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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8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도연명(陶淵明 : 365-427)의 자는 원량(元亮), 이름은 잠(潛)이다.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어 놓고 오류(五柳)선생이라 칭하기도 했다. 강서성(江西省) 구강현(九江縣)의 남서 시상(柴桑) 사람이다. 29세 때에 벼슬길에 올라 주(州)의 좨주(祭酒)가 됐지만 얼마 안 가서 사임했다. 항상 전원생활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달래지 못한 그는 41세 때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삼아 팽택현(彭澤縣)의 현령 직을 사임한 후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쓰고 향리의 전원으로 퇴거했다. 스스로 괭이를 들고 농경생활을 영위해 가난과 병의 괴로움을 당하면서도 62세에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것처럼 생애를 마쳤다. 후에 그의 시호를 정절선생(靖節先生)이라 칭했다.

 

 

 

 

“진(晉)나라 태원(太元) 연간, 무릉(武陵)이란 곳에 고기잡이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있었다. 하루는 작은 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갔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복숭아나무 숲에 들어서게 됐다. 숲은 강의 양쪽 기슭 안쪽으로 수백 걸음에 걸쳐 이어져 있었고 잡목 하나 없었다. 향기로운 풀이 싱싱하고 아름다웠으며 떨어지는 꽃잎이 어지러이 나부끼고 있었다. 어부는 무척 기이하게 여겨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숲의 끝까지 가보고자 했다.

 

숲이 끝나는 곳은 강의 발원지였다. 그곳에 산이 하나 있었다. 산에는 작은 동굴이 있는데 무슨 빛이 새어나오는 것 같았다. 곧 배를 버려두고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무척 좁아 사람 한 명이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수십 걸음을 더 나아가니 갑자기 환하게 탁 트이며 시야가 넓어졌다. 땅은 평탄하고 넓고 가옥들은 가지런하게 지어져 있었다. 비옥한 밭, 아름다운 연못, 그리고 뽕나무와 대나무 같은 것들이 있었다. 남북과 동서로 난 밭두렁 길은 서로 교차하며 이어져 있었다. 개 짖는 소리와 닭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 안에서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며 씨를 뿌리고 농사짓고 있는데, 남녀가 입고 있는 옷이 모두 외지인이 입는 것과 같았다. 머리가 누렇게 변한 노인과 더벅머리를 한 어린아이가 함께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 유명한 『도화원기』의 앞 구절이다. 도연명은 아름다운 문체로 세상과 떨어진 이상사회를 그려냈다. 아름다운 환경과 질박한 풍속, 더불어 사는 사람들이 서로 아끼며 먹고 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회였다. 이는 세속과는 전혀 다른 사회였다. 자연과 더불어 친밀하게 살아가는 자유스런 사회였다. 모든 사람이 평등했다. 장유와 남녀의 유별은 있었으나 빈부귀천이 없었으며 전란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강도나 도적이 있을 리 만무한 사회였다. 당연히 군왕의 통치도 없었고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도 없었다. 계급도 없었으며 착취도 없었다. 억압이 전혀 없는 자유스러운 낙토였다.

 

이렇게 묘사된 자유스럽고 안락한 ‘도화원(桃花源)’은 많은 사람들이 동경하는 대상이 됐다. 문장 속에 있는 것처럼 그 이야기를 듣고 직접 찾아 나선 사람들이 많지만 아무 결과도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1천여 년 동안 도화원은 존재하지 않은 유토피아라고 비난을 받았다. 도와원은 정말 허구일까? 아니면 실재하는 원형이 존재할까?

 

 

 

 

어떤 사람들은 호남(湖南) 도원(桃源)현 서남쪽 15킬로미터 떨어진 수계(水溪)가 도연명의 작품 속 도화원이라고 한다. 원수(沅水) 인근에 푸른 산이 펼쳐져 있고 경치가 아름답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경관에 의해 도연명이 묘사한 도화원과 같다. 당대(唐代)에 벌써 그곳을 본래의 도화원이라고 여겨 불교 사원과 도교 도관을 세웠다. 송대(宋代)에는 어부가 신선을 만나는 ‘연청루(延請樓)’를 세웠다. 청대(淸代) 광서(光緖) 18년 ‘도화관(桃花觀)’, ‘집현사(集賢祠)’, ‘섭풍정(躡風亭)’, ‘탐월정(探月亭)’, ‘수원정(水源亭)’, ‘남선주(纜船洲)’ 등을 세웠다. 이처럼 수계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도화원의 원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자제(劉自齊)는 “『도화원기』에 묘사된 억압이 없고 착취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노동을 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아름다운 사회는 결코 작가가 근거 없이 지어낸 허구도 아니며 환상의 재창조도 아닌 당시 무릉(武陵)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묘족(苗族) 사회를 실제적으로 기록한 것이다”라고 했다. 현지의 역사 자료에 근거하면 진(晉)나라 때 무릉 지역의 묘족은 계급사회에 진입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세외선경(世外仙境)과 같은 묘족사회를 ‘기이한 일’로 여겨져 전파됐을 가능성이 있다.

