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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인시평] 자유롭고 정의로운 나라의 미래를 꿈꾼다

 

 

 

30년 전 그해 6월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일찍 찾아온 여름이었다. 걷기만 해도 땀을 흘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시절은 암울하기만 했다.

 

 

연초 한 대학생이 경찰의 고문 끝에 운명을 달리했다. 서울대생 박종철이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온 국민의 공분을 샀다.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당시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의 수사결과 발표는 코미디나 다름 없었다.

 

은폐로 묻혀지나 싶던 고문치사 사건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폭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대학가의 시위는 격화됐다. “어떤 경우라도 불법과 폭력, 그리고 선동으로 우리의 공동체 자체를 파괴할 수 없다”는 그 시절 전두환 대통령의 담화는 협박이었다. ‘4·13 호헌 선언’이라고 불렀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던 함성은 6월에 이르러서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러다 또 다른 대학에서 또 한명이 목숨을 잃었다. 고작 만 20세의 청년이었던 그는 교정 민주광장에서 집회를 마치고 학우들과 어깨를 걸고 교문 앞에서 구호를 외쳤을 뿐이었다. 그를 향해 경찰은 최루탄을 쐈다. 직각으로 날아든 최루탄 파편은 그의 머리에 꽂혔고, 그는 그렇게 피 흘리며 쓰러졌다.

 

 

 

 

 

학기말이 닥친 지라 대개의 대학생들은 기말시험 준비로 도서관 자리를 잡는 게 더 관심사였다. 하지만 그 땐 그렇지 않았다. 그 대학 학생들은 분노했고, 들끓었다. 교정 곳곳에 “한가로이 시험공부에 매달릴 상황이 아니다”는 눈물의 호소가 등장했고, 그 대학 모든 학과 학생들은 자율토론과 과회의에 들어갔다. 제대로 시험을 못 치른 학과가 대다수였다. 일부 교수들은 시험을 건너 뛰고 다른 과제로 성적자료를 대체했다. 학생들의 편에 선 교수들의 무언의 동조이자 응원이었다. 그의 희생은 6·29선언이란 이름으로 당시 정권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도화선이었다.

 

 

연세대생 이한열! 그 이름 세 글자를 지금도 기억한다. 만 30년이 흐른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6월9일 교문 앞에서 쓰러진 그는 한달이 채 못되는 기간의 사투 끝에 대학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 그의 죽음을 통탄하며 7월9일 그 대학의 교정에서 열린 그의 영결식은 그 시절 대한민국 독재의 종말을 고하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고(故) 문익환 목사가 독재정권에 의해 목숨을 잃은 숱한 민주열사의 이름을 목놓아 부르는 것으로 추모사를 대신하던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대학 캠퍼스를 가득 메운 장례 추모인파는 그의 광주 망월동 묘역 행차에 앞서 서울시청 앞에서 노제로 그의 혼을 달랬다. 추모인파의 선두가 서울시청 앞을 당도했을 무렵 인파의 후미가 미처 영결식 현장인 대학을 빠져나오지 못할 정도였으니 그 시절 그 인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학과 서울시청 앞 광장까지의 거리는 어림 잡아도 10km가 넘는다. “100만 추모인파였다”는 그 시절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그의 영정을 부둥켜 안고 장례행렬의 선두에 섰던 이가 지금의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다. 그 시절 그 대학 총학생회장이었다. 서울시청 앞 노제 현장에서 추모사를 하다 “가자! 청와대로”를 외치며 울분을 토했던 이가 그 시절 고려대 총학생회장이자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의장인 이인영 현 더불어민주당 국회의원이다.

 

 

떠난 이한열을 잊지 않고자 그 대학 총학생회와 동아리들은 합심, 그 해 한 여름 내내 ‘추모 녹음 테잎’ 제작에 들어갔다. 그 테잎에 수록될 노래를 한껏 불러줬던 건 지금 유명한 가수 안치환과 대학노래패 울림터였다. 대학 방송국 스튜디오에서 한 여름 내내 비지땀을 흘리며 그 일에 매달렸던 게 엊그제 일 같다. 그래선지 안치환이 부른 ‘마른 잎 다시 살아나’ 노래가 다시금 귓전을 맴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해 12월 대통령 선거를 치렀다. 대학 2년이던 시절 맞은 첫 대통령 선거였다. 그 시절 우리 국민들은 십수년여만에 맞은 대통령 직접선거였다. 재임중인 전두환 대통령을 승계한 민정당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 김영삼 후보, 평화민주당 김대중 후보,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후보의 4파전이었다. 결과는 36.7%의 득표율로 노태우 후보의 승리였다. 봄·여름을 거쳐 그렇게 뜨거웠던 민주의 함성은 군사독재의 종식은커녕 군사정권의 연장을 지켜보는 것으로 점점 힘을 잃었다.

 

 

 

 

 

 

 

그렇게 꼬박 3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 사회엔 많은 변화가 일었다. 물론 군사정권은 끝났고 더 이상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잡을 수 있는 나라도 아니다. 물론 박정희 군사정권의 망령이 되살아난 박근혜 정부의 행태는 대통령 탄핵이란 초유의 일로 이제 기억 저편으로 사라질 태세다. 30년 전 100만 인파를 한참 뛰어넘는 인파가 평화로이 촛불로 대통령을 권좌에서 내려오도록 만든 성숙한 나라이기도 하다.

 

그런 생각을 해본다. 30년 전 그 시절 시위의 선두에 섰던 이들은 지금 다 무얼하고 있을까? 세상이 분노하던 때임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도서관 구석 골방에서 고시(考試) 공부에 매달리던 친구들은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모든 게 혼란이기에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쓴 소주와 막걸리를 들이키며 방황하던 그 친구들은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비록 나서진 못했을지라도 푼돈이라도 쥐어주며 시위의 선봉에 섰던 이들을 은근히 도와줬던 그들은 지금 무얼하고 있을까?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서막이 올랐다. 국민의 선택이 이제 22일 앞으로 다가왔다. 그 파릇한 청춘 박종철이, 나의 대학동기 이한열이 지금 살아 있다면 무슨 말을 할까?

 

대한민국은 과연 자유롭고 정의로운 국가를 향해 가고 있는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이건만 아직도 나는 의문이다. 그저 바람이 있다면 지금의 스무살 청춘들은 제발 30년 뒤 울분과 회한이 없는 행복한 나라에서 살기를 바랄 뿐이다. 보탤 말이 있다면 그런 나라는 그냥 가만히 있다 홀연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마 먼 훗날에도 올해의 5월이 혹자에겐 생생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부디 ‘대한민국의 새로운 전진’을 기억하고 싶다. [제이누리=양성철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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