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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9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수(隋) 문제(文帝 541-604) 양견(楊堅)은 수 왕조를 건립했다. 581년에서 604년 재위했던 홍농(弘農) 화음(華陰, 현 섬서[陝西]) 출신이다. 북주(北周) 시기에 재상을 역임했고 대정(大定) 원년(581)에 정제(靜帝)를 폐하고 황위에 올랐다. 개황(開皇) 7년 후양(後梁)을 멸하고 이듬해 진(陳)을 멸망시켜 남북조 대립 국면을 끝내고 중국을 재통일했다. 재위 시 농경을 제창하고 관제를 고쳐 나라가 흥성했다. 인수(仁壽) 4년(604)에 죽었다. 태자 양광(楊廣)에 의해 피살됐다고 하기도 한다.

 

“아내를 두려워한다”는 말은 현대인들이 농담을 할 때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남자들이 자기 부인을 두려워하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중국 봉건통치 시기가 부권 위주의 시기였기에 여인들은 가정에서 이렇다 할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중국어에 ‘嫁鸡随鸡,嫁狗随狗(가계수계,가구수구)’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닭에게 시집가면 닭을 따르고 개에게 시집가면 개를 따른다는 말이다. 이 말처럼 여자는 출가 후에 싫든 좋든 일생토록 남편을 따라야 했다. 당시 남자는 한 집안의 주인으로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해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아내를 두려워하는’ 남편은 많지 않았다.

 

수문제 양견은 수나라를 세운 개국 황제다. 고대의 천자는 지고무상의 위엄을 지녔었다. 손 한 번만 휘두르면 천군만마를 불러 올 수 있고 발을 구르면 천하가 벌벌 떨었다. 그런 황제가 닭 한 마리 붙들어 맬 힘도 없는 여자를 두려워했다고 한다. 이해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수문제 양견은 환관 집안 출신이다. 그 부친은 동한(東漢) 태위(太威)였다. 그는 14살 때부터 관리가 돼 산기상시(散騎常侍), 거기(車騎)대장군 등의 직을 맡았고 나중에 당시의 집정자 우문태(宇文泰)의 눈에 들어 표기(驃騎)대장군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19세 때에는 수주자사(隋州刺史)가 됐다. 젊었을 때부터 기세가 남달랐고 재주가 비범했다.

 

수문제는 용모가 출중하고 위엄이 넘쳤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 공적도 뛰어났다. 그래서 선비족의 대귀족인 주국(柱國)대장군 독고신(獨孤信)의 눈에 들었다. 독고신은 혼란의 시대에 양견이 두각을 나타낼 것이라고 판단하고 자신의 14세 여식 독고 씨를 양견에게 시집보냈다. 이것이 양견 일생의 전환점이며 기회가 됐다. 독고신은 조정 중신이었고 그의 큰 딸은 주(周) 명제(明帝)의 황후였다. 양견이 독고 일가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레 많은 혜택을 입게 됐다. 몇 년 되지 않은 기간에 양견은 수국공(隋國公)의 작위를 받았고 나중에 주국(柱國)에 봉해지면서 정치의 앞날에 탄탄대로가 열렸다.

 

양견이 황제에 의해 중용되면 될수록 그의 정치적 재능도 발휘됐다. 그의 부인 독고 씨도 활약했다. 독고 씨는 성격이 내성적이었다. 그러나 소양이 남달랐다. 고관 집안 출신이라 정치적 식견도 갖추고 있었다. 양견이 퇴청할 때마다 부인과 군신의 구체적 행위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독고 씨는 매번 정확하게 분석했고 합당한 건의를 했다. 그럴수록 양견은 부인의 안목과 식견에 탄복하게 됐다.

 

나중에 독고 씨가 딸 혼사를 주관하면서 주(周) 무제의 아들 우문윤(宇文贇)에게 시집을 보냈다. 당시 양견은 여식의 혼사에 불만이 있었다. 딸이 사위보다 나이가 많았고 사위의 성정이 여려 매일 꽃이나 보고 공부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러자 독고 씨는 “우문윤의 몸에는 황실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이면 충분합니다.” 한 마디로 일축하고 혼인을 결정을 해버렸다. 나중에 독고 씨의 선택이 뛰어났다는 것이 증명됐다. 무제가 죽자 우문윤이 황위에 올라 선제(宣帝)가 됐다. 양견의 딸이 황후가 된 것은 당연했다. 양견이 이것을 기회로 대사마(大司馬)가 된 후 대전의(大前疑, 승상과 비슷한 직위)까지 올라 황제가 외출할 때 일상의 정무를 담당했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오른 양견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주 선제가 매일 가무와 여색에 빠져 정사를 소홀히 하자 황실 종친들은 군대를 키워나갔다. 양견 부부는 혼란의 시기가 도래할 것임을 예감했다. 선제가 강산을 유지할 힘이 없고 자신들을 지킬 힘도 없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그래서 결당(結黨)하여 힘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방향이 결정되자 독고 씨는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오늘은 동쪽 집에 가서 일상사를 얘기하고 내일은 서쪽 집에 가서 결혼을 축하하면서 착실한 관계를 맺었다. 오래지 않아 능력이 있고 재능이 있는 대신들이 양견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나중의 일은 더욱 간단하게 풀렸다. 선제가 무절제하게 성욕을 탐하다 일찍이 세상을 떴다. 그를 이어 즉위한 황제는 너무 어려 양견이 보조대신(輔助大臣)에 오른 후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앉고 국호를 수(隋)라 했다. 장안을 수도로 정하니 그때 그의 나이가 40세였다.

