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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3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정화(鄭和, 1371-1435), 성은 마(馬), 아명은 삼보(三保), 운남(雲南) 곤양(昆陽, 현재 진녕晉寧) 사람이다. 명 왕조의 환관이며 항해가다. 영락(永樂) 3년(1405) 사상 처음 선단을 거느리고 사절로 ‘서양西洋’을 향해 나갔다. 나중에도 몇 차례 더 항해를 했는데 28년간 7차례나 ‘서양’으로 나갔다. 그의 족적은 아프리카 동안과 홍해까지 다다라 중국과 아시아, 아프리카 여러 나라와 문화, 경제 교류를 촉진시켰다.

 

다시 말해 명(明) 왕조 삼보 태감 정화는 원래 마 씨다. 12세 때 연왕부(燕王府)에 들어가 환관이 됐다. 주체가 기병해 황위를 찬탈할 때 정화도 종군했다. 전투에 임하면서 여러 차례 전공을 올려 주체가 영락 황제로 즉위한 후 내궁감(內宮監)의 태감으로 발탁됨으로써 지위 높은 공신이 됐다. 주체는 그를 무척 신임했다. 그래서 ‘서양’으로 나가는 중임을 정화에게 맡겼다. 영락 3년(1405)에서 선덕(宣德) 8년(1433)까지 29년 동안 정화는 명 성조 주체와 선종 주첨기(朱瞻基)의 명을 받아 방대한 선단을 이끌고 모험하며 7차례나 서양을 향해 항해했다. 30여 개의 나라와 지역을 거쳐 가장 먼 곳인 아프리카 동부와 홍해 연안까지 다다랐다. 당시로서는 원거리 항해로 세계 항해사상 일대 기적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명 성조는 왜 정화를 파견해 서양으로 가게 했을까? 정화가 여러 차례 위험을 무릅쓰고 오랜 기간 항해한 것은 일반적인 관광도 아니요, 그렇다고 어떤 외교적 방문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화가 출항해 탐험한 것은 장사를 위한 것일까 아니면 다른 비밀스런 사명이 있었던 것일까?

 

정화의 항해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전한다. 하나는 건문제(建文帝)를 찾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명사․정화전』에 “성조는 혜제(惠帝)가 해외로 망명했다고 의심해 종적을 알고자 했다. 그리고 군력을 자랑해 중국이 부강함을 이역에 알리고 싶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혜제란 곧 건문제를 가리킨다. 다 아는 바대로 건문제는 번(藩)을 없애려고 하면서 넷째 숙부 주체를 화나게 만들었다. 결국 주체가 거병해 반란을 일으켰다. 주체가 정난을 일으켜 남경을 함락시킨 이후 건문제의 행방이 묘연해 졌다. 사람도 찾을 길이 없었고 시체 또한 찾지 못했다. 자신의 정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주체는 급히 건문제를 찾았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들리는 말로는 건문제가 바다로 나가 ‘서양(西洋, 현재의 남양南洋)’ 일대에 숨었다고 했다. 황위를 찬탈한 명 성조는 그가 권토중래할 것이 두려워 전투 경험이 있는 심복 정화를 바다로 보내 찾게 했다. 황제 복위의 후환을 없애기 위해서. 그러나 당시로써는 광대무변한 이역에서 곤경에 빠진 황제를 찾는다는 것은 모래에서 바늘 찾기와 무엇이 다르랴. 정화는 실종된 혜제를 쉽게 찾아내지 못해 7차례나 ‘서양’으로 나서야 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점을 반대하는 사람도 많다. 첫째, 혜제는 해외로 피난하지 못하고 이미 경성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명대조실록』의 기록에 보면 연왕의 군대가 남경 금천문(金川門)을 돌파할 때 혜제는 궁에서 이미 불에 타 숨졌다고 했다. 혜제가 소사했는데 정화가 어디에서 혜제를 찾을 수 있었겠는가? 둘째, 성조가 이미 승기를 잡았는데 무엇이 두려웠겠는가? 셋째, 성조는 계산이 빠른 황제인데 해외로 도망친 혜제를 찾기 위해 그렇게 많은 무리를 동원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본다. 그리고 7차례나 해외로 나가 찾아보게 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 본다. 특히 30여 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혜제를 찾게 했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것이리라.

