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3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명(明) 세종(世宗, 1507-1567) 주후총(朱厚熜), 명 효종의 조카다. 정덕(正德) 16년(1521) 무종이 죽자 후사가 없어 주후총이 즉위했고 가정(嘉靖)이라 연호를 붙였다. 세종이 등극한 직후 관리를 정리했고 간신을 주살해 조정이 새로운 면모를 갖췄다. 나중에 신선(神仙)과 도술(道術)에 빠져 군 방비가 느슨해지고 수뢰가 성행해졌으며 봉기가 끊임없이 일어났다. 내우외환이 겹친 가정 45년(1566) 12월에 죽었다.

 

명 가정 21년(임인년壬寅年, 1542), 쇼킹한 ‘임인궁변’이 자금성에서 발생한다. 궁녀 양금영(楊金英)이 10여 명의 젊은 궁녀를 데리고 심야에 가정 황제 주후총을 교살하려 했다. 궁녀들이 허둥거리다 줄의 옭매듭을 잘못 묶어 목을 제대로 졸이지 못했다. 가정제는 혼절하며 죽음에 직면했다가 구출됐다. 궁궐 규방 내부의 사생활이었던 까닭에 사건 발생 후 통치자들이 숨기기에 급급했다. 그래서 그 사건에 대한 역사의 기록은 많지 않다. 따라서 그 진상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그러나 민간에 여러 통로로 유포되면서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게 됐다. 그렇게 중국 궁정사의 일대 현안으로 기록돼 있다.

 

 

 

 

번왕(藩王) 주후총이 명 세종황제가 되기 전 연단(煉丹) 신선술을 좋아해 어떻게 하면 신선이 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칭제 후 누리는 부귀영화는 극점에 달했지만 여전히 장생불로를 추구했다. 그래서 그는 널리 도사 방사들을 불러 모았고 궁중에서 제를 지내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규모를 확대해 거금을 소모했다.

 

그는 또 호색한이었다. 예부(禮部)를 경성, 남성, 산동, 하남 등지에 파견해 민가 부녀자 천여 명을 선발해 입궁하도록 명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궁녀를 선발해 수천 명에 다다랐다. 가정 26년(1547)에서 가정 41년(1564)까지 네 차례나 선발이 이루어 졌는데 8세에서 14세의 어린여자 1080명을 선발해 입궁케 했다. 그렇게 많은 여자아이들을 선발해 입궁시킨 이유는, 첫째로 ‘원성순홍단(元性純紅丹)’을 정련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세종의 음욕을 채워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궁에 들어온 여자들 중에서 봉호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절대 다수는 세종의 음욕에 희생되거나 노역하면서 학대당했다. 세종을 살해하려던 ‘임인궁변’은 바로 그 황음 무치한 행위와 관련이 있다.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역사가들이 보는 궁녀들이 황제를 시해하려한 원인은 다음 몇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임인궁변’은 가정제가 장생불로의 단약을 정련하면서 궁녀들을 학대해서 생긴 것이라 본다.

 

당시 사례감(司禮監)이 궁녀들을 심문하면서 얻은 자백을 기록한 것을 보면 “우리가 먼저 손을 쓴 거다. 그의 손에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라는 말이 보인다. 이를 근거로 추론해 보면 그 당시 궁녀들은 분명 위험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죽을 지경에 몰렸으니 죽임을 당하는 것보다 먼저 손을 쓰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었을 것이다. 목숨을 걸고 가정제를 죽이는 것, 그것이 그녀들에게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각종 자료를 보면 사건 발생 전에 모살에 참가한 궁녀들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으면서 죽음 직전까지 갔다는 말은, 상황을 살펴보건대 세종의 장생불로 약을 정제하면서 생긴 일임을 알 수 있다.

 

주후총은 여색을 밝혔다. 무도한 황음에 빠져 그 자신의 건강도 나날이 나빠졌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더더욱 도교 선술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장생불로를 끊임없이 추구한 것이다.