 

도연명이 들은 바를 묘사해 천고의 명문장으로 남긴 것 이외에도 동진(東晋) 문인 유경숙(劉敬叔)도 『이원(異苑)』에서 “원가(元嘉)초 무릉 야만인이 사슴을 사냥하다 동굴 속으로 쫓아들어 갔는데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을 뿐이었다. 동굴로 들어가자 옆에 사다리가 놓여 있어 위로 올라가니 갑자기 확 트이고 뽕나무 열매가 가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도 ‘도화원’이다. 다른 점은 어부와 사냥꾼이란 것뿐이다. 이와 같은 세외 낙원은 도연명이 ‘귀거래’하기 전부터 이미 널리 알려졌을 가능성이 많다. 도연명이 도화원에 들어간 상황을 묘사한 부분을 봐도 묘족사회의 특성과 합치된다. 무릉 지역 묘족들은 원래 복숭아나무를 숭배하고 손님을 보면 “집으로 데리고 가 술을 내놓고 닭을 잡아 대접하는” 풍속과 닮았다. 도연명이 묘사한 도화원이 무릉 지역의 묘족 사회일 가능성이 크다.

 

이외에 도화원의 ‘원산지’일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 몇몇이 있다. 고대에 해주(海州) 즉 현재의 연운항(連雲港, 강소성)시의 숙성(宿城)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쪽은 바다에 접해있다. 호구령(虎口嶺)을 넘지 않으면 외지와 통하는 길이 없다. 이처럼 ‘동해 모퉁이’에 있기에 천연적인 성벽이 둘러져 있고 중간에 넓고 아름다운 평원이 펼쳐져 있다. 동쪽으로 인접한 바다에는 연산이 누워있어 큰 배를 닮았다고 선산(船山)이라 불린다. 산기슭이 돌아가는 곳에 넓힌 돌길이 굽이굽이 고공도(高公島)와 잇닿아 있다. 실재 도연명은 그곳에 간 적이 있었다. 그의 유명한 『음주시』에 “지난날 일찍이 멀리 간적도 있었네(在昔曾遠遊), 곧바로 동해 모퉁이에 이르렀었지(直至東海隅)”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해주는 당시 동해군에 소속돼 있었다. 자연을 즐긴 도연명이 그곳이 세외 선경이라 듣고 기쁜 마음에 한걸음에 가본 것은 아닐까.

 

청나라 말기 스스로 도연명의 후예라 칭한 도주(陶澍)는 도연명을 연구한 전문가이다. 『도정절선생연보고이』를 편찬했고 직접 도광(道光) 황제에게 고공도, 숙성 일대의 평화로운 경치를 강술했다. 이에 도광제도 “그 경치가 도화원과 무엇이 다른가?”라고 하자 도주는 숙성 법기사(法起寺) 옆에 ‘진진군참군도정절선생(晉鎭軍參軍陶靖節先生)사당’을 건축하고 『오류선생전』의 문장을 근거로 도연명의 생가를 모방해 문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복숭아도 심었다.

 

시인의 뛰어난 필체로 그려진 세외 도원을 찾기 위해 후세 사람들은 고심했다. 그러나 도화원의 원형이 도대체 어디인가 하는 문제는 어쩌면 도연명 자신만 알 뿐. 천년을 이어온 아름다운 시 속에서 우리는 도연명이 구속을 싫어하고 자유를 갈구하는 정신을 읽어낼 수 있다.

 

인생은 아름답다. 그러면서도 현실에는 괴로움이 존재한다. 천제가 살고 있는 땅이나 선경은 허구이며 환상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내세의 행복도 그리 기대할 것이 못된다. 아름다운 생활을 향유하고 고난의 현실을 피하기 위해 환상 중 해탈을 구할 수밖에 없지 않던가. 이런 이상과 현실의 대비는 도연명이 창작한 이유였을 것이고.

 

 

 

 

도연명은 일생 동안 다섯 번 벼슬했고 다섯 번 귀향했다. 첫 번째 출사 후 퇴출됐을 때 6년 동안 은거생활을 했으면서 무슨 까닭에 2번, 3번 벼슬을 하고 4번, 5번 정치에 참여했었을까? 이는 생존에 대한 고려와 정치적 추구 등에 원인이 있다. 도연명은 처음 귀농한 나이가 29살이었고 2번째 벼슬에 오른 나이가 35살이었다. 연령을 보면 인생 경험이 쌓이는 나이이면서 생존에 대한 부담이 가중되는 시기였다. 현실에 대한 고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벼슬에 나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추구와 사회에 봉사한다는 희망도 잃지 않을 시기이기도 하고.

 

여러 가지 원인으로 한 번 또 한 번 벼슬에 나가 자기의 뜻을 펴려 노력했다. 그러나 도연명은 끝내 정치에 사회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의 뜻을 중시하고 검소한 생활”을 선택해 자아의 개성과 독립된 인격을 추구하기로 결정한다. 가난과 빈곤, 심지어 굶주림과 추위에 허덕이더라도 참고 견디어 나가는 삶을 택했다.

 

벼슬과 은거의 충돌 속에서, 양단을 오가는 마음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애쓰는 도연명이 보이는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젊은 날의 도연명, 생존과 존엄의 갈림길에서 괴로워하는 도연명. 마침내 경제적 삶보다 정신적 삶을 찾아 자신만의 세계를 개척했던 인물. 우리는 그에게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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