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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8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 역사상 많은 황제들은 독실하게 불교를 믿었다. 불교에 귀의한 황제와 비(妃)도 한 둘이 아니다. 가장 유명한 출가 황제는 청나라 순치(順治) 복림(福臨)이다. 중국 유일한 여황제 무측천(武則天)도 비구니로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북조(北朝) 중후기 100여 년간 제후 17명이 출궁해 비구니가 된 것처럼 중국 불교역사상 전무후무하고 기이한 현상은 없다.

 

불교는 동한(東漢) 명제(明帝) 때 낙양(洛陽)으로 전래되기 시작해 한나라 말기 조위(曹魏) 시기에 하남(河南) 지역에 초보적으로 전파됐다. 서진(西晉) 16국시기에 빠르게 전 지역으로 전파돼 흥성하게 되고 북위(北魏) 시기에 극성하게 됐다.

 

 

 

 

당시 탁발규(拓跋珪)는 외숙 모용수(慕容垂)의 도움을 받아 대국(代國)을 세우고 나중에 위(魏)라 개칭해 북위 왕조의 창시자가 됐다. 이후 외숙과 전투 중 어렵사리 우위를 점했고 또 군대를 이끌고 남하해 연조(燕趙, 현재 북경[北京], 천진[天津] 북부와 산서[山西], 하남[河南] 북부, 내몽고[内蒙古] 남부의 하북[河北] 지역을 포함한다) 지역을 공략했다.

 

연조는 중원지역으로 비교적 문화가 발달돼 있었고 풍속과 자연환경이 탁발 씨의 대막 초원과는 완전히 달랐다. 가장 탁발규를 놀라게 한 것은 기이한 구조의 건축물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기이한 옷을 입고 이상한 모자를 쓴 남녀들이 모여 듣도 보도 못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기이하게 여긴 탁발규는 건물 안에서 남녀들이 무엇을 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건물은 사찰이고 남녀들은 비구와 비구니이며 그들이 노래 부를 듯 읊는 것은 범음(梵音)이라 알려 줬다.

 

이에 탁발규는 몇 권의 불경을 얻어 읽어 봤다. 탁발규가 읽은 것이 어떤 불경인지는 역사서에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사십이장경』, 『반야도행경』, 『화엄경』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평성(平城)으로 돌아간 후 그는 불교에 대한 흥미가 더해졌다. 늘 배움을 구했으며 많은 승려들과 폭넓게 사귀었다. 태산의 산곡 속에 도제들과 함께 은거하고 있는 고승의 이야기를 듣고 사자를 보내 안부를 묻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선물도 보냈다. 이러한 예우는 이례적이다.

 

총명하고 예리한 탁발규는 불경을 읽으면서 이러한 종교는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리고 말발굽에 짓밟혀 노기충천한 초원의 백성들을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치국평천하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었고. 그래서 이듬해 불교를 숭상하는 조서를 내린다. “불법이 흥한 지가 오래됐다. 제세에 이롭고 삶과 죽음에 이를 정도로 심오하다. 신종이 궤적을 남겼으니 믿어 의지할 만하다.” 그러면서 경성에 먼저 사찰을 지어 불교도들을 거주케 했다. 같은 해에 불탑을 축조했고 강당, 선당 및 사문좌(沙門座)를 지어 사찰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췄다.

이렇게 하여 탁발규는 북위에 숭불 풍조를 일으켰다. 그가 죽자 아들 탁발사(拓跋嗣)가 즉위했다. 그는 부친의 업을 그대로 계승해 14여 년의 재위기간 동안 대대적으로 불법을 선양했다. 도성의 동서남북에 사찰을 지어 승려들로 하여금 불법을 강연하도록 해 백성들을 교화했다. 이렇게 두 명의 황제에 의해 ‘아미타불’ 독경소리는 초원에 끊이지 않고 흐르게 됐다.

 

북조의 여러 황제들이 불교를 숭상하고 사찰을 대대적으로 축조하면서 승려들이 전례 없이 늘어났다. 북위시대에 도읍 낙양에 1367개의 사찰이 있었고 강북에는 3만여 개의 사찰이 있었다. 출가 승려는 200여 만 명에 달했다. 이와 동시에 불교 사찰들이 많은 토지를 소유하게 되면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게 됐다. 승려들은 생산에 종사하지 않으면서 문벌세족 지주계층과 같은 특권을 누렸다. 그들은 세를 주거나 농민을 부려먹었고 장사를 했으며 고리대업을 하면서 백성들을 착취해 거액의 재산을 축적했다.

