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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1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송 인종(仁宗 : 1010-1063) 조정(趙禎)은 진종(眞宗)의 아들로 5세 때 수군왕(壽郡王)에 봉해지고 8세에 태자가 됐다가 1022년 황위에 오른다. 재위 기간 동안 수차례 서하(西夏)의 침략을 받아 막대한 군비 지출로 국력이 쇠한다. 나중에 범중암(范仲庵)을 재상으로 삼아 관리를 정돈하고 개혁을 실행했으나 폐지하고 만다.

 

‘이묘환태자(狸猫换太子)’란 ‘이묘(狸猫)’로 태자를 바꿨다는 말이다. ‘이묘’는 사전적인 풀이로는 ‘살쾡이’이지만 집고양이라고 보면 된다. 유명한 경극의 한 소재로 송 인종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야깃거리로는 재미있다.

 

북송 3대 황제 진종 조항(趙恒)은 나이가 들도록 후사가 없었다. 강산을 계승할 자손이 없으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다행히도 그의 비 유비(劉妃)와 이비(李妃)가 비슷한 시기에 임신하였다. 진종이 그녀들을 불러 신물을 주면서 만약 태자를 낳으면 황후에 봉할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의 돌이 파문을 일으키는 것처럼 황후의 자리를 놓고 격한 경쟁이 벌어졌다. 교활하고 음흉한 유비는 이비가 태자를 낳아 황후자리에 앉게 될 것을 염려해 태감 곽괴(郭槐)와 결탁하여 패거리를 만들고 산파 우(尤) 씨를 매수해 껍질을 벗긴 고양이를 이비가 낳은 태자와 바꿔치기 했다. 그리고 후환을 제거하기 위해 궁녀 구주(寇珠)로 하여금 바꿔치기 한 태자를 해자에 버리도록 했다. 주구는 양심에 꺼려 바꿔치기 한 태자를 정직한 태감 진림(陳琳)에게 알렸다. 팔현왕(八賢王) 조덕방(趙德芳)의 생일 축하 선물을 주러 가는 기회를 이용해 태자를 예물상자에 담고서 팔현왕에게 보내 기르도록 하였다.

 

이비는 요상한 아이를 낳았다는 죄명으로 냉궁에 유배되었다. 나중에 유비가 태자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 의심해 구주와 진림을 심문하고 냉궁을 불사르려 하였다. 냉궁 태감이 이비를 구출해 진주(陳州, 현 하남성 회양[淮陽])로 피신시켰다. 포증(包拯)이 양식을 풀어 이재민을 구하기 위해 진주에 갔을 때 이비를 만나 몰래 보호해 도성으로 돌아갔다. 곽괴를 심문한 후 진상을 밝혀냈다. 그리고 조정은 나중에 인종 황제가 되었다. 자신의 출신을 알게 된 인종은 생모 이비에게 효도를 다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며 포증에게 자신의 용포를 때리게 하여 불효의 잘못을 표시하였다.

 

 

 

 

이 ‘이묘환태자’의 이야기는 중국에서 널리 퍼졌고 사람들의 흉금을 울리는 이야기가 됐지만 정사의 기록과는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송 진종 조항은 5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연이어 요절해 진종과 유덕비(劉德妃)가 45세가 될 때까지 그들 곁에는 아들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유덕비가 총애를 받고 있어 진종과 다른 비빈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 대를 이을 아들이 큰 고민거리가 되었다.

