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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2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해릉양왕 완안량(海陵煬王 完顔亮 1122-1161년)은 금나라 제4대 황제(1149-1161년)였으나 폐위돼 해릉왕으로 강등된 인물이다. 자는 원공(元功), 여진(女眞) 이름은 디구나이(迪古乃)다. 해릉왕으로서의 시호는 양(煬)이고 폐위된 황제임을 강조할 때는 폐황제(廢皇帝)라고 한다. 연호는 천덕(天德), 어머니는 대(大) 씨이고 황후는 여진 귀족의 도단사야(徒單斜也)의 딸인 도단황후(徒單皇后)다. 중원문화의 애호가였으며 한족을 중용해 국가 기구의 한족화와 황제권의 독재화를 도모했다. 희종(熙宗)을 주살하고 황위에 올랐다. 남송(南宋) 평정을 꾀해 남벌을 시작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반란군 장수 완안원선(完顔元宣)에게 시해당한 뒤 폐위됐다. 금나라 역사상 첫 번째 폐제다.

 

 

 

 

20세기 80년대 중국에서 침식조차 잊어버리고 경청하던 유명한 『악비전(岳飛傳)』을 본 인물이라면 중국의 민족 영웅 악비의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당시 여진족이 나라를 세워 금(金)이라 했다는 것도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금나라에 유명한 황제 해릉왕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해릉왕 완안량은 금 태조 아골타(阿骨打)의 서장자인 요왕(遼王) 종간(宗幹)의 차남이다. 즉위 후 모든 것을 동원해 상경(上京)의 토호세력을 궤멸시키고 중경(中京, 현 북경)으로 도읍을 옮겨 강력한 개혁을 추진하면서 여진 사회의 봉건국가의 기틀을 세운 인물이다. 동시에 자신의 선조들의 상무정신을 계승해 말과 화살을 놓지 않았다. 그러면서 신하들이 사냥을 할 때 백성들을 어지럽히지 못하게 하고 농사철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위반하는 자는 엄벌에 처했다. 이런 것만 보면 해릉황은 명석한 군주에 속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기는 하다. 사실 해릉왕은 금 왕조의 발전에 초석을 쌓은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그의 호색의 정도와 음란한 행위다. 여자를 탐하고 특히 남의 부인을 탈취한 일이 한 둘이 아니다. 그 목적은 단순하다. “천하의 미색을 얻어 처로 삼는다”는 데에 있었다. 중국 역사상 3000궁녀를 거느리며 무도한 황음을 자행했던 황제는 많고도 많으나 유부녀를 탐한 패륜의 황제는 그리 많지 않다.

 

귀비(貴妃) 정가(定哥)는 화용월태(花容月態)의 미인이었다. 원래 숭의절도사(崇義節度使) 오대(烏帶)의 처였는데 일찍부터 해릉왕과 사통했다. 오대가 변강을 지키면서 절기 때나 해릉왕 생일 때 가노 갈로(葛魯)와 갈온(葛溫)을 파견해 배알했는데 정가도 시비 귀가(貴哥)를 보내 문안했다. 해릉왕은 귀가를 통해 정가에게 “예로부터 천자는 두 명의 황후를 들였다. 당신 남편을 죽이고 나와 함께 하지 않겠는가?”라고 전하라 했다. 귀가가 돌아간 후 해릉왕의 말을 정가에게 전했다. 정가는 “젊었을 때 군왕이 부정직해 부끄러운 일들을 저질렀는데. 지금 성인이 되고 나서도 젊었을 때처럼 제멋대로 구는구나”라고 탄식했다. 해릉왕이 듣고는 계책을 세웠다. 사람을 보내 정가에게 “네가 차마 남편을 죽이지 못하여 망설인다면 내가 장차 너희 가문을 몰살시키리라”고 전했으나 정가는 움직이지 않았다. 하루는 오대가 만취하자 해릉왕은 갈로와 갈온을 시켜 목 졸라 죽여 놓고는 고양이가 쥐 생각하는 것처럼 거짓으로 슬퍼했다. 오대를 장사지내고 얼마 되지 않아 기다릴 수 없다는 듯이 정가를 처로 맞아 귀비에 봉했다. 그리고 늘 그녀와 수레를 타고 유람을 떠나면서 다른 비빈들은 걸어서 따라오게 했다.

 

 

 

 

여비(麗妃) 석가(石哥)는 정가의 동생으로 비서감(秘書監) 문(文)의 처였다. 해릉왕이 아름다운 자태의 그녀를 보고는 넋이 나가 버렸다. 어떻게든 궁으로 데리고 올 심산으로 문의 서모(庶母) 안도과(按都瓜)에게 “당신의 며느리를 반드시 이혼시키시오. 그렇지 않으면 내 다른 조치를 취하겠소”라고 하자 안도과는 해릉왕의 말을 문에게 알렸다. 문은 어찌할 방도를 찾지 못했다. 안도과는 탄식하며 “황상이 다른 조치를 취하겠다는 것은 너를 죽이겠다는 말이다. 어찌 아내 한 명 때문에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말이냐?”라며 권했다. 부부는 어찌할 도리 없이 울면서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해릉왕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었지만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문을 궁으로 들라해 석가로 하여금 더러운 말과 욕지거리로 모욕을 주게 하면서 웃음거리로 삼았다.

