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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추적] 세계 인류무형유산 등재로 제주도, 자연유산 3관왕 이어 또 우뚝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제주의 어머니 ‘해녀’가 이제 제주를 넘어 세계를 품는다. 제주해녀가 세계역사로 기록된 순간이다.

 

세계문화사에 기록될 '제주해녀'의 독창성과 역사, 문화적 가치를 짚어봤다.
 

 

◆ 제주의 어머니, ‘해녀’

 

 


“가슴에 끈으로 짠 주머니(망사리)를 묶은 곽(태왁)을 안고, 손에는 쇠꼬챙이를 잡고 이리저리 헤엄치다가 물속에 잠깁니다. 물속에 들어가 돌에 붙어있는 전복을 확인하면, 빈껍데기를 뒤집어 놓아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고 다시 물 위로 올라옵니다. 숨이 차서 소리를 내는데 ’휘익‘하는 소리(숨비소리)를 오래도록 냅니다. 생기가 돌아오면 다시 물에 잡깁니다. 먼저 표시해 두었던 곳에 가서 비창으로 따서 망사리에 넣고 돌아옵니다.”

 

조선후기 문인 김춘택의 북헌집(北軒集)에 수록된 잠녀설(潛女說)에 묘사된 해녀의 모습이다. 김춘택은 아버지와 본인의 유배로 두 차례 제주를 다녀갔고 1706~1711년 유배기간 동안 장문의 잠녀설을 남겼다.

 

해녀(海女)는 맨몸으로 잠수해 전복·소라·미역·우뭇가사리 등 해산물을 채취하는 여자를 말한다. 제주에서는 해녀를 ‘잠수(潛嫂)’, ‘잠녀(潛女)’, '비바리'라고 부르기도 한다.

 

해녀의 기원은 ‘어느 때’라고 시기를 확정지어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삼국사기(고구려 문자왕 13년(504년))에 ‘고려가 탐라로부터 진주로 보이는 가옥을 수입해 조공을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해녀의 공식 기록은 아니지만 삼국시대부터 ‘전복을 땄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1630년쯤 제주를 다녀간 이건도 해녀를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에서 ‘주로 바다에 들어가서 미역을 캐는 여자, 생복을 잡아서 관아에 바치는 역을 담당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다.

 

고려사와 세종실록, 김상헌의 남사록(南史録) 등에서도 해녀(혹은 해녀 물질)의 기록이 나와있다.


◆ 해녀의 상징, ‘까만 잠수복’

 

 


까만 잠수복은 해녀의 상징이다. 하얀 무명저고리와 까막 적삼을 입고 물질하던 해녀들은 1970년대 들어 고무옷을 입기 시작했다.

 

고무옷은 온몸을 가려 추위를 쫒을 수 있어 5~6시간 물질을 할 수 있었다. 해녀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해녀의 작업 도구는 단출하다. 잠수안경과 테왁, 망사리가 주된 작업 도구다. 잠수안경은 물질하는 해녀의 ‘눈’이다. 원래 해녀들은 맨눈 그대로 물질에 나섰지만 1900년대 초 교활한 일본인 상인들이 해녀들에게 잠수안경을 보급하기 시작했다.

 

테왁은 부력을 이용해 그 위에 가슴을 얹어 헤엄치는 도구다. 망사리는 테왁 밑에 달아 채취한 해산물을 넣어두는 주머니다. 작은 그물망인 ‘좀망사리’는 허리춤에 착용해 물속에서 잡은 해산물을 넣는 주머니다.

 

바닷속 바위에 달라붙은 전복을 떼어낼 때 길쭉한 쇠붙이인 ‘빗창’을 쓴다. 해조류를 캘 때는 ‘정게호미’를, 성게·문어 등은 ‘골괭이(골각지)로 잡는다.

 


◆ 제주해녀, 항일투쟁 이끌다

 


 


1930년대에 들자 해녀가 채취한 해산물에 대해 수수료를 지나치게 많이 매기는 등 일본 관헌인 해녀조합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김옥련을 비롯한 해녀들은 해녀조합에 대항, 해녀회를 조직해 단결을 시작했다. 해녀들의 시위·습격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1931년 12월 하도/종달/세화/우도/시흥/오조리 지역 해녀 1700여명이 항일투쟁 전면에 나섰다. 투쟁은 이듬해 1월 7일과 12일 오일장날에 대규모 시위로 전개됐다.

