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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0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양귀비(楊貴妃 : 719-756), 이름은 옥환(玉環)이요 호는 태진(太眞)이다. 꽃처럼 예쁘고 음률과 춤에 능했다고 전한다. 처음에는 당 현종(玄宗)의 아들 수왕(壽王)의 비였다. 나중에 현종의 총애를 받아 천보(天寶) 4년(745)에 귀비에 봉해졌다. 총애를 한 몸에 받아 그 형제가 모두 벼슬했고 사촌 오빠 양국충(楊國忠)은 조정을 농단했다. 755년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귀비는 현종과 함께 마외역(馬嵬驛)까지 도망갔다. 종군하던 군사들이 양국충을 주살하고 현종에게 양귀비를 자진하라 명할 것을 요구했다. 목매 죽었다. 일설에는 대역을 내세워 목매게 하고 자신은 동영(東瀛)으로 피했다고 한다.

 

개원(開元) 24년 당 현종이 총애하는 무혜비(武惠妃)가 병사했다. 애도가 끝난 후 현종은 후궁을 찾았으나 몇 천 명 중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그때 어떤 사람이 양현염(楊玄琰)의 딸 양옥환이 절세가인이라고 상주했다. 양현염은 이미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상태였고 그의 딸은 당시 당 현종의 아들 수왕의 비가 돼 있었다. 경국지색이었다. 풍염하고 가무를 잘했으며 음률에 달통했고 남달리 총명했다. 현종은 마음에 들었다. 점차 심취하더니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오래지 않아 양옥환은 총애를 독차지 하는 후궁이 됐고 궁중에서는 그녀를 ‘양자(娘子)’라 부르며 의용을 황후와 같이 갖췄다.

 

천보 초년 양옥환은 귀비에 책봉됐다. 양옥환은 현종을 푹 빠지게 만들었다. 연인과의 밤이 너무 짧아 군왕이 조회에 나가지도 않았다. 양옥환은 어떻게 당 현종을 그토록 미치게 만들었을까? 그녀의 선천적이 아름다움과 ‘기름’같은 아름다운 피부가 그렇게 했을까? ‘回眸一笑百媚生(눈을 돌려 한번 웃으면 백가지 교태가 생겨나니)’하게 만드는 교태 때문일까? 그녀의 깃옷과 아름다운 치마를 펄럭이며 추는 춤 때문일까?

 

 

 

 

현종은 음률에 능통했다. 당 왕조의 황제 중 가장 출중한 사람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다. 타고난 소질을 가지고 있었고 곡을 잘 만들었으며 춤도 잘 추었다. 적지 않은 제자들이 이원(梨園)에서 그에게 훈련을 받았다. 양옥환은 몸매가 좋았고 자태가 아름다웠다. 선율이 빠른 서역 무용도 잘 췄다. 더욱이 양옥환은 비파의 명수였다. 한 번은 현종이 내지의 악기를 가지고 서역에서 전해온 5종의 악기와 함께 연주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당시 현종은 신명 나 갈고(羯鼓)를 손에 잡고 양옥환은 비파를 연주하면서 경쾌한 노래와 우아한 춤이 밤낮 없이 계속됐다. 현종에게 음률에 능통한 양옥환이 특별한 매력으로 다가선 것은 당연한 것이고.

 

양옥환에게는 3명의 언니가 있었다. 모두 재능이 뛰어나고 미모를 갖췄다. 현종은 한꺼번에 그들을 국부인(國夫人), 즉 한(韓)국부인, 괵(虢)국부인, 진(秦)국부인에 봉했다. 천보 초년 양태진(楊太眞)은 귀비에 봉해졌고 죽은 그의 부친은 태위(太尉), 제국공(齊國公)에 봉해졌고 모친은 양(凉)국부인에 봉해졌다. 숙부 현규(玄珪)는 광록경(光祿卿)을 제수 받았고 사촌 오빠 양기(楊綺)는 시어사(侍御史)를 제수 받았다. 모두 궁성과 이어진 거처를 하사받았다. 한, 괵, 진 세 국부인은 매일 청탁으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렇게 양귀비가 총애를 받으면서 양 씨 일가는 공경대부보다도 더한 부자가 됐다.

