙무더기가 분묘처럼 널려 있었는데 이를 보고 조조가 의총을 만들어 냈다고 이야기를 지어냈던 것이다. 『계림옥로(鷄林玉露)』에 의하면 남송의 범성대(笵成大)가 외교사절로 금나라로 갈 때 이곳을 지났는데 북쪽 사람들이 거기다 흙을 보태고 보호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것이 조조를 폄하하는 좋은 재료가 됐을 것이다.

 

이러한 의총 전설은 조조가 의심 많고 간사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사람을 속이는 간적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는데 유용하게 쓰였다. 모종강은 바로 이러한 내용을 취해 임종을 맞이한 조조에게 다시 짙고 두터운 분장을 가했다. 『삼국지연의』의 전파와 함께 의총에 대한 소문도 날이 갈수록 널리 퍼졌다.

 

그러나 또 다른 말이 전한다. 조조는 ‘72의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칠수유고․조조의총』에 “조조의 의총은 장하(漳河)에 있다. 송나라 사람 유응부(兪應符)는 시에 ‘살아서는 하늘을 기만하여 한의 통치를 끊고 죽은 후에는 사람을 속여 의총을 만들었어라. 사람이 살아서는 지혜를 쓰고 죽어서는 그쳐야 하거늘 어찌 남은 기지가 있어 능을 생각는가. 사람들은 의심스런 무덤이라 하나 나는 의심하지 않나니, 나는 방법이 있으나 그대는 모르리라. 72개 의총을 다 파면 분명 한 무덤에 그대의 시체가 있을 터.’ 나는 어린아이의 말이라 여긴다. 맹덕(孟德)이 들으며 분명 지하에서 웃으리라. 맹덕의 관이 어찌 의총에 있을까 모두 사람을 속이기 위해 지어낸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이 또한 후대의 기록일 뿐이다.

 

청나라 때 포송령(浦松齡)은 『요재지의』에서 “허성(許城, 현 하남성 허창(許昌)의 동쪽에 있다. 동한(東漢) 건안(建安) 원년, 즉 196년에 조조는 헌제(獻帝)를 데리고 이곳으로 천도했다)의 밖에 강은 용솟음치고 근처 절벽은 어두침침하다. 한여름, 사람들이 수영을 하다가 갑자기 도끼에 몸이 두 동강 나는 느낌을 받았다. 물에서 나와 다른 사람에게 물으니 그도 그렇다고 해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읍재(邑宰)가 이 말을 듣고 사람을 시켜 상류를 막고 물을 다 퍼내니 절벽 아래 동굴에 전륜이 설치돼 있었다. 전륜에는 서리같이 날카로운 칼이 안착돼 있었다. 전륜을 없애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비(碑)가 있었다. 모두 한예(漢隸)로 돼 있는데 자세히 보니 조맹덕이라 쓰여 있었다.” 이 말은 믿을 수 없다. 그러나 작가의 목적은 조조의 의총의 소재가 이미 세상에 밝혀졌다는 것을 말하고 싶음일 터이다.

 

 

 

 

위 무제 조조의 무덤 고릉(高陵)은 지표에는 흔적이 없고 현재까지도 관련 고고학 자료들이 발굴되지 않았다. 혼란기 중국 천하의 안녕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다했으나 이루지 못하여 번뇌를 벗어나지 못했기에 죽은 후에라도 지하에 편하게 잠들고 싶은 조조의 ‘교토삼굴(狡兎三窟)’의 묘책 때문일까? 조조의 인물됨으로 보면 의총을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조조가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그런데 최근에 고고학 발굴에 의해 하남성 안양(安陽)시 안양현 안풍(安豊)향 서고혈촌(西高穴村)이 조조의 묘라고 확인됐다고 했다. 몇 년 전 발굴된 후조(后赵) 시대 노잠(鲁潜)의 묘지(墓志)에 기록됐다고 한다. 중국 문물연구소에서 정식으로 발표한 내용이다. 아직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고 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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