 

소비(昭妃) 아리호(阿里虎)는 처음 아호질(阿虎迭)에게 시집을 가 딸 중절(重節)을 낳았다. 수화폐월(羞花閉月)의 용모를 지닌 중절을 본 해릉왕은 가슴이 뛰는 것을 참지 못해 그녀와 음란을 즐겼다. 아리호가 알고 노기를 참지 못해 중절의 뺨을 때려 해릉왕의 노여움을 샀다. 황위에 올라 종실을 대대적으로 주살한 후 해릉왕은 부녀자들을 모두 석방했다. 그녀들 중 미색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릉왕은 그녀들을 궁으로 데려가기 위해 사람을 보내 대신 소유(蘇裕)에게 “짐의 후대가 아직도 많지 않소. 이 부녀자들 중 짐의 친척이 많으니 그들을 궁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어떻겠소?”라고 물었다. 소유는 “최근 종실을 대대적으로 주살하여 조정 내외에 말들이 많습니다. 어찌 또 이런 일을 저지르시려고 하십니까?”라고 했다. 그러나 해릉왕이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니 소유는 어쩔 수 없이 찬성할 수밖에 없었다. 해릉왕은 자기의 음욕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종친조차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 역사상 모든 황제들은 수천의 비빈을 거느렸다. 그러면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 황제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해릉왕과 같이 분노를 살 정도로 극악무도한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문헌 기록에 의하면 당시 남편이 있는 궁인은 순번대로 해릉왕을 시봉하도록 했다고 한다.

 

해릉왕이 품고 싶은 궁인이 있으면 그녀의 남편을 상경으로 보내고 아내를 남겨 두도록 했다. 그는 늘 교방의 악공들을 순번대로 궁에 남게 해서는 부녀자와 잠자리를 할 때 음악을 연주하도록 했다. 그리고 장막을 거두게 하고 자신의 행위를 만인이 볼 수 있도록 했다. 어떤 때는 사람을 보내 욕지거리를 하게 하면서 즐기기도 했다.

 

여사(女使) 벽라(辟懶)가 궁 밖에 남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해릉왕이 그녀를 현군(縣君)으로 봉한 후 자신이 품으려 했다. 그런데 벽라는 이미 임신한 상태였다. 임신 반응이 나오자 해릉왕은 질투에 노기충천하여 그녀에게 사향수(麝香水)를 사사하고 자신이 직접 그녀의 배를 걷어차 강제로 낙태를 시키려고 했다. 벽라는 해릉왕에게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작은 생명만은 살려달라고 애걸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결과는…….

 

 

 

 

해릉왕이 황음무도했던 원인은 정치적 요소와 사회 습관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행위는 정권 내부의 모순을 격화시켰다. 자신의 정권을 유지할 수 있게 만든 주변 인물들과 대척하면서 자신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오림답씨(烏林答氏)는 완안옹(完顔雍, 금 세종世宗)의 처이다. 왕안옹은 금 태조의 손자로 해릉왕이 종실을 지극히 싫어하는 위험한 시국을 맞아 자신의 처 오림답씨의 건의를 받아들여 많은 보물을 해릉왕에게 선물해 위기를 모면했다. 해릉왕은 완안옹이 고분고분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완안옹은 외직에 있었다. 오림답씨도 언제나 남편과 함께 하면서 금실 좋게 지내고 있었다. 그런데 해릉왕은 이미 오림답씨와 같은 미녀에 대해 침을 흘리며 빼앗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완안옹이 제남윤(濟南尹)으로 파견될 때 해릉왕은 기회를 잃을까 염려해 처를 연경에 인질로 남겨 두라고 명령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해릉왕은 완안옹을 제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음욕을 채울 기회를 자연스레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오림답씨는 궁리했다. 만약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연경으로 가지 않으면 완안옹은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고 명령대로 행한다면 자신의 몸은 결국 해릉왕에 의해 더렵혀질 것이 분명했다. 존엄을 지켜야 하느냐 치욕을 감수하느냐 선택의 기로에서 대의를 따랐던 오림답씨는 결국 자신을 바쳐 남편을 구하는 길을 선택했다. 완안옹과 결별한 후 오림답씨는 연경에서 70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는 하북(河北) 양향(良鄕) 고절진(固節鎭)에서 투신해 죽는다. 해릉왕의 음란한 명령 한 마디가 완안옹의 금슬 좋은 가정을 비극으로 몰아간 것이다. 오림답씨의 죽음은 완안옹이 황제의 자리를 빼앗을 결심을 하게 되는 촉매제가 됐다.

 

해릉왕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했을까? 자신이 이루고자 했던 “천하절색을 얻어 모두 처로 만들 것이다”는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의 목숨을 앗아가는 원인이 됐다. 1161년 해릉왕은 남침을 시작한다. 남송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얻을 심산이었다. 중국을 통일하려는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백성을 전란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아니면 아름다운 미인이 많은 장강을 손에 얻어 미색을 얻기 위해?

 

 

 

 

암암리에 세력을 결집한 완안옹은 남벌의 기회를 틈타 요양(遼陽)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동북지역을 손에 넣었다. 같은 해 11월 해릉왕은 대군을 이끌고 남정했으나 채석기(采石磯)에서 남송 우윤문(虞允文)에게 패배한다. 그리고 양주(揚州)에서 장수 왕안원의 등에게 피살된다.

 

이미 칭제한 왕안옹은 해릉왕이 저지른 음란한 죄명을 생각하며 해릉왕으로 강등시키고 시호를 양(煬)이라 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해릉왕은 아예 해릉서인(庶人)으로 낮춘다. 역사에서는 해릉왕이라 부른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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