 

당 현종과 양귀비는 늘 아교풀 같이 정이 깊었던 것은 아니다. 둘은 자주 사이가 틀어졌다. 그런데도 현종은 양귀비에게 미련을 뒀다. 천보 5년(746) 7월, 양귀비는 현종의 꾸지람을 듣고 집으로 돌려보내졌다. 양귀비가 떠난 그날 현종은 점심도 먹지 않았다. 고력사(高力士)가 현종의 심사를 알고 100여 수레에 연회 도구 등을 싣고 현종의 음식의 반을 가지고 양 씨 집으로 가서 양귀비에게 줬다. 그렇게 해도 현종은 여전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오후가 되니 아무런 이유도 없이 화를 내며 주변의 궁인들을 매질했다. 그래서 고력사는 주청을 드려 양귀비를 궁으로 데리고 왔다. 그날 밤 현종은 황궁의 안흥문을 열어젖히고 양귀비를 맞이하고서야 화를 풀고 양귀비를 거듭 어르고 달랬다.

 

이후 양귀비는 더 총애를 받았다. 밖으로 출유할 때마다 양귀비가 수행했다. 말을 탈 때 고력사에게 채찍을 들고 고삐를 잡게 했다. 황궁에는 오로지 양귀비에게만 비단을 만들고 자수를 놓는 장인이 7백여 명이 있었고 조각하고 주조하는 장인도 수백 명에 달했다. 현종은 매년 10월에 화청궁(華淸宮)에 갔는데 양국충의 형제자매 5명도 수행하도록 했다. 매 사람이 한 무리를 이루고 같은 색의 옷을 입게 했다. 다섯 집안이 혼성이 되니 화려한 옷 색깔이 눈길을 끌었다. 햇빛이 비추니 온갖 꽃이 만발한 것과 같았다. 수레 행렬이 지나 갈 때 도로는 진주와 비취가 발하는 소리와 코를 찌르는 향기로 가득했다. 길가에 떨어진 금은 장식들이 얼마나 됐는지 셀 수도 없었다.

 

 

 

 

천보 9년(750) 양귀비는 다시 황궁에서 쫓겨난다. 당시 대신 길온(吉溫)이 현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여인네가 식견이 짧아 황상에게 대들었습니다만 양귀비는 은총을 입은 지 오래됐습니다. 어찌하여 후궁에 종신토록 머물 거처를 마련하지 않고 황궁 밖으로 내쳐 굴욕을 감내하게 하십니까? 정말 황상께서는 그렇게 하실 정도로 냉정하시다는 말입니까?” 현종이 듣고는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즉각 후궁 관원 장도광(張韜光)을 양귀비 집으로 파견해 안위케 하고 황제의 음식을 내렸다. 양귀비는 울면서 장도관에게 “내가 황상에게 순종하지 않은 것은 만 번을 죽어야 할 죄입니다. 저의 모든 것은 황상의 은혜를 입은 것으로 몸만 부모가 주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현종에게 전하도록 했다. 그리고 양귀비는 가위로 머리카락을 잘라 장도광에게 주면서 현종에게 주라고 했다. 현종이 보고는 크게 놀라 고개를 흔들면서 고력사를 파견하여 양귀비를 궁으로 불러들이도록 했다.

 

그러나 천보 14년(755) ‘안사(安史)의 난’이 발발했다. 이듬해 6월 안록산(安祿山)이 동관(潼關)을 돌파하자 현종 이융기(李隆基)는 그제야 몽롱했던 꿈에서 깨어났다. 양국충이 부추기자 현종과 옥환 형제 등은 연추문(延秋門)을 빠져나가 황망히 서쪽으로 피난했다. 현종 일행이 100여 리 떨어진 마외역(현 섬서 흥평[興平]현 서쪽)이라는 곳에 이르자 장병들이 배고픔과 피로를 이기지 못하고 소란이 벌어졌다.

 

용무장군(龍武將軍) 진현례(陳玄禮)가 비밀리에 태자 이형(李亨)에게 왕국충을 모반죄로 주살해야 한다고 상주했다. 이형이 동의하자 진장군은 또 현종에게 상소해 “양국충이 모반을 꾀해 이미 주살했습니다. 양귀비도 모실 수 없습니다. 폐하께서 은혜를 끊고 법을 바로 세워야 합니다!”고 했다. 현종은 귀비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했으나 주변의 장병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넘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고력사에게 양귀비를 사찰로 데리고 가 하얀 비단으로 목을 매 생을 마감케 했다. 장병들이 양귀비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대오를 정비해 계속해서 서쪽으로 피난했다.

