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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4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수호전水滸傳』에 ‘몽한약’과 관련된 얘기들이 많다. 그리고 신비감을 던져준다.

 

황니강(黃尼崗)에서 오용(吳用), 조개(晁蓋) 등 여덟 명은 교묘하게 몽한약을 백승(白勝)의 술통 넣는다. 정명하고 조심스러운 양지(楊志)도 결국은 계책에 걸려들었다. 자신은 반 바가지만 마셨지만, 그래도 “몸이 풀리고 아무리 해도 몸을 일으킬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더더욱 머리는 무겁고 다리는 가벼워져서 하나같이 서로 얼굴만 바라보고 눈을 멀거니 뜬 채 오용 등이 자신의 물건들을 수레에 싣는 것을 보면서도 일어나지 못했다. 움직이지도 못하고 말도 못했다. 조개 등은 서두르지도 않고 수레를 밀고 갔다. ……몽한약은 정오에 마셨는데, 양지 등은 이경이 되어서야 깨어났다. 마취시간이 10여 시간에 달했다.

 

“무도두가 십자파에서 장청을 만나다”라는 장절에서 무송(武松)이 서문경(西門慶), 반금련(潘金蓮)을 죽여 맹주로 유배된다. 도중에 십자파를 지나는데 날이 더워 마실 술을 찾았다. 손이낭(孫二娘) 술집으로 갔다. 이 술집에 대해 무송은 들은 바가 있었다. 흑점(黑店)이었다. 그녀에게 몽한약주를 가져오게 했다. 두 공인이 목이 말라 술을 들어 마셨다. 무송은 손이낭이 한눈파는 틈을 타 안 보이는 곳에 술을 버리고 고의로 소리쳤다. “좋은 술이다.” 손이낭은 손뼉 치며 말했다. “쓰러져라. 쓰러져라.” 하늘이 빙빙 돌고 땅이 흔들거렸다. 두 공인은 말도 못하고 뒤로 쓰러졌다. 무송도 의자 옆에서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해 쓰러졌다. 손이낭이 사람을 들고 옮길 때 무송은 돌연 손이낭을 바닥에 쓰러뜨렸다.

 

……손이낭은 해약을 만들었고 장청(張靑)은 해약 주를 먹였다. 반 시진도 되지 않아 두 공인은 꿈에서 깨어난 듯 정신이 들었다. 무송을 보고는 “우리가 왜 이렇게 취했나요. 이 집의 술이 얼마나 좋기에 우리가 몇 잔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취해버린단 말입니까. 이 집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돌아올 때 다시 사 마셔야겠습니다.” 무송과 손이낭은 크게 웃었다. 두 공인은 그들이 왜 웃는지 알 수 없었다. 귀문관(鬼門關)까지 갔다가 가까스로 되돌아오고서도 손이낭의 술이 좋다고 칭찬하다니. 그렇듯 몽한약은 효력이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에 나오는 ‘몽한약’은 소설가의 창작일까? 아니면 몽한약이 세상에 있는 것인가? 그것은 무엇으로 조제하는 것인가? 어떤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가? 그런 약물은 후대에 어디로 갔는가? 지금도 ‘몽한약’을 중시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몽한약’의 작용을 보면 효력이 강한 마취제다. 마취약에 대해서는 『열자列子』에 최초의 기록이 보인다. ‘탕문편湯問篇’에 춘추시대 명의 편작(扁鵲)이 공호(公扈)와 제영(齊嬰)의 병을 치료하는 이야기가 기술돼 있다. “편작은 두 사람에게 독주를 마시게 하고 3일 동안 깨지 못하게 한 후 흉부를 갈라 심장을 찾아 제자리에 옮겨 놓았다.” 이런 심장 외과수술과 같은 이야기는 신기하기가 그지없어 진(晉)나라 사람 장담(張湛)은 ‘천하에 불가사의한 것’이라 여겼다. 이는 화타(華佗)를 평하는 말이다.

