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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2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서하는 1038년 중국 서북부의 오르도스(Ordos)와 감숙(甘肅) 지역에 티베트 계통의 탕구트(Tangut, 黨項)족이 세운 나라다. 명칭은 대하(大夏)인데 송(宋)과 중국의 사서(史書)에서 고대 왕조인 하(夏)와 구분하여 서하(西夏)라고 부르면서 이 명칭으로 널리 알려졌다. 11세기∼12세기에 동서교역을 매개하며 유목과 농경, 불교문화가 결합된 독창적인 문화를 발달시키면서 내몽골(內蒙古)에서 돈황(敦煌), 난주(蘭州)에 이르는 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다. 1207년 몽골에 복속된 뒤, 1227년 칭기즈 칸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서하 왕릉은 영하(寧夏) 회족자치구 은천(銀川)시 서쪽 약 30㎞ 지점의 허란산(賀蘭山) 동쪽 기슭에 있는 황가 능이다. 사방 53㎢의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9기의 왕릉과 25기의 무덤이 있다. 현존 최대이며 지상의 유적이 잘 보전되어 있은 제왕의 무덤군이다. ‘신비한 기적(神秘的奇迹)’, ‘동방금자탑(東方金字塔)’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다.

 

왕묘(王墓)는 지상능원과 지하묘실의 두 부분으로 구분되며 능원은 모두 남향으로 배치돼 있고 평지에 조성돼 있다. 또한 북에서 남으로 문결(門闋), 비정(碑亭), 외성(外城), 내성(内城), 헌전(獻殿), 능대(陵台), 사방의 담으로 돼 있다. 능대는 팔각형과 원형 두 종류가 있으며 높이는 약 17∼20m로 동일하지 않다. 서하 왕릉 각각의 능원(陵园) 면적은 모두 10만㎡이상으로 규모가 매우 크며 외형이 불탑과 비슷하다. 중원의 사각형 능묘와 차이가 있다. 능묘의 내부는 앞부분이 좁고 후방이 넓은 사각형의 묘실로 양측 모두 깊이가 25m에 달한다. 토굴묘 형식으로 석마(石馬), 동우(銅牛) 등과 각종 금장식, 진주, 자기 등의 문물이 출토됐다.

 

 

 

 

서하 왕조가 건립 될 때 기본적으로는 당시 중원의 북송 왕조의 정치, 경제 제도의 영향을 받았고 동시에 위구르 문화와 토번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탕구트 족은 창조성이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강족(羌族) 문화를 계승해 자신들만의 특색을 갖춘 서하문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후대 원(元)나라 사람들이 역사를 편찬할 때 서하에 대해 송(宋), 요(遼), 금(金) 3국의 옛 사초만을 근거로 해 분량이 많지 않은 전기식 기록만 남겼다. 결국 사료의 부족으로 서하에 대한 연구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됐다.

 

여기에서 가장 큰 문제가 우리들에게 남겨져 있다. 서하 정권이 멸망한 후 탕구트 족들은 어디로 갔을까? 서양학자나 중국학자들 모두 관심을 갖고 있는 문제다. 700여 년의 능곡의 변천으로 단일 민족 중 다시는 서하 유민이 출현하지 않고 있다. 서하의 말을 하는 사람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영원히 서하 유민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사람도 있다. 이 결론은 성급한 것일까? 역사 기록을 근거로 드러난 편린만을 가지고 중국과 외국 학자들은 서하의 후예들의 행방을 대략 6가지로 추론하고 있다.

 

첫째는 원(元) 왕조의 통치자들에게 투항했을 것이라 본다. 서하 멸망 후 탕구트 족의 통치 계급 중 일부는 원 왕조에 투항했고 원 왕조는 그들을 중시해 ‘색목인’ 계열로 대우했다.

 

둘째는 금(金) 왕조에 투항했다고 본다. 『금사․서하전』 기록에 따르면 일부 서하 유민들이 금나라에 투항해 하남 신양(信陽), 방성(方城) 일대에 정착했고 나중에 점차 한족에게 동화됐다.

 

 

 

 

셋째는 동쪽으로 이주했다고 본다. 하북 보정(保定) 북쪽 한장(韓莊)에서 출토된 서하문자 ‘勝相幢(승상당, 부처의 이름·불교의 경문을 새긴 돌기둥)’은 명대 홍치(弘治) 15년(1502)에 세워졌는데 기록된 인명 중에 탕구트 사람의 성씨가 있다. 이것은 서하가 멸망한 후 일부가 하북으로 이주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서하가 멸망하고 270여 년 후 보정 지역에 탕구트 인들이 있었다. 이외에 원(元) 지정(至正) 5년(1345)에 거용관(居庸關)에 건조된 석각에도 나린(납린納鱗), 즈먀오미통(지묘미통智妙彌通) 등의 탕구트 사람들이 공사에 참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넷째는 남쪽으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천(四川) 강정(康定) 목아(木雅) 지역의 장족(藏族) 일부는 서하 유민이다. 영국, 미국, 프랑스 학자들이 조사한 적이 있고 최근에 영하(寧夏)사회과학원의 서하 전문가 이범문(李范文)도 조사했는데 일부 탕구트 민족은 외적에게 투항한 망국노가 되지 않기 위해 ‘장정(長征)’을 했다고 봤다. 그들은 감숙성 남쪽을 돌아 송반(松潘)으로 몰려들었고 아세(阿細)와 반좌(班佐)에서 나와 금천하(金川河)를 돌아 단파(丹巴), 건녕(乾寧)을 경유, 목아(木雅)에 도달한 후 심산계곡에 작은 나라를 세웠다고 했다.

 

다섯째는 각 민족 중에 숨어 지내다가 자신들의 민족성을 잃었을 가능성이 있다. 서하가 멸망한 후 불교를 믿던 탕구트 인들 중 일부는 서하 땅에 여전히 거주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탕구트 민족이라 하지 않고 성씨와 이름을 바꾸면서 각 민족과 융합됐다고 보기도 한다.

 

 

 

 

감숙성 남부 지역에 아직도 여타 민족들과는 언어와 풍속 습관이 다른 민족이 살고 있다. 그들이 서하 유민일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물론 선비(鮮卑)의 토욕혼(Tuyuhun, 土谷渾)의 원시 거주민들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렇게 본다면 여러 가지 이유로 서하 후예들의 거취에 대해 아직까지도 정답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인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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