 

 

 

 

다른 이유를 얘기하기도 한다. 주체는 사람됨이 큰일을 하거나 공을 내세우기를 좋아해 정난 성공 후 세계 각지의 사람들이 중국으로 건너와 자신에게 조공을 바치기를 바랐다고 본다. 즉 주체가 정화를 해외로 내보낸 것은 자신의 천하의 권위를 떨치면서 각국의 황실과 대신들을 중국으로 초빙해 영접하려고 했다고 보는 것이다. 명사 전문가인 주홍(朱鴻)은 요지를 설명하면서 “정화는 성조의 명을 받아 서양으로 파견됐다. 성조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영락제는 찬위로 황위에 올랐다. 자신의 정통성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빼어난 업적을 끊임없이 알리려고 했다. 그런 배후 심리를 소홀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주체가 혜제만을 찾기 위해 강대한 선단을 파견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고 부차적인 임무였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정화가 거대한 선단을 대대적으로 이끌고 7차례나 ‘서양’으로 출항하고 30년에 가까운 오랜 시간동안 그렇게 많은 나라를 돌아다닌 중요한 목적은 “이역에 강대한 군대를 자랑하고 중국의 부강함을 과시하려 했다”는 데에 있었다. 영락 황제는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책략이 있는 군주였다. 중국내에서 백성이 평안하고 부유하기를 바란 만큼 주변 여러 나라들이 신하의 예의로 승복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친히 북방을 원정하면서 원나라 잔여 세력을 무력화 시키고 ; 동쪽으로는 여진을 토벌해 우환을 미연에 방지했으며 ; 다시 남쪽으로 손을 뻗었다. 관여할 여력이 많지 않으니 정화를 대신 보내 자신의 권위를 선양하게 했다. 강대한 선단을 보내 해외의 여러 민족을 굴복시키고 이민족을 교화시켜 사해 모두가 자신의 명을 받들고 여러 나라에서 조공하는 통일된 국면을 마련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고 보는 것이다.

 

정화가 처음 ‘서양’으로 출항해 해적 진조의(陳祖義)를 생포하고 수마트라 등 5국의 사신을 받아들였다. 가장 멀리 인도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된 영락제는 만족해했다. 정화가 귀국한 후 10일 후에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영락제에 의해 두 번째로 출국 명을 받는다. 그렇게 2번째 항해가 시작됐다. 정화가 3번째로 항해할 때 스리랑카 국왕이 백성을 못살게 굴고 정화 등을 살해하려 하자 그를 포박해 북경으로 데리고 갔다. 영락제는 스리랑카 백성들이 직접 현인을 선발해 군왕으로 삼으라는 명을 내렸다. 이러한 일화는 일순간 해외로 퍼져나갔다고 한다.(중국의 기록으로 스리랑카 국왕이라 하였으나 정확한 세계의 상식이 없던 시대임을 감안했을 때 부락이나 성읍의 우두머리 쯤 되는 것이라 판단하면 무리가 없다.)

 

 

 

 

그러나 ‘군대의 위세를 이역에 드높이려’ 항해를 했다는 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는 사람도 많다. 주체가 두 번이나 해외에 출병했으나 자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반격이었고 또한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지었을 뿐으로 의도적으로 확대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는 휘황찬란한 전과를 거두기를 바란 것이 아님을 증명한다고 본다. 사실 명나라 외교방침은 회유와 강화에 있었다. 북방을 정벌한 것은 원나라의 잔존 세력이 두려웠기 때문에 누차 원정한 것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화의 항해는 영락제 개인적 ‘야심’에 의한 것으로 자신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여러 차례 항해를 지시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영락 19년 주체는 북경으로 천도한다. 각 나라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정화는 또다시 6차 항해를 한다. 각국에 보낼 성대한 예물이 포함돼 있었다.