 

『후한서』 기록을 보면 화타가 마비산(麻沸散)을 발명했다고 한다. “질병이 내부에 맺혀 있을 때 침약이 미치지 못하면 술과 함께 마비산을 먹여 취해 감각이 없게 만든 후 배와 등을 갈라 웅친 덩어리를 걷어낸다. 만약 장과 위에 있으면 절제한 후 씻어내 병 덩어리를 제거하여 봉합한다. 신고를 발라 사오일 지나면 병이 치유되고 1개월 내에 회복된다”고 돼 있다. 이처럼 종양을 떼어 내는 수술과 같은 묘사는 현대 수술방법과 비슷하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화타를 세계 최초로 마취약을 이용해 흉부수술을 했던 명의로 추앙하고 있다. 그런데 화타가 사용했던 ‘마비산’의 주요 성분이 무엇인지 기록돼 있지 않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임상에 응용됐는지도 기록돼 있지 않다. 신의 화타가 죽은 후 아는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만타라曼陀羅’에 대해서는 남송(南宋) 주거비(周去非)가 『영외대답嶺外代答』에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광서廣西 만타라 꽃은 야생에서 핀다. 큰 잎에 흰 꽃이 핀다. 가지와 같은 모양의 열매를 맺는다. 작은 가시들이 나 있는데 약초다. 도적들은 그것을 채취해 말린 후 가루로 만들어 음식에 넣고 사람들을 마취시킨 후 물건을 가지고 도망친다.” 이는 고대 소설 중의 몽한약에 대한 학술적 해석이라 할 것이다.

 

‘취어비(醉魚萆, 취어초, 부들레야 린들레야나(B. lindleyana))’라 불리는 식물도 있다. 그 꽃과 잎에 글리코시드(glycoside)와 플라보난 글리코사이드(flavonone glycoside)가 함유돼 있어 마비시키는 성능을 가지고 있다. 특히 물고기에게는 직통으로 듣는다. 『본초강목 17권』에 “어부들이 꽃과 잎을 채취해 물고기를 마취시킨 후 에워싸서 잡아들인다”라고 했다. 사람에게도 취어비는 마비성이 강하다. 사람이 그 꽃을 먹으면 오래지 않아 혀와 목이 마르고 머리가 어질어질하며 가슴이 답답하고 호흡 곤란, 사지 마비 등의 증상을 보인다. 그래서 ‘취어비’가 몽한약의 일종이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고대 서적에 기록된 몽환약은 “사람을 취하게 하나 상하게는 하지 않는다”고 돼 있는 것을 보면 ‘취어비’는 몽한약과는 다른 부분이 많다.

 

‘만타라’, ‘취어비’ 이외에도 초오(草烏, Aconitum kusnezoffii Reichb) 가루, 압불려(押不廬, 양금화洋金花), 좌나초(坐拿草, 물봉선) 등과 같은 식물도 강한 마취 작용을 하기에 몽환약과 같이 사용할 수 있다. 이상 몇 종의 ‘몽한약’과 같은 독성을 가진 약물 이외에 어떤 자료는 말리화(茉莉花, 재스민) 뿌리로 담근 술도 마시면 사람을 마취시키고 “며칠이 지나도 죽지 않는다”고 했다.

 

 

 

 

