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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룡의 '담담(談談)클리닉'(16) 전차의 딜레마 vs. 육교의 딜레마

 

세상을 살다보면 어느 선택만이 반드시 옳다고 볼 수 없는 많은 도덕적 딜레마를 만나게 된다. 『정의란 무엇인가』(마이클 샌델. 김영사. 2009)에도 도덕적 판단과 관련된 유명한 딜레마들이 나온다. ‘전차 딜레마’도 그 중에 한 가지다.

 

“탈선한 전차가 다섯 사람을 향해 달리고 있다. 현재대로 계속 간다면 모두 죽게 된다. 이들을 구할 방법은 스위치를 눌러서 전차의 방향을 다른 선로로 바꾸는 것뿐이다. 이 경우 다섯 사람 대신 한 사람이 희생된다. 한 사람을 희생시키더라도 다섯 사람을 구하기 위해 전차의 방향을 돌려야 하나?”

 

이 상황에서는 전차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실제로 인터넷 설문조사 결과 20만 명 이상의 사람 중 89%가 돌려야 한다고 말했다. 당장 철학적으로는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가 떠오른다.

 

이번에는 상황이 다른 딜레마다.

 

“전차가 다섯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다. 당신은 선로 위를 지나는 육교 위에 덩치 큰 낯선 사람과 함께 서 있다. 앞에서는 전차가 다가오고 있고, 아래 선로에서는 다섯 명의 인부가 있다. 몸집이 큰 낯선 사람을 육교에서 밀어 선로로 떨어뜨리면 반드시 전차를 멈추게 할 수 있다. 낯선 사람은 죽겠지만 다섯 명의 인부는 목숨을 구할 수 있다. 낯선 사람을 밀어서 다른 다섯 명을 구해야 할까?”

 

이것을 '육교 딜레마'라고 하자. 이번엔 앞선 ‘전차 딜레마’ 때와는 결과가 전혀 달랐다. 오히려 아니라는 대답(“낯선 사람을 밀어서는 안 된다.”)이 훨씬 많았다. ‘육교 딜레마’는 철학적으로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는 그 결과가 아니라 동기에 있다는 칸트의 의무 동기가 얼핏 떠오른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두 가지 딜레마에서 실질적인 숫자 차이는 없는데 대답은 왜 다른가? 왜 사람들은 공리주의자가 되었다가 의무 동기의 칸트주의자가 되었다가 하는 걸까?

 

하버드 교수 조슈아 그린(Joshua Greene)은 첫 번째 상황은 개인의 감정이 덜 개입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왜 인간인가?』.마이클 가자니가. 출판사 추수밭. 2008). 첫 번째 상황에서는 버튼을 누르는 것 외에 아무런 신체적 접촉이 없지만 두 번째 상황에서는 낯선 사람의 몸을 밀어내야 하는 직접적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시 도덕적 판단을 해야 하는 딜레마 상황 차이에 따라 활성화되는 뇌 부위가 다른 걸까? 그랬다. 과연 달랐다. 위 그림은 내 오랜 동료이자 친구 Jo가 나에게 보내준 파워포인트 자료 사진이며 이 사진에 대한 각각의 표현 역시 그가 보내준 자료에서 상당부분 발췌한 것이다.

 

첫 번째 전차 딜레마에서는 DLPFC 부위가 활성되었다. 이 부위는 전화번호를 외우는 등의 인지과정과 관련된 영역이라고 한다. “한 명을 희생해서 다섯 명을 구한다고? 괜찮은 계산 같은데...” 상대적으로 비개인적 딜레마다. 개인의 감정 개입이 덜 요구되는 추상적 추론 및 문제 해결에 관련된 부위인 것이다. 비유하자면 공리주의적 결정을 한다.

 

두 번째 육교 딜레마에서는 vmPFC 부위가 활성되었다. “안돼. 그 남자를 밀지마!” 이 부위는 감정이 개입된 결정을 내리는데 중요한 영역으로 밝혀졌다. 상대적으로 개인적 딜레마다. 개인의 감정 개입이 보다 직접적으로 요구될 때는 바로 이 부위가 활성화되었다. 비유하자면 칸트의 의무 동기를 결정하는 부위다.