 

 

 

 

양귀비가 마회역에서 죽었다는 것은 의문을 품을 필요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양옥환의 종착점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다.

 

일설에 양옥환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삭발하고 비구니가 됐다고 한다.
당 현종은 촉(蜀) 지방으로 피난 갔다가 장안으로 돌아간 게 1여 년만의 일이다. 양귀비를 이장하려고 찾았으나 시체의 종적이 묘연했다. 그녀의 시체를 찾지 못했다는 것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다른 곳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현종이 사람을 파견해 여러 곳을 뒤졌으나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이는 양귀비가 분명 죽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한다.

 

이외에 당시 피살된 사람은 양귀비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아미(蛾眉)라는 이름을 가진 궁녀라고. 주살할 것을 요구한 진현례는 양귀비를 본 적이 없어 양귀비의 진짜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그래서 고력사가 궁녀 한 명을 양귀비와 바꿔치기 했다고. 양귀비가 마외역을 벗어나 의복을 갈아입고 남쪽으로 숨어들어갔다고 한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디로 갔으며 어디에서 죽었는지 알 길이 없다. 양옥환이 여도사가 됐었던 경험을 떠올리는 사람들은 도관으로 은닉했을 것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과거의 귀비라는 신분의 여성은 산목숨 풀칠하기 위해 기녀가 됐을 것이라 보는 사람도 있고.

 

그러나 양옥환은 여도사가 됐든 기녀가 됐든 양 씨는 경색지국의 미모를 갖추고 있었고 조야에 지명도가 있던 명사로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누구라도 알아봤으면 현종의 총애를 입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알리지 않았을 수는 없을 것이다. 현재와 같은 성형수술을 받았으면 모를까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살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그런가, 양옥환이 일본으로 피신해 타향에서 객사했다고 하기도 한다.
1963년에 한 일본 여성이 방송에 나와 자신의 집에 양옥환 이후의 족보를 완전한 상태로 보관하고 있다고 표명했다. 그녀 자신이 바로 양귀비의 후예라고 공언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반란을 일으킨 장수가 양귀비를 죽이려 할 때 선녀와 같은 그녀의 미모를 보고 차마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고력사와 비밀리에 상의한 후 ‘사람을 바꿔치기 하는 계책’을 이용해 양귀비를 놓아줬다. 진현례는 나중에 변고가 생길 것을 염려해 유능한 심복으로 하여금 그녀를 남쪽으로 피신시키고 장강 해구에서 배를 태워 동영(東瀛)으로 보냈다. 일본은 당나라 제일 미녀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그래서 현재 일본 야마구치현 ‘이존원(二尊院)’에 양귀비의 묘가 아직도 있다고 한다.

 

그 지역 『군지(郡志)』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당 현종이 양귀비가 동쪽으로 부상(扶桑)[동해에 있는 전설 속의 나라. 일본을 지칭하기도 한다]으로 건너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옛정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불상 2존과 함께 특사를 보내 함께 부귀영화를 누리자며 간절히 귀국을 종용했다. 양귀비는 옥비녀를 뽑아 현종에게 답례로 보냈다. 그리고 현지에서 무병장수하다 생을 마감했다. 현재 ‘이존원’의 이름이 그렇게 해서 생겼다.

 

 

 

 

절세가인 양옥환의 마지막 장에 대해 이리도 많은 설이 난무한다. 도대체 그녀는 죽임을 당했을까? 아니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을까? 죽지 않았다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사실일까? 아니면 중국에서 죽었을까? “삼천 궁녀 중에서 혼자 총애를 받았던” 여인에게 동정과 연민을 느끼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 한 것인가. 아직도 사람들은 중국 최고의 미녀에게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양옥환 개인의 문제에 국한하여 ‘아름다운’ 여인의 비극을 애도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중국 전제주의 국가에서 ‘전제’의 황제였던 현종의 행태를 묵과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식음을 잃을 정도로 사랑했던 여인을 종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든 현종이란 황제의 ‘전제’를 낳게 만든 ‘제국’의 무도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현종이 양귀비와 나눈 사랑은 결코 옳은 사랑이 아니다. ‘연리지’나 ‘비익조’라는 미명으로 애달픈 애정이라고 노래해서는 안 된다. 한 여인을 자신의 권세에 의거하여 ‘소유’하고 자신의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버린’ 사나이 이융기는 ‘제국’이 낳은 전형적인 무도한 남성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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