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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1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이청조(李淸照 : 1084-1151), 호는 이안거사(易安居士), 남송(南宋)의 유명한 여류 시인이다. 부친은 유명한 학자였고 남편은 금석학자였다. 초기 생활은 부유했으나 금(金)나라가 중원에 들어온 후 남편은 죽고 홀로 외로우면서도 곤궁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많은 시문을 남겼다. 문채는 비범하고 전아하며 정취가 남다르고 언어가 청려(淸麗)하다고 평가 받는다. 문집이 있었으나 산실하고 후인들이 『이청조집』을 편찬했다.

 

이청조의 사(詞)는 심원하며 준일하다고 평가받는다. 그녀가 조명성(趙明誠)과 뜻이 통해 함께 금석을 연구하면서 생활해나간 일은 천고의 미담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만년의 이청조는 국가멸망이라는 난국을 맞아 유랑생활하면서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그런데 세상을 떠난 후 만년에 장여주(張汝舟)에게 재가했느냐는 문제가 천고의 수수께끼로 남게 됐다.

 

 

 

 

송(宋)대 조언위(趙彦衛)는 『운록만초(雲麓漫抄)』에 이청조의 「상내한기공계(上內翰綦公啓)」가 기재돼 있다. 조언위에 따르면 이청조가 중병을 앓았을 때 사기당해 결혼했다고 했다. 혼인 후 장여주가 시정잡배의 면모를 숨기지 않고 그녀를 학대했다. 그래서 그녀는 감옥에 가는 한이 있더라도 장여주의 죄상을 밝히려고 했다. 송나라의 법률서 『형통(刑統)』의 규정에 의하면 처가 남편을 고발하면 사실이라 할지라도 2년 징역을 받아야 했다. 당시 기숭례(綦崇禮)라는 관리가 이청조를 도와 감옥에 갇히는 일이 없도록 노력했는데 이청조가 기숭례에게 ‘홍은의 감격’을 표시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했다. 이런 설을 인용한 송대 저작은 한 둘이 아니다. 유명한 역사가 이심전(李心傳)의 『건염이래계년요록(建炎以來繫年要錄)』도 이 설을 따랐다.

 

명(明)대 이후 이청조의 재가와 관련된 이견들이 끊임없이 제기됐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소흥(紹興) 2년 이청조는 60세가 됐는데 재가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 둘째 관리 출신의 부녀자는 재가할 수가 없었다는 것. 셋째 이청조와 조명성은 간담상조했던 사이라 반석과 같은 굳은 감정이 있었고 생사를 같이 하려던 사이라 재가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 넷째 기숭례는 조명성의 친척으로 재가하여 소송에 휩싸였다면 남편의 친우에게 부끄러워 도움을 구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점. 다섯째 송대에 많은 사람들이 이청조가 재가했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조명성의 사촌 자매의 아들이면서 기송례의 자녀의 친가 사급(謝汲)은 그의 저작 『사륙담진(四六談塵)』에 이정조의 재가에 대한 일을 기록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청조를 ‘조령인리(趙令人李)’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 여섯째 『운록만초』는 자질구레한 일들을 잡다하게 나열하고 있어 사실이 아닌 이야기들이 많이 기록돼 있다. ‘계(啓)’의 내용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계’는 원래 이청조가 기숭례에게 다른 사건을 해결해 줘서 고맙다는 내용이다. 조언위가 기록한 ‘계’ 중의 ‘재가’에 대한 내용은 다른 사람이 첨가했다고 본다. 일곱째 이청조는 만년에 스스로 ‘嫠婦(리부)’라고 불렀다. 과부라는 뜻으로 만약 재가했다가 이혼했다면 그녀가 스스로 과부라고 부를 수 있었을까? 근대에 들어와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청조의 재가는 존재하지 않았던 일이라고 했다.

 

 

 

 

중국 역사상 후대에 전해져 오는 여류 시인은 많지 않다. 재능이 있는 여자들은 많았을 것이지만 봉건시대에 여성의 위치가 낮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능 있는 여성들에 대한 평가는 그리 좋지 않다. 훌륭하다고 평가하면 될 일을 꼭 결점을 드러내 폄하하는 경우가 많다. 이청조의 창작이 뛰어나고 비범하다면 될 일, 하필 만년에 재가했느니 안 했느니 따질 게 뭐 있으랴. 그러면서도 여기에 이청조의 재가에 대한 논점을 귀찮게 나열한 것은 중국 봉건 왕조의 남성들의 행태를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청조라는 여성의 한 생애! 일반 여성들과 다를 바 없다. 단지 그녀가 창작한 시가가 영원하리라는 점이 있을 뿐!

 

「성성만(聲聲慢)」

 

尋尋覓覓(심심멱멱) 찾고 찾지만
冷冷淸淸(냉냉청청) 쓸쓸하고 쓸쓸하며
凄凄慘慘戚戚(처처참참척척) 처참하고 적막하다.
暖還寒時候(난환한시후) 더웠다가 차가워질 때,
最難將息(최난장식). 보양하기가 가장 어렵더라.
三杯兩盞淡酒(삼배양잔담주) 두잔 세잔 묽은 술,
怎敵他(즘적타) 어찌 다른 것을 대할까?
晚來風急(만래풍금) 저녁이 되니 바람이 심하다.
雁過也(응과야) 기러기 돌아가니,
正傷心(정상심) 마음 괴롭지만,
却是舊時相識(각시구시상식) 오히려 예전에 이미 알던 일.

 

滿地黃花堆積(만지황화퇴적) 온 땅에 노란 꽃이 가득 쌓일 때,
憔悴損(초췌손) 초췌해지는데,
如今有誰堪摘(여금유수감적) 지금은 누굴 위해 딸까?
守着窗兒(수착창아) 창문을 지키며,
獨自怎生得黑(독자즘생득흑) 홀로 어떻게 어둡게 생활할까?
梧桐更兼細雨(오동경겸세우) 오동잎에 가는 비마저 떨어지는데,
到黃昏(도황혼) 황혼이다.
點點滴滴(점점적적) 비마저 뚝뚝 떨어지니,
這次第(저차제) 이번엔
怎一個愁字了得(즘일개수자료득) 근심이란 글자 하나로 어떻게 해결할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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