 

유덕비는 겸허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심계가 있었다. 봉건사회의 황궁은 “어머니는 아들 덕에 귀해진다”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녀는 자나 깨나 아들을 얻어 황후의 보좌에 앉기를 희망했지만 입궁 30년 동안 아들을 낳지 못했다. 유덕비에게는 이(李) 씨 성의 시녀가 있었다. 절강(浙江) 사람으로 사람됨이 장중하고 모범적이었으며 말수가 적었다. 유덕비는 이 씨에게 진종의 침실을 책임지게 하였다. 매일 진종을 위해 침대를 갈고 이불과 베개를 갈아주는 일이었다. 이 씨는 본래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고 매일 진종과 만나게 되니 오래지 않아 자연스레 임신을 하게 되었다. 하루는 이 씨와 진종이 함께 누대에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녀의 옥잠(玉簪)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게 아닌가. 이 씨는 좋지 않은 징조라 생각했지만 진종은 오히려 옥잠이 부서지지 않으면 태어나는 아기가 분명 남자아이일 것이라고 말했다. 찾아와 보니 과연 옥잠이 부서지지 않고 온전하였다. 진종은 대단히 기뻐하였다. 오래지 않아 이 씨가 황자를 낳았는데 이가 바로 뒷날의 인종 조정 황제다.

 

당시 유아(劉娥)는 덕비(德妃)로 아직 황후에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이 씨가 아들을 낳는 것을 주의하고 있었다. 황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미칠 듯이 기뻤다. 그러면서도 이 씨의 아들이 황위를 계승하게 되면 아들로 인해 어머니가 귀해진다는 속성에 의해 자신과 황후의 자리를 다툴 수 있다는 것을 염려하였다. 하지만 덕비는 자신이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황제의 총비이고 이 씨는 자신의 노비가 아니던가. 자신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그래서 직접 나서기로 했다.

 

황자가 막 태어나자마자 그녀는 위협도 하고 유혹도 하면서 이 씨에게 아들을 내놓으라 명령하고 황당하게도 자신이 낳은 아들로 둔갑시켰다. 그리고 자신이 양육하면서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절대 누설하지 못하게 경고했다. 이 씨는 자신의 아들의 장래를 위해 마음속으로는 불만이 있었지만 경솔하게 굴 수 없었다. 그렇게 유덕비는 45세에 황자를 낳았다는 것이 조야가 공인하는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진종도 이 기회에 덕비를 황후로 앉힐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녀의 행위를 묵인하였다. 황궁에 있는 사람들 모두 유덕비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진상을 감히 발설하지 못했다. 그렇게 유덕비는 순조롭게 황후에 올랐다.

 

 

 

 

세월은 유수같이 흘러 진종 황제는 건흥(乾興) 원년(1022)에 죽는다. 황태자가 황위를 계승하여 인종이 되었다.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유태후의 수렴청정은 당연했다. 조정 대권을 장악한 유태후의 권세를 두려워한 많은 관리들은 아부하기 바빴다. 어찌 진상을 얘기할 수 있겠는가. 왕벌 집을 건드려 봐야 손해인 것을. 누가 감히 황제의 친모가 이 씨라는 것을 황제에게 말할 수 있었을까? 이 씨는 후궁에서 여전히 묵묵히 있는 듯 없는 듯 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현 황제를 낳았다고 자신 있게 나서지 못했다. 권력도 세력도 없는 상태로 나섰다가는 황제의 목숨도 위험할 수 있지 않던가. 그런 와중에 그의 동생이 관직을 잃고 도성에서 쫓겨났다. 홀로 냉궁에 갇혀 있는 신세가 됐고 일가친척 하나 없이 됐으니 오랫동안 억눌렸던 심정이 마음병을 만들었다. 병이 깊어 명도(明道) 원년(1032) 2월에 와병해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얼마 없어 이신비(李宸妃)는 후궁에서 한을 품고 죽었다.

