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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9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수(隋) 양제(煬帝 569-618) 양광(楊廣), 수문제의 아들로 12년 동안 재위했다. 즉위 후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켰다. 궁전을 건축했으며 운하를 파고 황제의 전용도로를 건설했다. 모든 공정에 인력과 물자를 너무 많이 소모해 국운이 점차 쇠했다. 도처에서 봉기해 결국 수 왕조는 멸망한다. 그는 강도(江都)에서 금군(禁軍)장군 우문화급(宇文化及)에 의해 목 졸려 죽었다. 일설에는 부친 수문제를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고 하기도 한다.

 

수나라는 단명한 왕조다. 2세까지 전후 37년밖에 되지 않았고 문제나 양제 모두 비명횡사했다. 그래서 능묘의 규모에 있어 진한(秦漢) 능묘처럼 웅장하지도 않고 한당(漢唐)의 황릉처럼 그리 장관도 아니다. 그리고 수양제의 능묘도 수양제를 안장한 묘지가 아니다. 그가 난세에 죽었기 때문에 몸과 머리가 다른 곳에 묻혔다. 현재의 능묘는 후세에 만든 것으로 황음무도했던 양무제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수양제는 대단한 폭군이었다. 그는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는 데에만 눈독을 들였다. 성격이 잔혹하고 주변 나라들에 자신을 과시하는 데에 힘을 쏟아 주변 민족들에게 부귀만을 자랑했다. 수양제의 추악함과 폭정은 일일이 나열할 수 없을 정도다.

 

 

 

 

수양제 양광은 수문제 양견의 둘째 아들이다. 수문제의 다섯 아들 중 제구실을 가장 못한 아들이었다. 어떤 학자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수문제가 절약과 검소로 이름을 떨쳤다면 그의 계승자인 수양제는 무절제하게 낭비한 것으로 이름을 남겼다고. 문제는 재부를 쌓았지만 양제는 패륜아이며 방탕아였다. 수문제는 겸허하게 충언을 받아들였지만 수양제는 자신만이 뛰어나다고 여겼다. 문제는 민심을 살폈으나 양제는 살인을 밥 먹듯이 한 마왕이었다. 이렇게 하여 수양제는 중국 역사상 걸(桀), 주(紂)와 함께 폭군의 대명사가 됐다. 황제에 오르자마자 부도(父道)를 위배한다. 수문제가 애써 모아놓은 재부를 남김없이 소모해 마침내 자신의 강산을 끝내버렸다.

 

수양제는 수문제의 둘째 아들로 원래 태자는 양견의 큰아들 양용(楊勇)이었다. 그러나 양광은 어릴 적부터 지략이 뛰어났고 준수해 양견과 고독(孤獨) 황후의 사람을 받았다. 양광은 원래부터 찬위할 마음을 품고 있었다. 품행이 교활하고 말재주도 좋았다. 부황과 태자의 사이를 갈라놓는데 혈안이 됐고 부황의 신임을 얻는데 전력했다. 마침내 수문제는 태자 양용을 폐위시키고 양광을 태자에 앉혔다.

 

나중에 양견이 병석에 눕자 태자 양광은 기다릴 수 없어 양소(楊素)에게 편지를 보내 즉위하는데 도움을 달라고 했다. 그러나 편지 내용이 수문제에게 알려져 버렸다. 그리고 수문제는 양광이 궁에서 그의 애첩 선화부인을 겁탈하려 했었다는 것을 듣게 된다. 그래서 수문제는 즉시 태자 양광을 폐위시키고 장자 양용을 불러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양광이 추악한 일이 밖으로 알려질까 두려워 604년 수문제가 와병을 기화로 근신(近臣)에게 밀령을 내려 부황을 암살했다. 양광이 일거양득을 노린 것이다. 찬위의 목적도 이루고 추문도 엄폐하고. 나중에 친형 양용을 주살하고 황제에 올랐다.

 

수양제는 즉위하자마자 아버지 수문제가 걸어온 길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자신이 천부적인 자질이 있다고 맹신하고 지고무상의 황권을 등에 업고 무소불위의 폭정을 자행한다. 그렇게 중국 역사상 찾아보기 드문 독재자요 방탕아이며 폭군으로 남았다. “찬하의 골수를 빼앗고 천하의 자녀를 흩어지게 만들어 나 일인의 음욕을 채우려 한다.”는 폭군의 사상을 지녔다. 그런 생각 아래 그는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일으켰고 해마다 출유(出遊)했다. 그리고 과중한 노역과 병역을 백성들에게 씌웠다.

 

 

 

 

수양제가 즉위한 이듬해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백성 몇 십만을 동원해 낙양에 궁궐을 증축하고 요새를 세웠다. 동시에 관리들에게 장강이남, 오령(五嶺)이북에 기이한 석재, 기화이초(奇花異草), 진귀한 조수(鳥獸)를 수집해 낙양으로 운송하고 각 원원(園苑)에 채워 넣었다. 또 낙양 서쪽에 둘레가 200여 리가 되는 서원(西苑)을 세웠다. 그 동산에는 둘레가 10여 리가 되는 바다처럼 넓은 호수를 만들었다. 호수 가운데는 수면에서 높이 100여 척이 넘는 삼신산을 만들고 그곳에 전각들을 세웠다.

