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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9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당(唐) 고조(高祖 : 566-635) 이연(李淵)은 당 왕조의 건립자다. 귀족 출신으로 당국공(唐國公)을 세습 받아 수(隋)나라 말기에 기병해 장안을 빼앗고 618년 당나라를 건립했다. 재위 기간에 아들들 사이에 황위를 다투다 현무문(玄武門) 사변 이후 퇴위했다. 황위를 둘째 아들 이세민(李世民)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태상황(太上皇)이 됐다. 둘째 아들 이세민이 바로 중국인들이 현명한 군주 중 한 명으로 추숭하는 당태종(唐太宗)이다.

 

617년(수隋 대업大業 13년) 고대 병가의 요충지 진양성(晉陽城)에서 수나라에 대항하는 전쟁이 벌어졌다. 이연, 이세민 부자는 병사들을 이끌고 수 왕조를 무너뜨렸는데 이것이 중국 역사상 유명한 ‘진양기병(晉陽起兵)’이다. 수나라가 멸망하고 당나라가 흥기하는 과정 중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역사서에 기록돼 있다. 그런데 ‘진양기병’의 주모자가 누구인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누구는 고조 이연이 주동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이연의 아들 태종 이세민이라고 하기도 한다. 당나라 초기부터 쟁론이 끊이지 않고 아직까지도 정론이 없다.

 

 

 

 

『신당서』와 『구당서』는 당나라 역사를 참되게 기록한 역사서다. 『신당서』는 이 사건을 “고조가 태원(太原)에서 기병했는데 자신의 뜻이 아니라 태종에게서 나왔다”고 해석하고 있다. 『구당서』에는 “내 아들이 신중히 이 계책을 세우고 있었다. 이미 결정했으니 그것을 따랐다”고 기록돼 있다. 『자치통감』의 많은 자료들은 『구당서』를 쫓고 있다. 이 두 역사서를 근거로 “진양에서 기병한 것은 모두 진왕(이세민)의 계책이었다.”, “고조가 천하를 얻은 것은 모두 태종의 공로다”라고 단정하고 있다. 여기서 ‘모두’라는 글자를 보면 이세민이 모든 공로를 독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태종이 주모자요 결정자라는 것이 의심할 바 없는 정론처럼 돼 버린 것 같다.

 

후세 사학자들도 이 기록에 근거하여 이연은 황음하고 무능하며 큰 뜻을 품을 수 있는 인재가 되지 못한다고 했다. 주색에 빠진 무능한 인물이 어찌 진양기병과 같은 큰일을 벌일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런 그가 당 왕조의 창시자가 된 것은 이세민의 웅지와 재능, 담력과 책략에 의한 것이고. 더불어 이연이 기병한 사실도 이세민이 강력히 추진하는 것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이세민이 만들어 논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다고 하기도 한다.

 

정말 그러할까? 사실일까? 이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아보려면 먼저 역사가들이 당시에 기록한 당대사를 봐야 할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다시 진양기병의 전 과정을 통해 이 문제의 답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먼저 당시 기록한 당대사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보자.
이세민은 계략이 뛰어나고 전공을 드높이길 좋아했던 황제다. 그가 집정할 시기에 역대의 역사 편찬을 중시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의 당대사 편찬도 중시했다. 정관(貞觀) 14년 그는 역대 황제들이 역사를 읽지 않은 것에 불만을 표시하고 방현령(方玄齡) 등의 사관에게 “자신에게 국사를 보여주라” 요구한다. 방현령 등의 사관들은 편년체로 국사를 빼고 줄여 “고조, 태종 양조 실록 각 21권을 올린다.” 양대의 실록은 당대 황제의 말과 행실을 기록한 것으로 사관들은 태종이 분명 열람할 것을 알고는 빼고 줄였으니 분명 달라진 부분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형제를 죽인 ‘현무문 사변’의 전투에 대해 사마광(司馬光)은 “말이 거반 숨겨져 있다”고 생각했다. ‘현무문 사변’에서의 골육상잔은 “주공(周公)이 동생 관숙선(管叔鲜)과 채숙(蔡叔)을 주살해 주나라 왕실을 안정시켰고 계우(季友)가 숙아(叔牙)를 독살해 노(魯)나라를 편안케 했다”는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강변했다. 이런 것으로 보면 당시 사관들이 역사를 쓰면서 빼고 줄였음이 분명하다.