마취제는 원래 병을 치료하는 외과 수술용으로 발명됐다. 그러나 나중에는 여러 가지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사람을 상해하거나 재물을 약탈하는데 사용하기도 했다. 송(宋)대 사마광(司馬光)의 『속수기문涑水紀聞』에는 두기(杜杞)가 광남(廣南)에서 만타라를 이용해 적을 취하게 하여 살해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명(明)대 위청(魏淸)은 『영남쇄기嶺南瑣記』에 자신이 관직을 잃은 상황을 “인장을 가지고 집으로 가던 관리가 도중에 사람을 만나 억지로 끌려가서는 술을 마셨다. 관리는 잠이 오는 듯이 혼미해졌다. 깨어나 보니 인장을 도둑맞았음을 알았다. 며칠 후 도둑을 체포하여 까닭을 물었다. 대답해서 말하길 ‘만타라(풍가風茄)를 분말로 만들어 술에 넣었습니다. 그것을 마시면 잠을 잡니다. 술기운이 있어야 깊은 잠에 빠져듭니다’라고 했다. 어디에서 구했냐고 물으니 광서(廣西) 산이라고 답하고 일명 ‘민타라悶陀羅’라고 한다고 대답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자. “두기, 자는 위장(偉長), 호남(湖南) 전운부사(轉運副使)다. 오계만(五溪蠻)이 반란을 일으키자 두기는 재물과 관작으로 유인했다. 잔치를 열고는 만타라 술을 마시게 하고 혼절케 한 후 죽였는데 수천 명이나 됐다. 대송평만(大宋平蠻)비를 새운 까닭에 스스로 마원(馬援)과 비교하며 상소해 논공했다.” 이에 따르면 몽환약을 사용해 대대적으로 수천 명 이상을 죽인 중국의 첫 번째 인물은 두기다. 이런 위험한 약이라면 근대의 생물학 무기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형벌을 피하기 위해 몽환약을 마시고 죽은 척​하기도 했다. 남송 문학가 주밀(周密)은 『계신잡식속집癸辛雜識續集』에서 당시 탐관오리들 중에 죄가 심해 고발당해 극형에 처해질 것을 두려운 관리들이 그런 약물을 복용해 죽은 척하기도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법률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몽한약’이 무시무시하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독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수호전』에 손이낭과 장천이 해약을 먹이자 정신이 돌아왔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손이낭이 해독약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작가 시내암(施耐庵)은 알려 주지 않았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감초(甘草)가 좋은 해독약이다. 감초는 또 ‘첨초甛草’라고 하기도 하는데 다년생 초본 콩과 식물로 감초는 우랄감초, 굽은 감초라고 하며 러시아(시베리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중국(감숙성, 신강성, 동북과 화북 지방), 몽골에서 자라며 우리나라에서도 재배한다. 유럽감초는 남유럽, 중앙아시아, 중국에 분포돼 있다. 감초의 뿌리와 뿌리줄기에는 글리시르리친(glycyrrhizin)이 함유돼 있다. 중화 성질이 있고 단 맛이 나면 “72종의 유석독(乳石毒, 광물성 약의 독성)을 치료할 수 있으며 1200여의 초목독(草木毒, 식물성 약의 독성)을 치료할 수 있다”고 돼 있는데 ‘몽한약’을 해독하는데 확실한 효력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감초녹두탕이 해약으로써 효용이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감초는 중약에서 해독약으로 자주 사용됐다. 당나라 손사막(孫思邈)은 『천금방千金方』에서 “감초는 백약의 독을 해독한다. 끓는 물이 눈을 녹이는 것처럼 신묘하다. 중오두(中烏頭, 백부자, Aconite), 파두독(巴頭毒, 파두巴豆로 인한 중독)은 감초가 배에 들어가면 곧 안정된다. ……대두즙(大豆汁)은 백약의 독을 해독한다고 하지만 내가 실험해본 결과 감초보다는 못하다. 또 감두탕(甘豆湯)을 더할 수 있다면 그 효험은 더 좋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본초강목』에서는 감초가 천선자(天仙子)에 대해 해독 작용이 있다고 했다. 천선자의 주요 성분은 히오시아민(hyoscyamine), 스코폴라민(scopolamine) 등 식물염기(植物鹽基, 알칼로이드alkaloid)다. 그리고 녹두의 성질은 차서[寒] 산열(散熱)시켜 해독할 수 있다. 감초와 함께 쓰면 효과가 더 좋다. 감초, 녹두는 모두 쉽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며 제조도 지극히 간단하다. 그것들을 이용하여 몽한약의 해독약으로 만들었을 가능성이 많다.

 

 

 

 

심괄(沈括)은 『몽계필담夢溪筆談』에서 ‘좌나초 속’은 각성 성분이 있다고 했지만 송나라 소송(蘇頌)의 『도경본초圖經本草』와 명대 주정왕(周定王)의 『보제방普濟方』, 이시진(李時珍)의 『본초강목』 등의 의서에는 기록돼 있지 않아 『몽계필담』의 내용은 믿기 어렵다. 당시 중의는 에세린(eserine)이 몽한약의 약성을 해독시킨다고 했지만 고대 몽한약의 해약이 에세린인지는 알 길이 없다.

 

희한한 일은 고대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몽한약이 근대에 와서는 실전됐다는 점이다. 어찌된 일일까?

 

19세기 40년대 이산화질소, 에테르, 클로로포름 등 화학 마취약이 세상에 나오고 성공적으로 외과수술에 운영되기 시작했다. 19세기말 서양 의학이 중국으로 전파됐고 그 선진 화학 마취약은 중국 전통 마취약을 대체했다. 그렇게 ‘몽한약’은 서서히 사라졌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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