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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32)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명(明) 태조(太祖 : 1328-1398) 주원장은 명 왕조의 창립자다. 호주(濠州, 안휘安徽성 봉양鳳陽현)의 빈농 출신으로 17세에 고아가 돼 황각사(皇覺寺)라는 절에 들어가 탁발승(托鉢僧)으로 여러 곳을 전전했다. 홍건적(紅巾賊)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부하가 되면서 두각을 나타냈고 곽자흥의 양녀와 결혼해 그의 사위가 됐다. 곽자흥의 군대가 분열되자 독자적으로 군대를 모아 세력을 키워나갔으며 원(元)나라 강남의 거점인 남경(南京)을 점령했다. 이때 그의 병력은 2만 명에 달했고 자신을 오국공(吳國公)이라고 칭했다. 홍건적 군대가 원나라의 공격을 받아 패퇴하자 남경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진우량(陳右諒)과 소주의 장사성(張士誠)과 전투를 벌여 마침내 모두 굴복시켰다. 1368년 남경에서 명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홍무(洪武)라 했다. 그리고 북벌군을 일으켜 원나라를 몽골로 몰아내고 통일을 완성했다. 『대명률(大明律)』을 만들었다.

 

 

 

 

중국 봉건 사회에서 독서 ― 과거 ― 관리는 출세 영달의 길이요 관리가 되는 것은 “조상과 가문을 빛내고”, “처가 봉호(封號)를 받고 자식이 벼슬을 하도록 할 수” 있었으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관리를 선발하는데 과거를 봐야 했다.

 

과거(科擧)는 현시(縣試), 원시(院試), 향시(鄕試), 회시(會試), 전시(殿試)로 나뉘어져 있었다. 전시는 황제가 친히 감독하는 것으로 삼갑(三甲)으로 나뉜다. ‘一甲’은 3명으로 진사 급제를 내리고 일등은 ‘장원’이라 했으며 이등과 삼등은 ‘방안(榜眼)’, ‘탐화(探花)’라 했다. ‘二甲’은 약간 명으로 일등은 ‘전려(傳臚)’로 진사와 같고, ‘三甲’도 약간 명으로 진사와 같은 등급을 내렸다. 전시의 상징적 의의는 실제 의미보다도 중했다. 전시가 끝나면 과거의 등급에 따라 경성이나 지방에서 관리가 되는 권리를 누렸다.

 

명나라 초기에 인재를 모아 천하의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주원장은 과거를 중시했다. 홍무 17년 정식으로 과거 규정을 반포했다. 홍무 18년 시험관을 정했다. 주 시험관 2인, 시험관 8인, 기타 회시제조관(會試提調官), 수장시권관(收掌試卷官), 미봉관(彌封官), 예록관(譽錄官) 등 체제가 완비됐다. 문장의 좋고 나쁨을 기준으로 과거를 치러 관리를 채용했다.

 

그러나 홍무 30년, 주원장은 평상시와는 전혀 달리 ‘남북방(南北榜)’ 사건을 만들어 ‘지역’에서 관리를 뽑았다. 어찌된 일인가? 사건은 시험장 소란으로 인해 발생했다.

 

홍무 30년 3월 5일은 3년에 한 번 치르는 ‘회시’를 보는 날이었다. 그날 황제의 조서가 내려지자 사람들이 들끓었다. 방에 나붙은 사람은 모두 남방 사람들이었다. 북방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갑자기 소요가 일었다. 낙제한 수험생들이 무리를 이루어 예부로 몰려가 대질을 요구했다. ‘황가 경찰’ 금의위(錦衣衛)가 진압했다. 거리마다 주 시험관이 동향인을 감싸 안았다고 책망하면서 반드시 속사정을 파헤쳐야 한다는 전단이 붙여졌다. 시험장 소란은 남북이 대치하는 정치 운동으로 번졌다. 주원장은 사태가 중하다고 판단하고는 즉시 회시 주시험관 유삼오(劉三吾)를 불러 상황을 파악했다.

 

원래 당시 시험에 어떤 불법도 없었다. 남북의 수험생들이 성적은 사실과 같았다. 남방의 수험생들의 성적이 확실히 북방의 수험생들의 성적보다 앞섰다. 그러나 인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주원장은 북방 수험생 중에 합격자를 몇 명 뽑으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유삼오가 반대하며 거절했다. 화가 난 주원장은 유삼오를 궁성에서 쫓아내고 이전의 주시험관 백신도(白信蹈)를 정직시킨 후 시험지를 재심하라고 명령했다. 북방 수험생들이 그 소식을 듣고 만세를 불렀다. 회시 재심은 모든 사람이 주시하는 중심이 됐다.