 

호수 북쪽에는 용린거(龍麟渠)를 건설해 호수 안으로 물이 구불구불 흘러들게 만들었다. 수로에는 16원(院)을 세우고 원에는 여러 후궁들을 각각 거주하게 했다. 16원의 후궁들은 온갖 방법을 동원해 수양제가 자신들에게 오기를 바랐다. 수양제가 거느린 미인들이 너무 많아 매일 밤을 바쁘게 움직여도 모두 다 품을 수 없었다. 결국 추첨 방식으로 선별했다고 한다. 16원에 거주하는 후궁들은 황제와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갖은 계략을 썼으며 쾌락을 줄 수 있는 음란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 음욕을 채워 주었다.

 

그리고 수양제가 달 밝은 밤에 궁녀 수천 명을 말에 태워 데리고 야유하기를 즐겼다. 등불도 켜지 않고 『청야유곡(淸夜游曲)』을 연주하게 하여 연주와 노래로 밤을 새웠다. 이외에 그는 수로들을 연결하도록 명했다. 장안에서 강도(江都)까지 수로를 따라 40여 곳에 이궁(離宮)을 세우도록 했다. 그중 강도의 궁이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운하가 개통된 후 그는 길이 수십 장(丈), 높이와 넓이가 수 장에 이르는 용주(龍舟)를 타고 세 번이나 강도로 출유했다. 각종 수행선대가 200여 리 이어졌고 수로를 따라 산해진미와 진귀한 보물들을 진공케 했다. 그렇게 선대에 쌓은 재화를 소모시켰다. 이와 동시에 국외에 명성과 위엄을 드높이려 했고 수나라의 부유함을 자랑하려 했다. 세 차례나 고구려를 침략해 수나라의 무력이 강하다는 것을 과시하려 하기도 했고.

 

수양제는 다른 사람의 권고를 전혀 따르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을 했다. 그는 스스로 재능이 특출하다고 생각했다. 천부적인 자질이 갖추고 있다고 여겼다. 한 번은 시흥이 일어 “내 꿈에 강남이 좋다는 걸 보았고 동쪽을 정벌함도 우연임에. 모습만 남아있으면 될 일, 이별은 올해뿐이니.”라는 시를 지었다. 무슨 뜻인가? 꿈에 강남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게 되자 강남까지 수로를 뚫었고 불연 듯 고구려를 침략할 생각이 있어 천군만마를 동원하여 동쪽으로 진군했다는 말이다. 그냥 ‘꿈’에 봤고 ‘우연히’ 생각이 났기 때문에 자신이 그렇게 행동했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권해도 그는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간언하는 사람은 죽여 버렸다.

 

수양제는 비서 우세남(虞世南)에게 “나는 천성이 간언을 싫어한다. 신하가 간언으로 이름을 얻고자 한다면 나는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비천한 선비는 용서할 수 있다. 결코 두각을 나타내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간언을 하여 주살된 충신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농민봉기가 일어난 날 수양제는 강도로 출유하려 했다. 많은 대신들이 형세가 불리하니 하루도 군왕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간언했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건절(建節) 위임종(威任宗)이 상소를 올려 간언했으나 수양제는 당일 조당에서 장살해 버렸다. 출발할 때 봉신랑(奉信郞) 최민상(崔民象)이 표를 올려 만류하자 수양제는 대노하여 얼굴을 절제한 후 참수해 버렸다. 사수(汜水)에 다다르자 다른 봉신랑 왕애인(王愛仁)이 표를 올려 환도하기를 간청했으나 수양제는 왕애인을 죽이고 계속 남행했다. 양도(梁都)에 이르자 길을 막고 상소를 올려 “당신이 정말 강도로 간다면 강산을 더 이상 당신 것이 될 수 없다.”고 하자 그를 현장에서 주살했다. 역사상 독단을 부려 전횡을 일삼은 것으로 수양제는 유명하다. 자신만을 믿고 간언을 듣지 않았으며 잔인하게 옳은 신하를 죽이면서 멸망에 이르더라도 자신의 독단의 고질을 고치지 않았다.

 

 

 

 

수나라 말기 양제의 폭정으로 농민들의 부담이 과중하여 노역과 병역을 피해 고향을 등진 이가 부지기수였다. 백성들이 스스로 팔 다리를 끊으며 자해하고는 ‘복수복족(福手福足)’이라 부를 정도였다. 잔혹한 폭정은 끝내 농민봉기의 도화선이 됐다.

 

농민군이 대대적으로 공세를 펼칠 때, 우둔위(右屯衛) 장군 우문화급이 양주(揚州)의 군량이 고갈되자 위사(衛士)를 향리로 식량을 구하라고 보내고 그 틈을 이용해 대업(大業) 14년(618년) 3월 수 만을 선동, 강도궁(江都宮)으로 진군했다. 수양제는 의복을 바꿔 입고 황급히 도망쳤다. 지난날의 흉포함도 위세도 모두 사라졌다. 현무문(玄武門) 부근까지 도망갔을 때 결국 반란군에게 생포됐다. 그는 자신이 살아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난도질당하고 몸과 머리가 분리돼 어디로 떨어질지 걱정됐다. 스스로 목을 매 자살했다. 그때 나이 50이었다.

 

당(唐)이 들어서고 강남이 평정된 후 정부는 수양제를 뇌당(雷塘)에 안장했다. 그러나 그 능묘는 황릉의 위세를 찾아볼 수 없다. 사서에 “능의 높이는 6.7척이고 둘레가 2, 3무(畝)이다.”라고 기록돼 있다. 가무와 주연, 미녀 속에서 강산을 절단 낸 수양제에게는 그러한 묘혈도 과분한 것일 수도 있고.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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