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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7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아두(阿斗)’는 무골충이다. 나약하고 무능한 사람을 부를 때 쓴다. 유선(劉禪 : 207-271)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유선은 유비(劉備)의 아들이다. 유비가 죽자 촉한의 황위에 올라 41년을 통치했다. 삼국시대에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군왕이다. 제갈량(諸葛亮)의 보조 아래 천하를 통일한 결심을 갖기도 했으나 제갈량이 죽고 나라가 망하자 낙양(洛陽)으로 강제 이주 당한다. 사마소(司馬昭)가 “촉이 생각나시오?”라고 비웃듯 묻자 “즐거워 촉이 생각나지 않소”라고 대답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겁쟁이라는 씻지 못할 오명을 뒤집어썼다.

 

잘 알려진 대로 삼국 시대 촉한(蜀漢) 정권의 창시자 유비가 죽자 그의 아들 유선이 즉위한다. 그가 역사상 그 유명한 ‘도와 줘 봤자 소용없는 나약하고 무능한 인간’ 이 돼 버린 ‘유아두(劉阿斗. 유 씨 무뇌충)’이다. 후주(後主)라고도 불린다. 자는 공사(公嗣)이고 아명은 아두(阿斗)다. 감부인(甘夫人)의 소생으로 조운(趙雲)이 당양 장판교에서 품에 안고 달려 유비에게 데려가자 땅에 내던지며 “너 때문에 귀중한 장수를 잃을 뻔하였다”고 고함치게 만든 아기가 바로 유선이다.

 

유비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고 황후로는 장비(張飛)의 딸이 간택됐다. 재위 당시 유선의 나이가 어려 국정은 제갈량(諸葛亮)이 보필했으며 이후 234년 제갈량이 사망하자 동윤(董允), 장완(蔣琬), 비의(費禕), 강유(姜維) 등 중신들이 국정을 맡았다. 재위 후기에 환관 황호(黃皓)를 총애해 부패정치를 초래했다. 263년 위나라 등애(鄧艾)가 기습 공격해오자 촉나라는 위기에 몰리게 됐다. 아들 유심(劉諶)은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했지만 결국 위나라에 항복했다. 낙양으로 이주하여 안락공(安樂公)으로 봉해진 후 여생을 편안하게 살다 271년에 사망했다.

 

『삼국지연의』에는 아둔한 군주로 그려지며 환관을 총애해 나라를 망쳤다고 그려진다. 『삼국지․촉서』에는 “유선은 현명한 승상에게 정치를 맡겼을 때는 도리를 따르는 군주였지만 환관에 미혹됐을 때는 우매한 군주였다”, 『삼국지․위서』에는 “군주는 사치스럽게 하고 백성들의 힘을 긴급하지 않은 곳에서 고갈시켰기 때문에 진에 토벌됐다”고 기록돼 있다.

 

 

 

 

배송지(裵松之)가 『삼국지』의 주해를 달 때 유선을 ‘평범한 군주’라고 평가한 후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연의』의 문학적 과장으로 인해 유선은 ‘도와 줘도 소용없는 무뇌충’이라는 형상으로 사람들 뇌리에 박혔다. 그렇다면 역사 속의 진실은 무엇일까?

 

『삼국지․촉서․선주전』배주(裵注)에 유현덕이 유선에게 내린 조서가 기록돼 있는데 승상 제갈량이 유선을 ‘지량이 심대하다[智量甚大]’고 평가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제갈량은 결코 아부할 인물도 아니고 유비 또한 자신을 정확히 아는 군주였다. 그들이 유선을 ‘지량심대’라고 했다면 자기도 속이고 남도 속이기 위해 한 말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선입관을 버리고 사실을 보면 유선의 실체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선은 41년 동안 재위해 삼국 시대의 군주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황위에 있었던 인물이다. 전화가 끊이지 않던 난세에 그렇게 오랜 기간 재위에 앉았다는 것은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한다. 유선의 제위는 모두 제갈량의 보좌 때문이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234년 제갈량이 죽은 후 유선은 29년 동안 황제 자리에 있었다. 제갈량이 기산(祈山)으로 다섯 번이나 출병하고 강유(姜維)도 아홉 번이나 중원 정벌에 나섰는데 대군을 이끌고 위나라를 정벌했다면 군왕인 유선의 허락이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다면 유선은 유약하고 무능한 혼군이 아니고 그도 천하를 통일하려는 뜻을 가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유선이 재위 기간이 긴 것은 제갈량의 전폭적인 지지가 있었고 그가 죽은 후 장완, 비의 등 일편단심으로 충성을 다한 군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유비가 생전에 아들의 능력을 믿지 않았고 죽은 후에 걱정이 돼 제갈량에게 자식을 보좌해 주길 부탁했으며 만약 재능이 없다고 판단된다면 제갈량 자신이 황위에 오르라고 했다는 사실이 확실한 예증이라 본다. 배송지가 유선을 ‘평범한 군주’라고 평가한 것도 그 이유라 보았다.