 

유태후가 소식을 전해 듣고 일반 궁녀의 규칙대로 매장하라 명령하였다. 승상 여이간(呂夷簡)이 그 이야기를 듣고 급히 유태후를 만나 이신비에게 황후의 예로 후한 장례를 치러야 된다고 간언하였다. 황제와 정사를 논하고 있던 유태후는 여이간의 말을 듣고 노기충천하여 황제를 끌고 내실로 들어갔다. 여이간은 대전 밖에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다. 유태후는 오랫동안 그가 움직이지도 않는 것을 보고 나가 질책하며 “그대가 감히 내궁의 일을 간여하겠다는 건가요? 궁녀 한 명이 죽은 것을 가지고 어찌 그리 깐깐하시오?”
여이간이 대답했다. “신이 승상을 맡고 있는지라 정사에는 대소가 없습니다. 궁 내외도 제가 간여할 수밖에 없나이다.”
유태후는 더욱 노하여 여이간의 코를 가리키며 욕을 했다. “승상은 우리 모자를 이간질하려 하시오? 죽어서 몸을 누일 곳도 없이 처참히 죽일 것이요.”
여이간은 조용하게 말했다. “태후께서는 당신의 유 씨 집안을 온전하게 보존하실 생각이 없으신 거요? 만약에 당신이 유 씨 가문을 대를 이을 생각이라면 마땅히 이신비를 후하게 장례를 치러야 할 것이요.”

 

유태후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만약 생모의 일이 누설되면 결과는 명약관화하지 않던가. 태감 나숭훈(羅崇勛)을 보내 이신비의 장례를 조속하게 치르라고 명했다. 여이간은 나숭훈에에 “이신비는 황상의 생모요. 후하게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면 황상이 나중에 알게 된 후 우리는 화를 면할 도리가 없게 되오”라고 말했다. 나숭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재상의 안배에 따라 황후 급의 의관과 장식으로 이신비를 염했다.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해 특별히 수은을 관에 넣었다. 궁에서 출빈할 때 유태후는 이 씨가 비이기 때문에 궁문으로 출관하지 못한다고 주장하자 여이관은 반박하며 황후의 예를 차려야 한다고 강조하니 유태후는 어쩔 수 없이 서화문(西華門)으로 출관하도록 한 후 도성 남쪽 홍복원(洪福院) 안에 잠시 안치하였다.

 

명도(明道) 2년(1033) 3월 유태후도 죽었다. 이후 그나마 정직한 관리들이 하나씩 황제에게 유태후가 생모가 아니고 생모는 작년에 죽은 이신비라는 사실을 알렸다. 처음에는 황제는 믿지 않았다. 유태후가 평시에 자신에게 너무나 잘 해줬고 자신을 도와 정사를 맡았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여러 친왕들이 생모에 대한 사실을 알려주고 유태후가 어떻게 자신의 생모를 학대했는지 얘기해 주자 그제야 완전히 믿게 되었다. 마음 아파하며 생모를 알아보지 못한 자신의 과오를 힐난하고 이신비를 황태후로 추숭하였다. 그리고 외삼촌 이용화(李用和)를 불러들여 만나면서 생질이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생모의 얼굴을 보고 유태후가 해를 끼쳤는지 친히 공복원으로 가 외삼촌과 함께 관을 열었다. 수은으로 관을 채우고 있었으니 이태후의 시체는 멀쩡했고 살아있는 생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의관도 황후의 예를 다해 후한 장례를 치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종이 보고는 유태후에게 감사를 하면서 대신들에게 “유태후가 내 생모를 학대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던데 이를 보니 유태후도 생모 못지않았음을 알겠소”라고 하였다.

그해 10월, 인종은 두 명의 태후를 영정릉(永定陵)에 안장하였다. 생모 이신비는 선왕 가까이에 안장하고 유태후는 능의 서쪽 1리쯤에 안장하였다. 봉자묘(奉慈廟)를 세워 태후 2명의 신위를 봉공하였다. 친모에 대한 송구함을 채우기 위해 인종은 이 씨 가문을 후하게 대해 태후의 동생 이용화의 관직을 높이고 복강공주(福康公主)를 이용화의 아들 이위(李瑋)에게 시집보냈다.

 

송 인종은 마침내 자신의 생모가 누구인지를 알게 됐지만 살아생전에 모자가 한 번도 만나지 못하였으니. 그저 어느 한 개인의 비극이라 치부해서 될 일일까? 아! 봉건 권력의 무상함이 여기에 숨겨져 있음일 진데.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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