 

영락제가 죽은 후 아들 주고치(朱高熾)는 상서(尙書) 하원길(夏原吉)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양으로의 항해를 그만두게 했다. 몇 년이 지나 영락제의 손자 고첨기가 통치하는 시기에 경제가 발전하고 사회가 안정되자 선덕 황제는 다시 정화로 하여금 7차 항해를 명했다. 목적은 해외 각국에 중국의 황제가 바뀌었으니 조공을 바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정화가 방대한 대 선단을 이끌고 계속해서 항해한 것은 해외에서 호감을 얻어 황제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만도 없다.

 

다른 관점도 있다. 정화가 항해를 한 것은 해외 시장을 개척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조공무역이다. 정난이 끝난 지 3년이나 됐으나 국고가 비어있었다. 그리고 북경에 자금성을 세우느라 재물이 바닥이 난 지 오래였다. 이외에 군량미나 왕공귀족의 지출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무지막지한 액수였다. 그래서 국고가 빈 것을 메꾸기 위해 성조는 각지에 금은 광산을 개발하라 명하는 한편 모든 방법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해외 무역을 추진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조치는 정화를 ‘서양’으로 파견하는 것이었다. 중국의 비단, 도자기, 차와 각종 공예품을 배에 가득 싣고 나가 해외의 향료, 약제, 금음보화와 같은 귀중품과 바꿔오게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텅 빈 국고를 채우는 한편 궁정 왕부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정화의 선단을 ‘보물선’ 혹은 ‘서양에서 보물을 가져오는 선단’이라 불렀다. 정화가 피로함도 잊고 오랫동안 빈번하게 항해를 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고.

 

물론 이를 부정하기도 한다. 일찍이 명 성조는 정화와 함께 입조하는 외국 상인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도록 조령을 내린 적이 있다. 조그마한 이익을 얻기 위해 오욕을 감수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무슨 말인가 하면, 경제적 이익을 챙기기 위해 정치적 자긍심을 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정치적 이득이 있으면 됐지 경제적 이익은 그리 큰 관심사가 아니란 뜻이다. 그리고 명 성조가 정화에게 내린 항해 방침은 “후하게 주고 적게 받으라”는 것이었다. 돈을 버는 것은 그리 큰 게 아니라는 말이다.

 

보자. 방대한 선단이 7차례나 항해를 한다. 선단에서 먹고 마시는 것은 차치하자. 선박을 건조해야 한다. 외국 국왕이나 상인에게 후하게 줘야 한다. 한 곳도 아니요 동남아에서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까지 30여 곳이나 된다. 소모되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한 액수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매번 항해 때마다 막심한 손해를 봤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 텅 빈 국고를 채운단 말인가? 그리고 손해만 보는 항해를 30년 가까이 했으니 그 액수가 얼마나 됐을지…….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아직까지도 정론은 없다. 심지어 정화가 항해한 것은 ‘서양’이 아니라 ‘동양’을 향했다고 하기도 한다. 왜구의 침략으로 골머리를 앓던 명 조정이 아예 일본 정벌에 나섰다는 얘기다.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정화가 향한 곳은 일본이라 주장하는데…….

 

 

 

 

문제는 ‘서양동점’으로 서양세력에 의해 굴욕을 당했던 중국이 시기적으로 조금 앞섰다는 이유만으로 정화의 ‘서양’ 항해에 대한 올바른 이해도 없이 ‘굴기’해야 하는, 그리고 ‘굴기’할 수밖에 없는 중화민족(?)의 정신을 발양하는 데에만 정화의 항해 ‘사실’을 써먹기에 급급하다는 것이다. 정화의 항해는 위대한 사건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성과는 미미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항해의 목적이 올바른데 있느냐, 아니면 진정 ‘허영심’에 의한 것이었느냐, 그리고 결과를 알맞게 도출했느냐를 살피는데 중점을 둬야 한다. 그것이 동양의 미래를 위해 바람직하다. 부디 ‘굴기’만을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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