 

신구『당서』와 『자치통감』은 실증을 거치지 않고 『고조, 태종 실록』을 근거로 썼다. 표면적으로 보면 근거가 있는 것 같지만 사관들이 했던 행동이나 책이 만들어진 과정을 보면 온전히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현무문 사변’은 ‘숨겨져’ 있는데 ‘진양기병’의 주동자가 누구냐 하는 것도 ‘빼고 줄여’ 당태종의 의중에 맞게 썼을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그럼 기병해 수나라를 멸하고 당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이연은 분명 중요한 결정권자였다. 역사 기록을 보면 ‘진양기병’ 이전에 이연은 이건성(李建成)과 이세민 두 아들에게 하동(河東)과 진양에서 영웅호걸들을 모집해 기병할 준비를 갖추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이연은 또 자신의 의도를 수양제가 알지 못하도록 책략을 꾸며 충분한 시간을 번다. 그는 태원에서 유수(留守)를 역임하면서 태원의 영웅호걸들의 지지를 얻어 관중(關中) 지주들에게 신뢰받는 인물로 성장한다. 예를 들어 611년(수 대업 7년) 양현감(楊玄感)이 기병하기 전에 위위소경(衛尉少卿)을 맡고 있던 이연은 군량을 옮기면서 사람을 보내 탁군(涿郡)의 형세를 자세히 살피게 했다. 양현감이 기병하자 이연이 군대를 파병하지 않은 것을 보면 정치적 책략이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나라 말기 각지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나고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연만이 수나라를 뒤엎을 수 있었다. 이연이 대업 13년에 ‘진양기병’을 결정한 것이 승리의 발판이 됐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진양기병’은 이연이 오랫동안 준비했다는 것을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기병하자마자 그는 장안을 공격하고 백성들에게 ‘약법삼장(約法三章)’하여 일시에 관중의 질서를 회복한다. 그리고 재산을 소유하고 있던 지주들을 장악해 순조롭게 승리를 거머쥔다. 수나라 말기 각지에서 기병한 영웅호걸 중 이연이 가장 멀리 내다봤고 누구보다도 치밀한 계획을 세웠다. 그렇게 해서 지주들의 지지를 받고 수나라를 멸하고 당 왕조를 건국했다.

 

앞서 제기한 문제에 대해 진인각(陳寅恪)은 “후세에 성공과 실패로 사람을 논함으로써 국사는 승자의 수정을 겪게 된다. 그래서 당시의 진상을 쉽게 알지 못한다”고 했다. 여사면(呂思勉)도 “고조가 기병을 하는데 태종이 큰 힘을 보탰다고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모든 것이 다 태종이 했다고 하는 것은 날조다”고 했다. 많은 학자들도 이에 동조한다.

 

‘진양기병’은 수나라를 뒤엎는 비밀스런 행위이기 때문에 그 진상을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태종 때 사관들이 곡필(曲筆)을 거치면서 더더욱 그 진상을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이세민이 ‘진양기병’의 참가자요 결정권자는 맞지만 주모자라고는 할 수 없다. 대업 13년은 이세민의 나이가 20세에 불과했다. ‘안문(雁門)’ 포위를 뚫는 등 전공이 혁혁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당시 자질이나 명성으로 볼 때 이연이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음은 분명하다.

 

 

 

 

물론 이세민이 “총명하며 용감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도량과 식견이 남달랐다”는 것은 분명하다. 재능이 있고 지혜를 갖추었다는 평가도 맞다. 그리고 ‘진양기병’에 참가해 중요한 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연의 명령을 집행한 것이다. 이연이 ‘진양기병’을 조직하고 이끌었다. 이세민도 큰 역할을 했지만 아버지 이연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세민이 ‘진양기병’에 참가한 것은 정치에 발을 집어넣었다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게 공평한 평가일 터이다.

 

어떤 학자는 이세민의 행동 방식을 근거로 어떻게 해서 이세민의 공으로 모두 돌아가게 됐는지를 설명하기도 한다. 이세민의 황위는 합법적으로 부친의 황위를 계승한 것이 아니다. 이에 따라 정통적 이론의 비평과 책망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세민이 황제가 된 후 사관들에게 『국사』를 편찬하도록 명한 것은 자신의 정당한 이유를 찾기 위해서였다. 사관들은 머리를 짜내 문제의 초점을 ‘진양기병’의 밀모에 맞춰 고조 이연의 주동자이며 결정권자였다는 중심 역할을 엄폐하고 태종 이세민을 진양기병의 주동 인물로 만듦으로써 태종이 당 왕조의 진정한 기틀을 닦은 인물로 만들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세민은 황위에 오른 ‘합법성’을 얻었다. 그리고 “전후의 공과를 후인들이 평가하게 만들어” 후세에 진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 천고의 현안으로 남겨 놓았다.

 

‘진양기병’한지 이미 1300년이 지났다. 찬란했던 당나라 문명도 과거가 됐다. 어쩌면 누가 공이 많은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재론하면서 이전 위대한 문명국가였던 당나라가 어떻게 건립됐으며 어떻게 찬란한 문명을 이룰 수 있었는지 회고해 보는 시간을 가져봄도 무의미한 것은 아닐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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