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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1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유태인(猶太人, Jew)은 세계의 많은 민족 중 뛰어난 민족으로 평가받는다. 그들의 먼 조상은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 가운데 오아시스에서 발원해 유목생활을 했다. 나중에 천재를 만나 사방으로 옮겨 다녔다. 기원전 13세기에 유태인 지도자 모세가 민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 유태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기원후 70년 새로 등장한 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수도였던 예루살렘은 이민족의 손에 들어간다. 생존과 안식처를 찾기 위해 유태인들은 유랑하였다. 지구 대부분 지역에 그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중국의 하남(河南)에도 다다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태인들은 언제 중국의 하남으로 오기 시작했을까?
먼저 역사 기록을 살펴보자. 강희(康熙) 2년(1663)의 『중건청진사기』에 “(유태)교는 천축에서 발원해 주나라 때에 이미 중주(中州)로 이주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돼 있다. 중주는 하남이다. 이렇게 따진다면 유태인은 주나라 때부터 하남으로 왔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진원(陳垣)은 이런 설이 ‘비기(碑記)’를 아무렇게나 해석한 것이라 풀이했다. 청진사(淸眞寺)에는 『홍치비』와 『정덕비』가 있는데 모두 유태인은 주나라 때 중국으로 들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면 두 비기는 유태교가 발생한 것은 중국의 주나라 때와 동시대라고 기록한 것으로 후대 사람들이 유태인들이 중국으로 들어온 시기로 잘못 본 것이라 했다.

 

 

 

 

‘주대 중국 이주설’은 외국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예수회의 앙투안 고빌 (Antoine Gaubil), 로마교회 시앙니에(西盎涅), 번보뤠이치(本勃瑞奇), 까오더베이(高德贝) 등 모두 ‘주대 중국 이주설’을 받아들이고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그 시대에 이스라엘의 여행객들이 자주 중국으로 여행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까오더베이의 이론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는 『구약․아모시서』의 한 구절을 가지고 설명을 하였다. 일찍이 기원전 8세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실크를 사용했는데 당시의 실크는 중국에만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실크를 사용했다는 것은 중국에서 수입한 것이 분명하다고 보고 있다. 이외에 유태의 초기 역사, 전설과 중국 주대의 역사, 전설이 비슷한 부분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유태인들이 한(漢)나라 때에 중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정덕비』의 “(유태)교는 한대부터 중국으로 들어와 살았다”라는 기록에 근거한다. 이외에 구전돼 온 전설이 있다. 청(淸)나라 예수회 보루어디예(勃洛底耶)가 『유태인 중토 정거록』에 “이 유태인들은 한 왕조 명제 재위시기에 중국으로 들어왔다.” “이 유태인들 속에는 명제 통치 기간에 도착했다고 긍정하는 사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설은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최근 『사원(辭源)』과 같은 사전에도 그렇게 기록돼 있다.

 

한나라 때 중국으로 이주했다는 설을 지지하는 사람으로는 아이더진스(艾德金斯), 미시거후스지(米希各甫斯基) 등이 있다. 눠예(諾耶)는 비교적 구체적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는 주나라 때 이스라엘과 중국은 상업적으로는 왕래했지만 대량으로 이스라엘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것은 한나라 때라고 했다. 더라구바이리(德拉古栢利)는 기원후 34년부터 바빌로니아 지역의 유태인들이 박해를 받아 유랑하기 시작했는데 생존자들은 마침내 페르시아 동북지방으로 이주했고 그중 일부분은 상단을 쫓아 중국으로 건너가 정주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확실한 인증 물증으로 볼 때 유대인들이 당(唐)나라 때에 중국으로 건너갔다는 설이 비교적 믿을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 아부차이이터(阿布才伊特)는 여행기에 광주(廣州), 항주(杭州)에 유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프랑스 시에화보(歇伐勃)라는 유태 작가는 9세기 때 스페인의 유태인들이 중국으로 건너갔다고 하였다. 그는 그들의 여정에 관한 자료를 가지고 작품화하기도 하였다. 고고학 방면으로 보면 당나라 고분에서 발굴된 도용(陶俑)을 보면 산미디(shanmidi, 閃米底)족의 얼굴 모양을 하고 있다. 바로 유태인이다. 근래에 위구르에서 문자 잔여 조각이 발굴 되었다. 모두 히브리어로 고고학자들이 감정한 결과 모두 당나라 때 것들이었다. 이는 당나라 때 많은 유태인들이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상술한 증거가 없다 하더라도 당나라 때 동서 교류가 활발했고 서양은 단지 종교 전래를 위해 중국으로 갔다는 점을 확대해 보면 대량의 유태인이 그때 이미 중국으로 갔고 심지어 그중 일부분은 중국에 남았다는 것을 단정할 수 있다.

 

서양 학계에서는 유태인들이 7세기 혹은 9세기에 중국으로 갔다고 본다. 이 설은 당나라 때로 아무리 늦다하더라도 오대(五代) 초기이다. 그러나 일부 서양 학자들은 송(宋)나라 이전에는 많은 유태인들이 중국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고 본다. 예를 들어 프랑스 한학자 샤반(沙畹, Chavannes)은 ‘주대 설’과 ‘한대 설’ 모두 모호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고 보았다. 확실한 자료에 의하면 북송(北宋) 때나 가능했다고 보았다. 진원(陳垣)은 당나라 때에 유태인들이 중국에 갔을 수도 있지만 무역을 위한 것일 뿐 정착했다고는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개봉(開封)에 정착한 유태인들은 송나라 이후에나 가능하다고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제4의 설 ‘송대 설’이다.

 

마지막으로 ‘주나라 이전에 이주 설’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웨이나거라둬후(維那格拉多夫)가 유일하다. 그는 제정 러시아 시대의 그리스 정교의 수장이었다. 그는 『홍치비』를 근거로 유태인들은 모세 이전에 중국으로 갔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설은 유태인 자신들조차 ‘과하다’고 생각한다.

 

 

 

 

유태인은 위대한 민족이다. 역사상 걸출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해 인류문화의 교류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러나 고난의 민족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해 세계 곳곳을 유랑하였다. 유태인이 언제부터 중국에 정착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정답을 찾을 수는 없다. 사실 ‘언제’라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인류가 생존을 위해 어디든 마다하지 않고 기나긴 여정을 계속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중 하나의 민족 유태인들, 생존을 위해 동방의 중국까지 흘러들어가 문화를 꽃피운 그들의 강인함은 경탄할 만한 인류의 끝없는 여정의 한 예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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