 

 

 

 

북조의 황제, 귀족과 세족 관료들 모두 불교를 믿었다. 천축(天竺) 승려 불도증(佛圖澄), 구마라습(鳩摩羅什)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북조의 석호(石虎)와 전진(前秦)의 부견(苻堅)에 의해 국사(國師)로 추숭됐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북위의 황제가 17명이었는데 모든 황제가 불교를 제창했고 역경, 불사 창건, 불상 조각 등을 진작했다. 예를 들어 문성제(文成帝)는 불법을 부흥시키는 조서를 내려 천하를 교화시켰다.

 

대동(大同) 운강(雲崗) 석굴은 고금무쌍의 장관을 자랑한다. 효문제(孝文帝)는 낙양의 남쪽 이궐(伊闕) 용문산(龍門山)의 단애에 6개의 감실을 나눠 불상을 조각했다. 가장 높은 불상은 130척에 달하고 산 전체에 142289의 불상을 조성했다. 조상의 기록이나 제문을 조각한 것이 3680좌에 이르고 원위(元魏) 시대에 조상 기록은 300좌, 제명은 200좌로 중국 문화유산 중 가장 진귀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선무(宣武) 경명(景明) 원년에 석굴을 건축하라는 조서를 내린 후 정광(正光) 4년 6월에 완공됐는데 동원된 인원이 802366명에 달했다.

 

문명(文明) 황태후 풍(馮) 씨, 선무 황후 고(高) 씨, 효명 황후 호(胡) 씨, 공제(恭帝) 황후 약간(若干) 씨, 서위 문황후 을불(乙佛) 씨가 장안에서 출가했다. 선무 영화우 호 씨는 대놓고 불법에 귀의한다고 해 비구니가 됐다. 당시 낙양에는 서역의 승려가 3000명이 넘었다. 선무제가 영명사(永明寺)를 세웠는데 그곳에 외국 승려가 많을 때는 3000여 명이나 거주했다. 당시 문인, 학사들도 불교를 숭상하면서 사찰의 승려가 급속이 증가하는데 일조했다. 이러한 배경 아래 북조 17황후가 출궁해 비구니가 된 것은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닐 터이다.

 

 

 

 

연구가 조문계(曹文桂)는 관련 사료를 살핀 후 북조 17황후가 비구니가 된 원인은 다양하지만 다섯 부류로 귀결시킬 수 있다고 했다. 첫째, 건강상의 이유다. 사찰의 환경이 질병을 앓고 있는 황후의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둘째, 어떤 황후는 황제의 총애를 잃고 출궁해 비구니가 됐다. 셋째, 황후의 자리를 빼앗기거나 황제가 바뀌어 서인으로 전락한 경우다. 제후의 자리를 빼앗긴 후 갈 곳이라고는 사찰보다 더 좋은 곳은 없었다. 넷째, 어린 황제가 등극한 후 정쟁에서 실패한 제후가 비구니가 됐다. 다섯째, 정치적 피난처로 삼은 경우다.

 

북조 중후기 사찰 세력은 통치자들의 육성 아래 급속히 발전했다. 승려의 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사찰도 전국에 세워졌다. 그중 적지 않은 사찰은 최고 통치자들이 출자해 세웠기 때문에 황제의 사찰은 지극히 화려했다. 가장 많은 제후가 비구니가 된 사찰인 요광사(瑤光寺)는 시봉하는 궁녀들이 머물렀다. 이렇게 본다면 이름만 사찰이지 실제로는 제후들이 유람하며 거처하는 별궁이나 다름없었다. 쫓겨난 제후들은 존귀하다는 명예만 잃었을 뿐 물질적 생활은 궁정에서 생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북조의 제후들은 비구니가 되는 것이 황궁에서 고통스럽게 사는 것보다 좋았기 때문에 선택했다고 볼 수밖에.

 

그렇다. 명예도 없이 쓸쓸히 황궁에서 사느니 아무런 정신적 압박도 없고 물질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비구니가 더 좋았을 것이다. 불법 때문만은 아니다. 당시 중국 북방 전체가 불국토를 이루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현세의 권력을 독차지하고 누리는 방편이 돼 버렸으니. 어찌 불법을 논하랴. 만약 후생이 있다면, 그들은 과연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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