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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1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소식(蘇軾 : 1037-1101),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 미산(眉山, 현 사천) 사람이다. 북송의 유명한 문학가, 서화가다. 가우(嘉祐)에 진사, 원외랑(員外郞), 지서주(知徐州) 등을 역임했다. 나중에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올랐으나 혜주(惠州)에 폄적(貶謫)되고 상주(常州)에서 병사했다. 글재주가 날아오를 듯 넘쳐나고 학식이 높으며 시가는 호호탕탕 시원시원 막힘이 없다고 평가 받는다.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이다. 그의 행서와 해서는 일가를 이루었으며 참신하다고 평가 받는다. 저서로는 『동파칠집(東坡七集)』등이 있다.

 

1079년 여름 오대(烏臺) 대사(臺史) 황보준(皇甫遵)이 명령을 받아 호주(湖州)로 소동파를 체포하러 갔다. 이때부터 송(宋)나라의 유명한 문자옥(文字獄)이 시작된다. 이른바 ‘오대시안(烏臺詩案)’이 그것이다. 개인과 당파 사이에 문제가 노출된 사건으로 복잡하게 전개된다. 사건 발생 후 천여 년이 흘렀지만 진상이 더욱 모호해졌다. 소동파는 어떻게 그 사건에 휘말렸을까? 먼저 왕안석(王安石)이 추진한 신법(新法)부터 보자.

 

왕안석은 절강(浙江) 강은(江鄞) 등에서 지방관을 역임할 때 약간의 개혁적 조치를 시행하고 나서 일련의 변법 이론과 방안을 만들었다. 1058년에 1만 자에 이르는 『상인종황제육사서(上仁宗皇帝育事書)』를 써서 “천하의 힘으로써 천하의 재화가 생기기에 천하의 재물을 얻어 천하의 비용으로 삼는다”는 경제 정책을 제시한다. 1069년 송 신종(神宗)은 왕안석을 재상으로 기용하면서 중국 역사상 유명한 변법운동이 시작된다.

 

 

 

 

소동파도 계책을 품에 안은 개혁가였다. 그는 문학, 예술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개혁과 창신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시험에서 쓴 『진책(進策)』이나 나중에 개진한 『사치론(思治論)』 및 여타 상소문에서 현실을 대대적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신의 부국강병의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그는 왕안석의 정치 주장과 달랐다. 주장이 강한 두 인물은 결코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소동파는 왕안석을 개혁을 추구 하지만 이룰 수 없는 방안을 가진 급진적 변법파로 생각했다. 변법의 구체적 내용과 방법, 추진 과정 및 용인 등의 여러 방법에 있어 자신들만의 방안을 가지고 있었다.

 

소동파는 송 신종에게 그런 점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의견서를 쓴다. 황제의 간언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있느냐는 것을 먼저 탐색하고 황제가 이해해 자신을 지지하면 왕안석의 변법에 대해 전면적으로 비평을 할 생각이었다. 소동파는 신종에게 “왕안석은 사람을 모릅니다. 크게 쓸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는 왕안석이 간상 모리배들에게 의지해 신법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분명 바라는 대로 일이 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소동파는 또 신법을 독약에 비유했다. “금일의 정치는 적게 쓰면 적게 실패할 것이요 크게 쓰면 크게 실패할 것이다. 행함을 멈추지 않으면 혼란이 도래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소동파와 왕안석이 정치적 불화로 인해 민간에는 많은 역사적 우스개가 퍼져 있었다. 예를 들어 왕안석이 문자의 본의에 대해 해설을 한 『자설(字說)』을 편찬했다. 그 책에서 왕안석은 ‘波(파)’를 ‘水之皮(수지피, 물의 겉이다)’라고 해석했다. 소동파는 일률적으로 논할 수 없다고 보고 해학적으로 “‘波’가 물의 겉이라면 ‘滑(활)’을 ‘수지골(水之骨, 물의 뼈이다)’이겠네”라고 농담했다. 그러자 왕안석은 입장이 난처해졌다. 그러나 왕안석도 톡톡히 소동파를 공격하기도 했다. 명(明)나라 때 화본소설집 『경세통언(警世通言)』에 「왕안석삼난소학사(王安石三難蘇學士)」 1편이 있는데 그런 사실을 집중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물론 소동파도 낭패를 당한 것은 분명하고.