 

Jo가 보내준 자료에는 상대적으로 개인적 딜레마에서 활성되는 부위(감정이 개입된 결정을 내리는데 중요한 영역)가 손상된 환자들이 내린 결과도 보여 주었다. 그들은 전차 딜레마에서는 일반인들이 답한 비율과 별다른 차이가 없었지만 ‘육교 딜레마’에서는 훨씬 높은 비율로 남자를 미는 공리주의적 결정을 내렸다. "이 낯선 남자 '한 명'만 내가 밀어버리면 '다섯 명'의 인부를 구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유별나게 공리주의적 결정이 많았다.

 

반대의 경우(비개인적 딜레마 영역이 손상된 환자)에 대한 자료는 없었지만, 모니터에 5가 지나갈 때마다 버튼을 누르기와 같은 실험적으로 DLPFC 부위(공리주의적 결정에 활성화되는 부위)에 인지적 부담을 가중시켰을 때 공리주의적 응답을 하는 속도가 늦어졌다.

 

위에 제시된 환자와 실험은 DLPFC가 (비유하자면) 공리주의적 결정을 하는데 활성화되는 부위고 vmPFC가 보다 직관적이고 개인적인 의무 동기(?) 결정을 하는데 활성화되는 부위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제시한 것이다.

 

친구 Jo는 서론으로 이러한 자료들을 제시한 후 직관적이고 즉각적이며 용량이 클뿐더러 부지런한 시스템Ⅰ과 보다 합리적이고 자제력이 있지만 용량이 작고 게으르게 작동하는 시스템Ⅱ을 대비시켜 인지치료에 대한 방법까지 진행시켜 나갔다. 그것에 대해서는 여기서 더 이야기할 성질이 아니다. 솔직하게 필자의 생각을 말한다면 앞서 이야기한 도덕적 딜레마, 각각 활성화되는 뇌 부위, 철학적 진영 비유들과 Jo가 제시한 시스템I과 시스템II를 직접 대입시킨다는 것은 논리적, 신경학적으로 상당한 오해와 무리가 따른다.

 

실제 세상에서 만나는 복잡한 딜레마들은 비개인적인 혹은 개인적인 딜레마가 어떤 비율로 섞여있는지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 게다가 같은 사안도 사람마다 보다 비개인적인 영역으로 혹은 개인적인 영역으로 다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더욱 복잡해진다.

 

같은 사안에 대한 도덕적 판단에 있어서도 뚜렷하지는 않을지언정 철학적으로 비유해서 표현하자면 보다 ‘공리주의적 판단’을 하는 경향인 사람이 있고 보다 ‘칸트의 의무 동기적 판단'을 하는 경향인 사람이 있다. 도덕적 판단의 신경생물학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개인의 차이를 꺼내면 사람들은 그것은 당장 유전자와 그에 따른 선천적 뇌 활성 우세 영역 차이를 떠올리기 십상이지만 정신 차리자. 그것마저 선행 과업(도덕적 판단에도 신경생물학 차이가 있다는 글을 방금 읽었다)에 따른 암시(Suggestion) 효과(“그게 다 선천적 신경생물학 차이다!”)일 수 있다.

 

생각해 보라. 세상사 수많은 어떤 도덕적 딜레마 판단을 할 때 그가 "자라온 환경과 살아오면서 겪은 직간접 경험에 따른 영향" 차이도 크다고 봐야지, 당장 선천적인 유전자와 이에 따른 뇌 활성 영역 우세가 다르다는 것을 말할 일이겠는가. 물론, 이것마저도 환원적으로는 그가 겪은 환경과 경험이 결국 특정 영역의 뇌 활성 우세에 기여했을 수 있다고 말을 해 볼 수는 있겠다. 나 역시 Jo가 보내준 자료들 중에도 왜 하필 ‘도덕적 딜레마’라는 주제를 꺼내어 오늘 에세이를 썼는지 내 속으로만 대충 짐작 가는 게 있을 뿐이다.

이범룡은?
=제주 출생. 국립서울정신병원에서 정신과 전문의 자격을 취득했다. 2002년 고향으로 돌아와 신경정신과 병원의 문을 열었다. 면담이 어떤 사람과의 소통이라면,  글쓰기는 세상과의 소통이다. 그 또한 치유의 힌트가 된다고 믿고 있다. 현재 서귀포시 <밝은정신과> 원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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