 

이에 일제 경찰은 무력으로 탄압했다. 김옥련 해녀 소녀회장과 부춘화 해녀회장 등 항일투쟁 주동자들은 6개월 간 경찰서에서 고문과 취조를 받았다. 이 외에도 많은 해녀가 투옥됐다.

 

정부는 2003년 8월 김씨와 부씨에게 건국훈장 포장을 수여하고 독립유공자로 선정했다. 김씨는 2005년 향년 98세로, 부씨는 1995년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 지난해 기준 4377명 … 줄어들고 늙어가는 해녀

 

 


지난해 말 기준 도내 해녀는 4377명. 30대가 10명, 40대 53명, 50대 563명, 60대 1411명, 70대 1853명, 80대 487명이다.

 

1970년만해도 1만4143명의 해녀가 물질에 나섰다. 그러나 1980년에 7804명으로 반절로 줄었다. 이후 ▲1990년 6827명 ▲2000년 5789명 ▲2010년 4995명이다.

 

지난해 말 기준 최고령 해녀는 제주시 구좌읍 우도면 이봉숙(94)씨, 최연소 해녀는 제주시 추자면 정소영(33)씨다. 도내 해남(海男)은 최성열 씨 등 7명이 있다.

 

제주여성의 표상인 해녀는 최근들어 줄어들고 있다. 또 늙어가고 있다. 이는 여성들의 고학력화와 산업구조의 다양화로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힘든 노동을 기피하고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물질을 시키지 않는 것도 해녀 감소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해녀는 1970년대~1980년대 급감해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또 해녀의 고령화로 물질사고도 잦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이 이렇자 해녀문화를 되살리려는 움직임도 일고 있다. 제주시 한림읍 주민자치위원회는 2008년 5월 ‘한수풀 해녀학교’를 만들었다. 학교에서는 이론 강의와 물질을 가르친다.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해녀 실습과정이다. 첫 졸업생 30여명 시작으로 올해 기준 총 491명을 배출시켰다. 그러나 이들 중 현업 해녀 종사자는 9명에 불과하다.

 

서귀포시에는 법환해녀학교가 운영중이다. 법환해녀학교는 지난해 개교했다. 1년에 1회 해녀양성과정을 개시, 수강생 30명을 받고 있다. 현재까지 졸업한 학생 수는 60명. 이 중 지난해 졸업생 7명이 현업 해녀로 종사하고 있으며 올해 졸업생 18명이 인턴 해녀로 정착을 준비하고 있다.
 

 

◆제주해녀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까지

 

 


제주해녀문화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 까지는 5년이 소요됐다.

 

유네스코에 등재되기 위해선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를 신청하는 문화유산은 당사국 목록에 등재돼 있어야 한다.

 

이에 제주해녀는 제주도해녀문화 보존 및 전승위원회의 검토를 거쳐 2011년 문화재청 문화재위원회로부터 확정 통보를 받았다. 제주해녀는 무형문화유산 예비목록 5번으로 등록됐다. 본래 제주해녀문화는 지난해 등재목표로 2014년 3월 31일 유네스코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2015~2016년 심사방침에 따라 지난해 등재가 무산됐고 올해 11월 말 등재결정이 예정됐다. 지난해 3월 31일에는 신청서를 보완 제출했다.

 

그리고 2016년 11월 30일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제주해녀문화가 등재됐다.

 

유산의 공식 명칭은 제주해녀문화(Culture of Jeju Heanyeo(Women Divers). 도내 약 4500여명의 해녀와 100개 마을 어촌계(마을어장 어업권), 잠수회, 제주해녀문화 보전 및 전승위원회가 대상이다.

 

또 이들의 10m 깊이의 바다 속 물질 작업과 바다에 대한 인지적 지도, 물때와 바람에 대한 지식, 물질 기술에 대한 집단(상군, 중군, 하군)과 잠수굿·풍어제 등 도 함께 등재된다.

 

사회관습과 의식, 축제, 자연과 우주에 관한 지식 및 관습, 구전 전통 및 표현, 공연예술, 전통공예 등도 포함된다. [제이누리=박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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