 

 

 

 

사실 소동파의 의견이 아무런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변법의 결과를 보면 소동파가 예상했던 모든 문제가 현실로 나타났다. 소동파가 당시 신법에 관련해 병폐를 보충하는 방법을 제시했다면 좋은 결과를 도출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다. 소동파가 피할 것 없이 모든 것을 표출하는 성격은 좋다. 그러나 그는 너무 자신을 과신해 신법의 장점을 보지 않고 당시 황제의 선호도를 충분히 고려하지도 않았다. 즉 신법의 창시자인 왕안석과 소통하지 않았다. 왕안석도 무척 매력이 있다고 자신한 신법 방안을 대대적으로 전개하면서 소동파의 의견서를 보지 않았을 리는 만무했지만 시행을 멈추지 않았다. 과신한 결과다. 소동파가 상소를 올릴 때 왕안석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수하가 생트집을 잡듯이 소동파의 결점을 잡으려 할 때 소동파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소동파는 상서로 왕안석의 신법을 반대하는 것 이외에도 신법을 풍자하는 시를 썼다. 소동파와 왕안석이 수장이 된 변법 관련 그룹 사이의 편견은 점점 심해졌다. 결과적으로 왕안석의 인친인 사경온(謝景溫)이 소동파를 무고했다. 소순(蘇洵)이 세상을 뜨자 사천으로 운구할 때 사염(私鹽)을 운반했다는 것이었다. 사경온은 당시의 선원을 체포해 고문을 가한 뒤 소동파의 죄를 인정하게 했다. 소동파는 그럴 일이 없었지만 지방관으로 파견해주기를 조정에 요청했다. 그런 사람들과 엮이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왕안석은 상당히 도량이 있는 사람이었다. 소동파의 언어에 대해 관용을 잃지 않았으며 대부분 추궁하지 않았다. 그러나 왕안석이 물러난 후 소동파의 입지는 더욱 위험해 졌다. 왕안석은 반대파들의 협공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재상 자리를 내줘야 했다. 그가 이직하기 전 그의 수하 여혜경(呂惠卿)은 다른 사람을 시켜 왕안석을 만류하라고 간언하는 편지를 쓰게 했다. 왕안석도 신종에게 한강(韓絳)에게 자신의 직무를 대신할 수 있도록 해주고 여혜경을 참지정사로 삼아주기를 건의했다. 그러나 여혜경은 보좌인에 만족하지 못했다. 한강을 배척하면서 반대로 왕안석을 공격했다.

 

한강은 여혜경이 사마소(司馬昭)와 같은 속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자신은 그를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해 신종에게 왕안석을 다시 중용하라고 비밀리에 상소했다. 이듬해 왕안석은 다시 재상이 됐고 여혜경은 진주(陳州) 태수로 폄적됐다. 여혜경은 자신의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상소를 올려 왕안석이 군주를 속인 죄를 졌다고 공격했다. 그렇게 하여 왕안석은 다시 재상의 자리에서 물러난다.

 

왕안석이 물러나자 사회적 의의를 가지고 있던 변법운동은 자신들과 다른 의견을 가진 그룹을 배척하는 쓸데없는 희롱거리로 절락해 버렸다. 소동파는 그런 변법을 희롱하는 자들에 대해 조롱함으로써 그들의 반감을 사게 됐다. 변법파들은 소동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결코 안심할 수 없는 그런 지경에 이르렀다. 1076년 7월부터 어사 하정신(何正臣), 이정(李定), 그리고 국자박사 이의(李宜) 등은 네 차례 상소를 올려 소동파를 탄핵했다. 그들은 소동파가 읊은 시 중에서 해가 될 만한 구절을 뽑아 신종에게 참소했다. 하정신 등은 소동파가 흑심을 품고 있다고 공격했다. 위를 조롱하고 아래를 욕하면서 조정을 우롱했다고. “임금을 존중하려는 뜻이 없고 충절이 부족하다”면서 소동파를 정법으로 다스려 민심과 풍속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상소했다.

 

 

 

 

그들이 의도적으로 소동파에게 죄를 씌우려고 했던 시구는 전혀 근거가 없는 단장취의(斷章取義)일 따름이다. 예를 들어 소동파의 「八月十五日看潮五絶(八月十五日看潮五絶)」 중에 “東海若知明主意,應敎斥鹽變桑田.(동해약지명주의,응교척염변상전)”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 시의 뜻은 동해 용왕이 명석한 군주 신종의 뜻을 안다면 창해를 상전으로 변하게 할 것이라는 말이다. 신종의 뜻이란 국가를 농단하는 무뢰배들의 뜻을 알아 그들의 행위를 금지하는 것이고 상전이란 경종할 수 있는 농토를 만들어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게 돼 무뢰배들이 ‘이익을 위해 삶을 경시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소동파에게 죄를 씌우려는 그룹들은 이 구절이 농지와 수리와 관련된 법을 반대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즉 소동파가 공격하려는 상대는 바로 당시의 황제인 신종이라고 억측하여 폄훼한 것이다. 이처럼 시구를 이용하여 소동파를 엮으려 했다.

