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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0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당(唐) 선종(宣宗 : 810-859) 이침(李忱), 당 헌종(憲宗)의 13번째 아들이다. 광왕(光王)에 봉해졌다가 회창(會昌) 6년(846)에 즉위했다. 재위 기간에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켰고 토번(吐藩, bon chen po, Tibet), 회홀(回鶻, Uyghur)을 정벌해 변경 지역을 안정시켰다. 외치에는 성공했으나 내치에 실패해 번진(藩鎭)이 할거하면서 봉화가 그칠 날이 없었다. 대중(大中) 13년에 죽었다. 묘호는 선종(宣宗), 정릉(貞陵)에 묻혔다.

 

중국 봉건왕조에서 황제는 지극히 존엄한 존재로 세상의 모든 부귀를 누렸다. 화상(和尙)은 승려다. 불교에서 재계(齋戒)한 고행 승으로 제가의 시주로 살아간다. 이 둘을 비교하자면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보인다. 암수가 유혹하더라도 말과 소는 따라다니지 않는 게 아니던가. 그러나 중국의 역사 속에서는 서로 관련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불교가 성행했던 봉건왕조에서 승려 출신이 황제가 된 경우도 있다. 주원장(朱元璋)과 이자성(李自成)이 그 예다. 황제가 출가해 승려가 되기도 했다. 여러 번 불도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남조(南朝) 양(梁) 무제(武帝) 소연(蕭衍)과 오대산에서 출가했다고 전해지는 청(淸)나라 순치(順治)황제 복임(福臨)이 그 예다. 결국 승려와 황제는 인연이 있는 셈이다. 이 모든 것들은 역사서에 있는 것으로 잘 알려진 일이다. 그런데 천여 년 동안 의혹으로 남아 있는 황제가 있다. 당나라 왕조의 뒤에서부터 제4대 황제였고 ‘중흥성주(中興聖主)’로 알려진 선종 이침이 그이다.

 

 

 

 

당 선종이 승려가 되었을까? 정부에서 편찬한 신․구당서에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당말 선종에 대한 비사 기록이 약간 보인다. 예를 들어 위소도(韋昭度)의 『속황왕보운록』, 위지고(尉遲雇)의 『중조고사』, 영호징(令狐澄)의 『정릉유사』 모두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당 선종은 헌종 이순(李純)의 막내둥이다. 어릴 적부터 재능이 많아 황제를 지낸 조카 당 문종(文宗)과 무종(武宗)의 질투를 받았다. 무종이 등극 후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해 그를 죽이려 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무종이 “중상시(中常侍) 4명에게 밀령을 내려 선종을 영항(永巷)에서 붙잡아다가 아무도 모르게 수일 동안 궁궐 변소에 빠뜨려 버렸다.” 환관 구공무(仇公武)가 선종을 가련하게 여겨 “무종에게 상소를 올려 ‘왕자를 오랫동안 변소에 빠뜨려 주살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자 무종이 ‘그래그래’라고 했다.” 구공무는 선종을 부축하고 군사들에게 똥물을 제거하게 하고 잡물로 감싸 집으로 데리고 간 후 몰래 돌봤다. 이침은 장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행자로 변장해 궁문을 빠져나갔다. 나중에 절강(浙江) 염관(鹽官, 현 해령[海寧])의 진국해창원(鎭國海昌院[안국사(安國寺, 속칭 北寺)])에서 사미니가 됐다. 그 절의 방장 제안(齊安)은 그에게 경준(瓊俊)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줬다. 몇 년 후 무종이 병사하자 이침은 도성으로 돌아가 황제가 됐다.

 

이침은 사부의 은덕을 잊을 수 없어 제안에게 오공국사(悟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대대적으로 불사를 일으키고 선원을 확장해 제풍사(齊豊寺)라 불렀다. 북송(北宋) 때에도 제풍사를 지속적으로 보수했는데 이에 비석을 세워 관련된 일들을 기록하였다. 그중 당 선종의 옛일을 언급한 부분이 보인다. “처음에 선종이 피난하여 달아나 삭발한 후 비구가 되었다. 여러 곳을 전전하다 염관에서 승려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는 명나라까지 전파돼 “당 선종이 잠룡 하여 의탁했다”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제안과 선종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이런 기록들을 보면 이침이 해창원에서 사미니가 된 것이 사실인 듯 보인다.

