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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3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명(明) 효종(孝宗, 1467-1505) 주우탱(朱祐樘)은 헌종(憲宗)의 셋째 아들이다. 성화(成化) 11년(1475)에 태자가 되고 23년에 황제에 오른다. 등극한 후 진공 물품을 감해주고 공역을 금지하거나 감해줬으며 재난을 구제했다. 조정이 깨끗해졌고 민생이 안정됐다. 홍치(弘治) 18년(1505) 5월에 병으로 죽었다.

 

효종 주우탱, 연호는 홍치다. 명 왕조 제9대 황제로 명대에 얼마 되지 않은 명군에 속한다. 주우탱은 명 왕조에서 출신이 가장 가련한 황제였다. 궁의 착한 태감과 그의 조모인 황태후가 없었다면 그의 목숨은 후궁 중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나중에 황제에 오른 주우탱은 자신이 많은 재난과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특별히 백성을 구휼하는데 힘썼다. 그의 통치 기간 중 정치는 비교적 깨끗했으며 백성들이 편안하게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전대와 비교해 면모를 일신하였으니 후대에 ‘홍치중흥弘治中興’이라 칭송받는다.

 

효종이 어떻게 능력 있는 명군이 됐을까? 그의 유년시기 비참한 운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효종의 부친 헌종 황제는 조금 이상한 인물이었다. 마더콤플렉스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사람으로 자기보다 19살이나 많은 여인을 총해했다. 그리고 평생 애정이 변하지 않았는데 그 궁녀가 바로 유명한 만귀비(萬貴妃)다. 만귀비 또한 평범한 인물은 아니다. 속셈이 깊었던 여인으로 어떻게 하면 황제를 구슬릴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후궁들을 다스리는 법도 잘 알고 있는 여인이었다. 효종 황제의 첫째 황후였던 오(吳) 씨가 화를 참지 못하고 만귀비의 뺨을 때린 후 폐위됐을 정도니 만귀비가 어느 정도로 효종의 마음속에 틀어박혀 있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몇 년 후 만귀비는 효종의 아들을 낳는다. 모친은 아들로 인해 귀해진다고 하던가. 자신의 아들이 황제가 될 것이고 자신도 황태후가 될 것이 아니던가. 그러나 아들의 명이 짧을 줄 누가 알았으랴. 귀한 아들은 요절하고 만다. 이일로 만귀비는 비통해 했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비빈들이 황자를 낳음으로써 자신과 황제의 총애를 다투는 일을 못하도록 대비했다. 만귀비는 후궁에 감시인을 폭넓게 심어뒀다. 비빈들이 황제와 동침을 한 후 회임한 흔적이 있으면 곧바로 사람을 보내 억지로 낙태약을 먹였다. 후궁 중의 모든 사람들은 만귀비의 권위를 두려워해 아무도 나서지 못했다. 궁중에서 황제만 그 사실을 몰랐을 뿐이었다.

 

하루는 만귀비의 감시인이 기(紀) 씨가 황제와 동침한 후 회임한 것 같다고 보고했다. 그 기 씨는 원래 반란 후 진압된 소수민족 출신의 여인이었다. 포로로 잡혀 후궁이 됐는데 청초한 아름다움 때문에 우연히 헌종과 동침을 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회임하게 된 것이고. 만귀비는 듣자마자 약을 준비하고 사람을 파견해 기 씨를 유산시키도록 했다. 그런데 기 씨 뱃속의 작은 생명은 무척 완강했다. 유산시키는 약품도 소용이 없었다. 만귀비가 어떤 인물이던가. 끝을 보고야 마는 성격이 아니던가. 그녀는 또 궁녀를 파견해 조사케 했다. 궁녀는 양심에 찔려 기 씨가 회임한 것이 아니라 괴병에 걸렸을 뿐이라고 보고했다. 만귀비는 그녀의 말을 듣고 기 씨를 냉궁(冷宮)에 가두는 것으로 끝을 냈다.

 

오래지 않아 기 씨가 아들을 순산했는데 그가 바로 명 왕조의 제9대 황제 효종 주우탱이다. 아이를 낳은 후 만귀비의 추궁을 피하기 위해 기 씨는 태감 장민(張敏)에게 젖먹이를 내다버리라고 했다. 그러나 장민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꿀로 어린 황자를 키웠다. 그때 마침 오(吳)황후도 냉궁에 갇혀 있었다. 그녀도 늘 기 씨를 도와 작은 황자를 돌봤다. 여러 사람의 관심과 보호 아래 어린 생명은 살아날 수 있었고 하루하루 성장했다.

 

 

 

 

6년 후 어느 날 태감 장민이 성화 황제의 머리를 빗질하고 있었다. 황제는 자신이 이미 백발이 됐으면서도 아직 황자가 없음을 탄식했다. 명 왕조의 미래를 걱정하며 한탄하자 장민은 참지 못하고 황제 앞에 무릎을 꿇고 황제에게 어린 황자의 이야기를 떨면서도 자세히 말 했다. 헌종은 듣고 크게 기뻐하며 사람을 파견해 황자를 궁으로 데리고 오도록 한 후 주우탱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곧바로 황태자에 책립했다. 그런데 기 씨는 얼마 없어 급사한다. 태감 장민도 어찌 된 일인지 약을 먹고 자살했다. 두 사람의 죽음은 만귀비와 관련이 있다고 전한다.

 

황자가 입궁했지만 위험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황가의 일점혈육을 보호하기 위해 황태후 주(周) 씨가 황자를 보호하는 책임을 진다며 나섰다. 만귀비는 감히 황태후를 건드리지 못했다. 작은 황태자는 그렇게 보호됐다.

 

하루는 만귀비가 황자를 그녀의 궁으로 놀러 오라 초대했다. 주태후는 원래 동의하지 않았으나 만귀비의 체면을 무시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닌지라 황자에게 만귀비의 궁에 가서는 아무 것도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황자가 만 씨의 궁으로 가니 과연 맛있는 음식들이 차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주우탱은 만 씨가 어떤 말을 해도 듣지 않고 하나도 먹지 않았다. 만귀비가 어찌 먹지 않느냐고 묻자 황자는 어쩔 수 없이 독이 들어 있을 수 있어 먹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만귀비는 그 말을 듣고는 황자가 즉위하면 자신의 처지도 가련하게 될 것임을 알아 차렸다. 그리고 그런 연유인지는 모르지만 우울증에 걸려 시름시름 앓게 됐다.

 

성화 23년 만귀비가 급사했다. 헌종 황제는 지나치게 상심해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어린 시절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던 주우탱이 황위에 올랐다. 그리고 역사에서 평가하는 ‘치세’를 이뤘다. 어려움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라서 그런가? 역사는 우리에게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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