 

당시에 조정에는 정직한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형세가 그렇게 되다보니 어쩔 수 없이 침묵했다. 신당의 세력이 하늘을 찌를 듯했기 때문이다. 신당분자들이 충동질하기 시작하자 소동파는 죄가 있는 것으로 서서히 굳어지기 시작했다. 신당분자 황보준은 스스로 나서서 호주로 소동파를 체포하러 갔다. 부마도위 왕선(王詵)은 소동파의 친구였다. 그는 소식을 듣고 급히 사람을 보내 소철(蘇轍)에게 알렸고 소철도 화급히 호주의 소동파에게 알렸다. 나쁜 소식을 전해들은 소동파는 처음에는 놀랐으나 나중에는 태연자약했다. 자신을 체포하러 온 황보준에게 자신이 조정에 누가 돼 죽음을 피할 수는 없으나 집안사람들과 이별을 해야 할 것이 아니냐고 했다. 집안은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됐다.

 

소동파는 큰아들 소매(蘇邁)와 함께 출발했다. 다른 사람들을 연루시키지 않기 위해 소동파는 도중에서 자살할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골육의 정이 깊은 동생과 집안사람들을 생각하고는 그런 생각을 버렸다. 소동파는 8월 18일 체포됐고 오래지 않아 어사대로 압송돼 심문을 받았다. 처음부터 소동파는 자신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다고 했다. 신당분자 이정 등의 그룹은 정확한 증좌를 제시할 수 없었다. 나중에 소동파가 조정 대신들과 서로 왕래하며 시를 지은 창화시(唱和詩)를 수색해 찾아냈다. 소동파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 시로 왕래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심문이 끝난 것은 대략 10월 초였다. 결과는 조정이 그 ‘오태시안’에 대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이정과 같은 무리들은 소동파를 죽여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피할 수 없는 대세라 파악해 자신이 연루되는 것을 면하려 했다. 물론 나서서 소동파를 구하려 했던 사람들도 적지 않다. 동생 소철(蘇轍)은 소동파의 속죄를 위해 자신의 관직을 내걸기도 했다. 하지만 생사여탈의 권한은 역시 신종의 손에 있었다.

 

신종은 ‘오태시안’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소동파의 재능을 높이 사고 있었고 이정과 같은 그룹의 견강부회하는 작태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결국 신종 황제는 소동파를 관대하게 처리했다. 이는 송 왕조의 개국의 모토였던 문인을 주살하지 않는다는 관례를 따른 것일 수도 있다. 인종 황제는 소 씨 형제를 국가의 보배로 여겼었다. 막 재상의 자리에 오른 오충(吳充)도 신종에게 “조조(曹操)와 같은 근거 없이 의심을 일삼던 사람도 미형(彌衡)을 관대하게 포용했는데 폐하께서는 요순(堯舜)을 귀감으로 삼으시는데 어찌 소동파를 용서하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했다. 마침내 소동파는 자신과 간극이 있던 왕안석이 했었던 “성세에 어찌 재능이 있는 문사를 죽이겠는가?”라는 말처럼 됐다. 그렇게 신종은 소동파를 가볍게 처벌했다. 그때부터 소동파는 낙담해 아예 ‘동파거사’라 개명하고 시문 창작에 몰두하며 다시는 정치에 흥미를 갖지 못했다.

 

소동파 40여 년의 관직 생애는 북송 중․만기 봉건 통치그룹 내부의 복잡하면서도 격렬한 당파 싸움 속에서 지냈다. 그의 선명한 정치 태도와 도도한 성격이 변법파들을 용인하지지 못했고 반대로 변법파들에 의해 받아들이지 못해 결국 화를 당했다. 물론 그와 함께 그의 문학 창작은 빛을 발하게 됐지만.

 

「면지에서 옛 일을 회상하며 자유에게 화답함(和子由沔池懷舊)」

 

人生到處知何似, 정처 없이 떠도는 인생 무엇과 같을까,
應似飛鴻踏雪泥. 마치 날아간 기러기가 눈 진흙을 밟는 것 같네.
泥上偶然留指爪, 진흙 위에 우연히 그 발자국이 남겠지만,
飛鴻那復計東西. 기러기 날아가면 어찌 다시 동서를 헤아릴 수 있으랴.
老僧已死成新塔, 노승은 이미 죽어 새로운 사리탑 세워지고,
壞壁無有見舊題. 허물어진 벽에서 우리가 쓴 옛 시를 찾을 수 없네.
往日岐嶇還記否, 우리가 걷던 험난한 길 기억하는가,
路長人困蹇驢嘶. 먼 길에 사람 피곤하고 나귀 절뚝거리며 울었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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