 

방사들과 아첨꾼들은 방중 비방이나 연단 약을 봉납하면서 횡재를 노렸다. 예를 들어 도중문(陶仲文) 같은 인물은 가정제가 가장 믿는 방사 중의 한 명이었다. 방사 비방을 봉납해 황제의 총애를 얻었다. 가정제는 그에게 하사한 상이 은자 10만 량에 이르렀다. 관직도 1품에 이르렀고 그의 자손들도 혜택을 입었다. 황제가 좋아함으로써 당시 사회에는 각종 방사 비방과 장생불로 약을 연단하는 방법 및 방중약 복용 등의 풍조가 장강 남북에 성행했다.

 

당시 진헌된 비방과 단약은 천태만상이었다. 그중 ‘홍연(紅鉛)’이 가장 유행하던 연단 제조 방법이었다. 처녀의 월경과 약분을 버무린 후 정제하는 것으로 주사 형태를 띠었다. 그리고 ‘함진병자(含眞餠子)’가 있었다. 영아가 출생할 때 입에 물고 있는 핏덩이를 말한다.

 

‘임인궁변’이 일어나기 2년 전 궁중에는 연단 풍조가 최고조에 이르렀었다. 가정제는 방사 단조용(段朝用) 등의 단약 정제 방법을 맹신해 궁녀들의 신체를 희생시키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았다. 심지어 어린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충분한 연단 원료를 얻기 위해 황제는 강제로 월경을 촉진시켜 하혈하게 하는 약물을 궁녀들에게 복용시키기도 했다. 가볍게는 궁녀의 신체를 크게 손상시켰고 심하면 과다 출혈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이외에 연단 비법이 새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피를 받은 궁녀들을 살인멸구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당시 일부 궁녀들이 궁내 자매들이 잔학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직접 목도하고 자신에게도 그런 재앙이 언젠가는 닥칠 것을 알고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손을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들도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결과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성공을 하든 않든 죽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죽든 가정제와 같이 죽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고.

 

 

 

 

둘째 영빈(寧嬪) 왕(王) 씨가 궁변을 주도했다고 본다. 왜 왕 씨가 궁녀들을 사주하여 가정제를 죽이려 했을까? 전하는 바는 이렇다. 가정 원년에 세종이 결혼 후 몸이 허약해 늘 기침하고 가래가 끌었다. 가정 9년까지 아이가 없었다. 가정 10년 세종이 흠안전(欽安殿)에 단(壇)을 세우고 후사가 생기기를 기원했다. 예부상서를 감례사로 삼고 문무 대신들이 돌아가며 향을 사르고 참배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가 가정 15년에 도사 소원절(邵元節) 등을 초빙해 단을 주관하도록 했다. 참 묘하게도 그해 후궁 비빈이 아들을 낳았고 이후에도 몇 명의 자식을 낳았다.

 

영빈 왕 씨도 그해 아들을 낳았다. 관례에 따라 그녀는 빈에서 비로 승급해야 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세종은 그녀를 승급시키지 않았다. 이에 연빈 왕 씨는 마음속에 불만을 품게 됐다. 그녀가 가정제가 총비 조(曹) 씨의 궁에 머무는 밤에 양금영 등 궁녀들을 사주해 황제를 죽이고 복수하고 동시에 조 씨에게 책임을 전가하려 했다는 것이다.

 

이런 설명은 일반 내궁 내의 투쟁의 경험을 가지고 추측한 것으로 사실과는 부합된다. 황자를 낳은 비빈이 황제의 총애를 다퉈 결과도 알 수 없는 사건을 저질러 위험을 무릅쓸 필요는 전혀 없는 것이다. 몇 명의 궁녀들이 자신의 주인을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황제를 모해하려 일치된 행동을 했다는 것도 이해될 수 없는 부분이다. 이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셋째 세종이 변덕스러워 제멋대로 궁녀들을 죽임으로써 궁변이 일어났다고 보기도 한다.
역사 기록을 보면 가정제는 성격이 잔악하고 변덕이 심해 제멋대로 신하들을 대했을 뿐만 아니라 황후에서 궁녀까지 마음대로 부렸다. 효결(孝潔) 황후 진(陳) 씨는 가정제 주후총이 색을 밝히는 것에 대해 불만을 품자 주후총은 노발대발하며 진 씨와 복중의 아이를 함께 죽여 버렸다. 진 씨가 죽은 후 주후총은 즉시 순비(順妃) 장 씨를 황후로 세워 총애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주후총은 조그마한 일로 대노하여 또 장 씨를 폐하고 덕비(德妃) 방(方) 씨를 황후로 세웠다. 방 씨가 임인궁변 중에 가정제를 구출해냈다. 생명을 구해 준 은혜가 컸지만 그녀는 황제의 총비 조(曹) 씨를 사형에 처함으로써 주후총은 마음속에 원한을 갖게 됐다. 몇 년 후 후궁에 화재가 났다. 주후총은 그저 큰불로 변해 다 탈 때까지 지켜보기만 할뿐 불을 끄지 않아 방 씨를 불에 타 숨지게 만들었다.