 

수문제가 황제라 칭한 것은 세습한 것도 아니요 전쟁으로 얻어진 것도 아니었다. 정치적으로 차례차례 승진한 후 마지막에 패거리 도당을 만들어 뺏어온 것이다. 이런 까닭에 문제는 독고 씨의 일거수일투족이 전체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알고 자신의 황후를 존중했다. 수문제가 황위에 오르자 독고 씨에게 진정어린 마음으로 “수 왕조의 건립은 전쟁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지만 황후가 심혈을 쏟은 결과요. 짐은 일생 동안 당신을 존중할 것이요. 다시는 다른 여인을 가까이 하지 않으리다.”라고 맹세했다. 매일 조정에 나갈 때 수문제는 독고 씨와 함께 수레를 타고 대전 문 앞에 다다른 후 독고 씨가 눈으로 전송하면 입전했다. 이는 중국 역사상 흔하지 않은 황제와 황후의 모습이다. 사람들을 이를 ‘이성(二聖)’이라는 미담으로 전하고 있다.

 

 

 

 

수 왕조가 건국 초기의 혼란상을 정리하고 안정되기 시작할 때 독고 씨가 늙어 피부가 쭈글쭈글해지고 몸도 뚱뚱해지자 두 부부의 감정이 이전처럼 그렇게 좋지 않았다. 독고 씨는 궁에 있는 거울을 부셔버렸다. 다시는 거울을 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할 정도였다. 사실 중국 역대 제왕 중 수문제는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은 드문 황제였다. 5명의 아들을 얻었는데 모두 황후 독고 씨의 소생이었다. 궁궐의 빈과 비는 모두 황가의 기세를 드러내기 위해 있었던 것으로 수문제는 별로 가까이 하지 않았다. 독고 씨는 매일매일 문제의 귀가에 대고 “황상은 역사상 가장 정무에 전념한 위대한 군주가 될 것입니다. 절대 몇몇 여자들 때문에 명예를 더럽히지 마소서.”라고 훈계했다.

 

그러나 수문제도 사람이었다. 혈기왕성한 장년의 남자가 궁중의 수많은 아리따운 여자를 앞에 두고 어찌 못 본 채 할 것이며 마음에 전혀 담아두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막 황제에 올랐을 때에는 정무가 너무 많아 돌볼 겨를이 없었고 나중에는 독고 씨의 마음을 상하게 할까봐 가까이 하지 않았던 것이다. 황후를 존중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심리가 문제를 부정하지 못하게 했을 수도 있고. 그러나 의외의 일이 발생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운 것은 당연했다.

 

어느 날 수문제가 술을 마신 후 잠시 쉬고 있을 때 위지형(尉遲逈)의 손녀를 만났다. 이팔청춘의 아름다운 위지 씨가 가는 허리에 흔들흔들 걸으니, 그 고운 자태에 수문제는 마음이 흔들렸다. 그리고 위지 씨를 껴안고 운우지정을 나누게 됐다. 일이 끝나고 수문제는 위지 씨의 간실간실하고 예쁜 모습을 보며 자신이 독고 씨와 지냈던 몇 십 년 생활이 얼마나 무미건조했는지를 느끼게 됐다.

 

독고 씨는 줄곧 공신으로 살아오면서 수문제 앞에서 여태 잘못한 것 없이 지내오기는 했으되 나이가 드니 수문제의 가슴을 뛰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런 것임에. 수문제는 마음속으로 궁중의 미색을 두루 섭렵하려 결심했다. 그런데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운우의 정을 나누면 나눌수록 상대의 질투가 하늘을 찔렀다는 것을. 수문제가 조회할 때 독고 씨가 사람을 보내 위지 씨를 때려 죽여 버렸다! 수 문제가 그 소식을 듣고 스스로 ‘규율’을 벗어났다는 것을 알고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상한 것은 수 문제가 다른 빈이나 비와 지낼 때 다정하고 친밀하게 대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위지 씨처럼 될까 두려웠을 터이다.

 

 

 

 

수문제도 사람인데 화가 나지 않겠는가. 그러나 마음속으로 화를 삼킬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일반 백성보다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일반 백성들은 능력에 따라 처도 첩도 둘 셋을 두지 않던가. 자신은 당당한 일국의 군주임에도 불구하고 독고 씨만을 가까이 해야 한다니, 언제까지 한 여자만 고수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지만 다른 행동을 감히 하지 못했다. 수문제의 후궁에는 경국지색인 선화부인(宣華夫人)이 있었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그 선화부인은 “물고기가 보고 물속으로 숨고 기러기가 보고 모래톱에 내려앉을[沉魚落雁]” 정도로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다고 한다. 그런데 수문제는 독고 씨가 죽은 후에서야 그녀를 가까이 할 수 있었다. 실로 부인에 대한 ‘두려움’이 깊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애정이란 일면만 본 것이다. 수문제는 국가 정무를 처리하면서 대신을 임용하고 관리에게 상벌을 내릴 때 모두 독고 씨와 상의했다. 독고 씨도 질투심이 강하기는 했지만 수문제를 보좌하여 정무를 처리할 때에는 공정하고 명철했다. 이것이 수문제가 독고 씨를 벗어나지 못한 중요한 이유였다.

 

수문제는 중국 역사상 부인을 어쩔 수 없어 그저 ‘두려워’한 군주라는 이름을 남겼지만 독고 씨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찌 천하의 주인이 됐을 것이며 강산을 평온하게 할 수 있었겠는가? 역사에 이름을 남긴 족적은 역시 부인 독고 씨의 도움으로 가능했던 것이었음에. 조강지처를 존중하고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었을 터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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