 

 

 

 

4월 13일 주원장이 친히 봉천전(奉天殿)으로 나가 재심 결과를 들었다. 6부 9경의 관원들과 주시험관이 함께 있었다. 재심을 주제하는 한림원 시강(侍講) 장신(張信)은 대중 앞에서 몇 명의 북방 수험생들의 답안지를 평점 했다. 그는 처음에는 북방 시험생의 시험지도 받아들일만하다고 하다가 나중에는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화제를 답안지의 문제에 대해 논하면서 북방 수험생의 답안지가 확실히 남방 수험생의 답안지보다 못하고 시험관은 결코 한 편만 감싸 안은 게 아니라고 했다.

 

주원장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대노했다. 곧바로 관원들이 서로 비호한다고 책망한 뒤 수준이 높이 않은 답안지를 황제에게 가지고 오라고 명했다. 그리고 일률적으로 이전 결과는 무효라 선언하고 자신이 직접 재심하겠다고 선포했다. 사건은 크게 번져 버렸다. 주시험관은 체포돼 감옥에 갇힌 후 고문을 당했다. 그들의 집안사람들도 혹형을 받았다. 결국 그들은 십 몇 년 전의 호유용(胡惟庸), 남옥(藍玉) 반역 사건과 연루시켜 모두 처형시켜 버렸다.

 

5월 초 조정은 재심 결과를 선포했다. 새로 뽑힌 61명의 공사(貢士)는 모두 북방 사람들이었고 남방 사람은 한 명도 뽑히지 못했다. 이를 역사에서는 ‘남북방(南北榜)’이라 부른다.

 

이런 사건이 다시는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홍희(洪熙) 원년에 남방에서 60%를 뽑고 북방에서 40%를 뽑는 남북 시험제를 제정했다. 선덕(宣德), 정통(正統) 연간에 남북에서 각각 5명의 인원을 중원 지역 수험생들에게 할당하게 해 지역 간 균형을 맞추도록 했다. 이때부터 명나라 과거는 순수하게 성적만으로 뽑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 따라 정원을 안배해 관리를 뽑는 제도가 굳어졌다.

 

이 ‘남북방’ 사건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주원장이 만든 허위로 조작한 억울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정직한 관원들이 전제 황권 제도 아래 무고하게 참살을 당했으니 주원장은 폭군이며 어리석은 군주라 폄하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전국적인 정치 경제 형세를 감안한다면 대국적인 견지에서 주원장의 그런 조치는 고심 후 도출한 것임은 분명하다.

 

주원장이 극단적인 조치를 취한 것은 북방 지식인들의 불평을 잠재워 국가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남북의 경제 문화 사이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북방은 원나라 정권의 통치 아래 놓여 백성이 편안히 생활할 수가 없었고 경제가 낙후됐을 뿐만 아니라 문화도 발달하지 못했다. 반면 남방은 경제가 번영하고 문화가 창성했다. 객관적으로 남북이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만약 문장이 좋고 나쁨으로 간단하게 관리를 뽑는다면 남방 출신의 관리가 많아질 수밖에 없고 북방 사람들은 두각을 나타내는 일이 영원히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북방의 낙후한 지역의 발전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 분명하고. 북방 사람들의 불만이 쌓이게 되면서 국가 정국의 안정에 악영향을 미칠 것은 자명했다. 지역을 안배해 관리를 뽑으면 지역적 차이를 해소할 수 있고 지역의 모순을 해결함으로써 통치에 이익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북방의 지역적 중요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북방은 원래 원나라의 통치 중심이었으며 당시 군사 요충지였다. 명나라 초기 북방 지식인들은 명 왕조에 의탁하지 않고 관망적 태도를 보였다. 그런 까닭에 북방의 지식인들을 껴안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만약 답안지의 성적만을 가지고 고립적이고 단편적으로 논한다면 남북의 문제는 쉽게 해결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것이다. 장신과 같은 문인들의 정직함은 높이 평가할 것이나 그들은 ‘성의(聖意)’를 거스름으로써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주원장이 성적으로 관리를 뽑지 않은 것은 결코 단순한 과거 제도의 개혁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참혹한 정치 투쟁이었다.

 

과거라는 시험은 그렇게 정치적 도구가 돼 다시 동양 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막는 장애물이 돼 버렸다. 오직 유학, 그것도 문장의 호오를 가지고 관리를 뽑고 더욱이 황제의 정쟁의 수단으로 변질했으니…….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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