 

그렇게 황후를 대할 정도니 출신성분이 낮은 궁녀와 궁비들을 가정제가 어떻게 대했는지는 불문가지다. 조선 역사서 기록에 보면, 주후총은 색을 탐했고 궁녀들이 조그마한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죄를 물어 매질을 해댔다. 그렇게 죽은 궁녀가 200여 명에 이른다. 그런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은 궁녀들은 두려움을 넘어 죽음의 공포를 느꼈을 것이고, 사투를 벌일 음모를 꾸미게 됐다는 것이다. 어쩌면 임술궁변이 그런 이유로 해서 벌어졌을 가능성이 많다. “우리가 먼저 손을 쓰자, 그의 손에 죽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느냐?”는 궁녀들의 고함이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네 번째, 정사에 임술궁변은 1비(妃) 1빈(嬪)과 관련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정치 투쟁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명 무종(武宗)도 황음무도했다. 절제 없이 음욕을 탐하다 죽을 때 후사가 없었고 유언도 제대로 남기지 못했다. 임종 시 곁에 있던 태감에게 태후와 조정 대신들이 상의해 후사를 세우는 일을 결정하라고 말했을 뿐이다. 자수(慈壽) 황태후와 조정 대신들이 상의해 흥헌왕(興獻王)의 아들 주후총을 영입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명 세종 가정제다. 배분을 논하면 세종과 무종은 당형제다. 황위 계승 관계에 따르면 그는 마땅히 황가의 전통을 존중해 자신의 생부 흥헌왕을 숙부라 부르고 무종의 부친 효종(孝宗)을 아버지라 불러야 했다. 그러나 주후총은 자기의 생부를 황고(皇考)라 존중하기를 바랐고 흥헌왕을 황제로 추봉(追封)할 생각을 가졌다. 황통의 문제를 먼저 확실히 하지 않고 황위를 결정한 까닭이다. 그렇게 하면서 주후총이 즉위한 후 조정은 쟁론이 끊이지 않았다.

 

정치의 풍파는 가정 초년에 이미 일기 시작했다. 내각 수보(修補) 양정화(楊廷和)가 대표하는 일파는 명 왕조의 황통을 존중하자고 주장했고 장총(張璁)이 대표하는 일파는 가정제의 뜻에 영합해 가정제의 뜻에 따라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 조정은 이 문제로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이른바 역사상 유명한 ‘대예의大禮儀’가 그것이다. 그 정치 논쟁은 장장 20년이나 계속됐다. 그 정치 투쟁은 표면상으로는 ‘예의’에 대한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때로 고조되고 때로는 가라앉으면서 진행된 조정 대신과 황제, 대신의 각 파벌 사이에 벌어진 권력 투쟁이었다.

 

‘대예의’ 투쟁이 가정제의 승리로 결론이 날 때쯤에 ‘임인궁변’이 발생한다. 그리고 1비 1빈, 즉 단비(端妃) 조(曹) 씨와 영빈 왕 씨와 관련돼 있었다. 이렇게 보면 ‘대예의’와 관련해 정치 투쟁에 실패한 자들이 비빈을 이용해 가정제를 제거하려 했던 사건이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어쨌든 ‘임인궁변’은 발생했다. 궁녀들이 주동이 돼 일국의 군주를 모해하려 했던 거대한 사건이다. 그런데 정사에는 명확하게 기록하지 않고 있으며 어떠한 해석도 확실하게 내놓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추론하지만 증거가 충분하지 않아 아직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가정제가 황음무도했고 궁녀들을 제멋대로 대했으며 장생불로에 빠져 혼군이 되면서 불러온 사건이었음은 분명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