 

선종이 염관(해령)에서 몇 년을 보낸 것은 확실하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민간에서는 여러 가지 설이 생겨났다. 강희(康熙) 『해령현지』에 의하면 제안(齊安)이 당나라 말기에 일대종사(一代宗師)가 됐는데 이전에는 ‘황실 후손’으로 어릴 적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됐다고 했다. 소식(蘇軾)이 항주태수(杭州太守)로 있을 때 해창원으로 유람을 가서는 옛 유적지에 조의를 표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칠절(七絶)의 시로 제안을 읊고 있다.

 

세상을 한낱 티끌로 여기니,(已將世界等微塵)
허공에 떠 있는 꽃 꿈속의 몸일지라.(空裏浮華夢裏身)
용안을 분별하였다 말하지 마라,(勿謂龍顔便分別)
천안으로 천인을 알아본 것이니.(故應天眼識天人)

 

분명히 제안이 해창선원에 주지로 있을 때 사미니 경준의 신분을 잘 알고 있었고 그를 총애했음을 밝히고 있다. 이침과 제안이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인연이 깊어 명나라 사람들은 “해창에서 제안(齊安)에게서 뜻을 얻었고 경준은 황얼(黃蘖)과 투합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이침과 당시 고승 황얼(黃蘖)선사의 관계도 밀접했었다. 황얼선사가 염관에서 수좌로 예불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사미니로 있던 선종이 불법을 묻고 답했다고 전한다. 선종은 불법 공부에 열중해 나중에는 황얼을 따라 환남(皖南) 경수(涇水)에 은거하기도 했다. 민국으로 들어와서 『해령주지고(海寧州志稿)』에 제안과 황얼의 전을 써 당 헌종이 승려가 됐던 이야기를 기술하고 있다. 1936년 7월 7일 절강의 『동해일보』는 다시 당 헌종의 승려가 됐었다는 것이 확실하다고 보도했다. 단지 안국사는 파괴돼 유적지를 발굴하더라도 그 종적을 찾을 길이 없게 됐다.

 

이침이 나중에 어떻게 황제가 됐는지에 대해서도 안휘(安徽) 지방지는 기록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침이 나중에 현의 옥에 갇혔는데 사람을 시켜 자신이 자신을 그린 선면(扇面)을 장안으로 보냈다. 그 그림에는 “조정에서 강남의 일을 물으면 풍광(風光, 이침의 어릴 때 이름)이 물 서편에 있다고 알려라”고 적혀 있었다. 그래서 “관리가 보고는 태자를 맞이하여 입조케 했다. 무종이 붕어하자 즉위해 선종이라 했다”고 하고…….

 

당 선종이 확실히 승려가 됐었는가? 어쩌면 불가의 전설일 수도 있다. 당시 당 무종 이염(李炎)은 대대적으로 불교를 억압했다. 사찰을 파괴하고 승려들을 환속시켰다. 그런 추세 때문에 사람들은 불교에 반감을 가지게 됐다. 그런데 이침이 용상에 오르자 무종의 억불정책을 없애고 다시 불사를 대대적으로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러한 행적 때문에 비천한 시기에 출가를 했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더 어려워 진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근래에 민간에서 성행하는 경극 『홍종열마』, 『평귀회요』, 『대등전』에 등장하는 주인공 설평귀(薛平貴)는 거지가 황제가 되는데 그가 바로 당 선종의 형상이다.

 

 

 

 

정사(正史)의 기록을 보자. 사마광(司馬光)은 『자치통감』에 “怡[당 선종의 원명이 이이(李怡)다]가 어렸을 적에 궁중에서 모두 지혜롭지 못하다고 여겼다. 태화(太和) 이후 재능을 감추고 때를 기다려 군거하기도 하고 여러 군데를 전전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속에 말 못한 사정이 보이는 듯하다. 마치 꼭꼭 숨겨야 할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사마광은 신중하게 문장을 쓰고 있다. 전통 사학에서 “존귀한 사람은 피휘(避諱)해야 한다”는 것에서 출발해 『중조고사』등에서 기록한 당 선종의 승려가 됐었다는 전설을 ‘황당무계’하다고 배척했다.

 

그러나 다른 책자에 ‘다른 것을 고찰’ 했는데 대학자의 고심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전통사학자의 고충, 회의, 추측, 그리고 실마리. 그의 뜻은 후대가 알아서 판단하고 선택하라는 말일 터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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