 

 

 

 

유선 또한 무능함을 보이기도 했다. 사람을 등용함에 있어 소인을 너무 믿기도 했다. 총신 환관 황호(黃皓)가 전형적이 예이다. 황호는 온갖 수단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 했고 전력을 독점했으면서도 유선의 신임을 얻었다. 정직한 동영은 황호를 반대하다가 오랫동안 한직에 있어야 했다. 유선의 동생 유영(劉永)은 황호에게 불만을 가졌다가 외지로 10여 년간 추방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다른 예를 들어 유선이 아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유선은 현인을 등용해 끝까지 믿었다는 것이다. 제갈량, 장완, 비의, 동윤(董允) 등 현명한 재상과 어진 신하들을 시종 등용하고 끝까지 믿었다. 유선은 제갈량을 아버지인 유비보다도 더 믿고 따랐다. 유비가 ‘삼고초려(三顧草廬)’해 제갈량을 얻고는 물고기가 물을 얻은 것이라고 스스로 말했지만 임종 시에는 그를 실험대에 올려놓고 자신의 아들을 보좌해 주다가 보좌할 만한 능력이 없으면 황위에 오르라고 했다. 이것은 유비가 제갈량을 완전히 믿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제갈량이 죽자 안한(安漢) 장군 이막(李邈)이 유선에게 상서를 올린다. 여록(呂祿), 곽우(霍禹) 등처럼 공은 있으나 군주를 위협했던 신하들이 끝내 반역한 역사 속 사실을 인용하며 제갈량이 강병에 의지해 늑대처럼 황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며 모략했다. 그는 유선의 마음도 자신처럼 제갈량에 대해 의심을 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선은 상서를 읽고 대노해 곧바로 명령을 내려 이막을 처단해 버렸다.

 

중국 역사상 유선처럼 신하를 굳게 믿은 군왕은 그리 많지 않다. 이는 유선이 사람을 씀에 있어 남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사실에 대해 『삼국지집해』는 “후주의 어짊은 이와 같아 미칠 수 없다”고 평가했는데 과장이라고는 못한다.

 

조나라의 하후패(夏候覇)가 조상(曹爽)과 연루되자 촉나라로 망명했다. 그의 아버지 하후연(夏候淵)은 촉나라 장군 황충(黃忠)에 의해 피살됐다. 유선은 직접 하후패를 접견하고 “그대의 아버지는 군사에 의해 해를 당한 것이지 내 아버지 손에 의한 것이 아니다”라는 몇 마디 말로 이해를 구하고 하후패와 자신이 친척이며 깊은 관계가 있다고 말한 후 자신의 아들을 가리키며 ‘하후 씨의 생질’이라고 했다. 하후패의 사촌 여동생은 장비의 처이고 그 사이에 낳은 여식이 유선의 황후이기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유선이 하후패를 후하게 대한 것은 셈이 깊은 인물이 아니라면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후인들은 유선의 그런 행동에 대해 ‘비상하다’고 한 것이다.

 

사람을 씀에 있어 유선이 남다른 점은 또 있다. 유선은 환관 황호를 과신했다. 이런 과오는 유선의 사람을 쓰는 능력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너무 과신했던 데서 왔다고 보기도 한다. 강유가 황호를 탄핵하자 유선은 “황호는 미천한 신하일 뿐인데, 뭘 그리 마음 쓰시오?”라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황호를 과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너무 믿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나라가 망하자 유선은 위나라에 투항한다. 낙양으로 이주해 안락공(安樂公)에 봉해졌다. 한 번은 연회를 베풀었는데 사마소(司馬昭)가 유선을 위해 초나라의 가무를 공연케 했다. 유선의 시종들은 공연을 보면서 무한한 슬픔에 잠겼는데도 유선은 여전히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시덕거렸다. 사마소는 그에게 “촉나라가 생각나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유선은 “여기서 이렇듯 즐겁게 지내니 촉나라가 생각나지 않습니다”고 대답했다. 이 일은 사람들이 유선을 업신여기는 계기가 된다. 망국인이 됐으면서도 즐기는 일에만 만족을 하니 구제할 도리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욕을 해댔다. 『진한춘추』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사마소가 유선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저으며 동료들에게 “사람이 무정함이 어찌 이럴 수 있는가! 제갈량이 있다고 해도 오래도록 보좌하기 힘든데 하물며 강유야”라고 했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해서도 상반된 평가를 내리는 사람들이 있다. 유선이 그렇게 한 것은 아버지인 유비에 못지않다는 것이다. 유선이 위나라에 투항한 후 망국의 군주가 돼 더 이상 추락할 때가 없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보전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마소의 음험하고 잔악 무비한 것은 모두가 아는 것이고. 당시 사마소는 일부러 그를 시험하려고 촉나라가 생각나지 않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촉나라가 생각나지 않는다고 대답한 유선이 아둔하거나 어리석은 것이 아니라 멍청한 듯 대답함으로써 떠보는 사마소의 의도를 뛰어넘는 계책이라 봄이 더 옳다. 뛰어난 책략으로 사마의를 방심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유선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보호할 수 있었다. 유선의 이러한 행동은 사마소를 속였을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지금까지 뭇사람들을 속인 것이다.

 

물론 나라가 망할 때 황제의 자리에 있던 인물이 나라와 함께 순국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라가 망했다고 소위 국민이나 지도자라는 인물들이 투쟁이 아닌 죽음만을 생각한다면 미래가 존재할 수 있을까? 망국을 초래한 인물이라는 것을 성토할 수는 있으나 순국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 권토중래(捲土重來)는 목숨이 있어야 하지 않던가.

 

그러나 유선의 행태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는 역시 개개인의 몫이다. 단지 문학작품에 표현된 인물상만으로 역사적 인물을 판단하는 것만은 지양해야 하리라.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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