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43)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위충현(魏忠賢, 1568-1627), 명나라 환관으로 하간河間 숙녕肅寧(현 하북) 사람이다. 병필태감秉筆太監을 역임했고 나중에는 동창東廠의 수령이 됐다. 희종熹宗의 유모 객客 씨와 결탁해 국정을 농단했다. 충신을 주살했으며 대대적인 옥사獄事를 일으켜 국가 정치가 날로 부패해졌다. 황제의 총애를 빌미로 함부로 행동했고 스스로 ‘구천세九千歲’라 불렀다. 숭정崇禎이 즉위 후 파면됐다. 죄과가 두려워 자진했다.

 

명 왕조 말년에 희종이 총애한 환관 위충현은 중국 역사상 가장 광폭한 태감이다. 그는 ‘육군자六君子’를 주살했고 ‘동림당東林黨’을 멸하면서 무수한 조정 대신들을 살해했다. 희종 후기에 이르러 천하는 위魏 씨의 천하가 돼 버렸다. 아부에 능한 관리들은 공개적으로 위충현을 ‘구천구백세’라 불렀다. 황제가 ‘만세’이니 황제에 버금가는 것으로 염치를 완전히 잃어버린 작태다.

 

 

 

 

위충현은 어릴 적부터 무뢰배였다. 목불식정이면서 목숨을 걸 정도로 도박을 즐겼다. 그는 불량 청소년들과 사귀면서 하루 종일 술을 퍼마시고 도박을 했으며 좀도둑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나중에 도박 빚에 시달리게 돼 어찌할 방법이 없자 거세해 환관이 됐다. 입궁 후에는 태감이 됐고. 요리 솜씨가 좋아 태자 주상락朱常洛의 생모 왕재인王才人의 요리사가 됐다가 황손 주유교朱由校의 유모 객客 씨와 결탁했다. 나중에 객 씨와 위충현이 의기가 투합해 정치적으로 한 몸처럼 움직였다.

 

그들 둘 모두 야심이 있었다. 황손 주유교의 가까이에 있던 사람으로 주유교를 이용하려 했다. 모든 것을 동원해 어린 황손의 환심을 사뒀다. 어린 황손이 황제에 오르면 황제를 조정해 대권을 손에 넣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은 교묘하게 풀렸다. 만력萬曆 47년 주상락이 즉위했다. 바로 광종光宗이다. 그러나 30여 일만에 홍환紅丸을 먹고 세상을 떴다. 주유교가 즉시 즉위하니 그가 바로 희종熹宗이다. 객 씨는 봉성부인奉成夫人에 봉해졌고 일자무식인 위충현은 동창東廠 제독提督으로 급상승하고 동시에 사례司禮겸필태감이 됐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 놈이 뜻을 얻으면 더욱 제멋대로 군다”고 하던가. 객 씨와 위 씨는 간교함으로 결탁해 권력을 움켜잡고 미친 듯이 정사를 농단하기 시작한다.

 

개인적인 원한으로 위충현은 광종의 선시選侍(선발돼 입궁하였으나 아직 이름이 봉해지지 않은 시녀) 조趙 씨를 조서를 빙자해 죽였다. 황후 장張 씨가 회임하자 객 씨는 그녀가 “어머니가 아들로 인해 귀해질” 것이 두려워 궁녀들을 시켜 독을 이용해 유산시켰다. 유비裕妃가 임신하자 위충현은 또 황제의 뜻이라며 강제로 자진케 했다. 그때 황제 주유교는 “하루 종일 궁중에서 정신없이 방종하게 놀았다.” 무슨 꽃과 새와 벌레와 물고기, 무슨 가무, 여색, 개 사육, 승마(퇴폐적인 생활), 무슨 궁녀들을 조련, 무슨 괴뢰희, 심지어는 목공예에 심취해 도끼와 톱을 들고 다니면서 밥 먹을 시간도 잊을 정도였다. 국가 대사는 수중의 목제 장남감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놀기에 바빠 조정에 나오지 않고 상소문도 보지 않았다. 하물며 군사 방침이야 더 관심밖에 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위충현과 객 씨에게 일임하자 그들은 더더욱 제멋대로 굴었다.

 

위충현은 먼저 선임 사례겸필태감 왕안王安을 죽일 생각을 했다. 황제 주변에서 조정의 일을 돕는 측근들을 없애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도살용 칼을 동림당으로 돌렸다.

 

당시 동림당 사람들은 도찰원都察院, 이부吏部, 병부兵部, 예부禮部 등 요직에 있었다. 당연히 위충현이 조정을 장악하는데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세력이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위충현에게는 스스로 양아들, 양손자로 자칭하는 문신과 무장들이 있었다. 바로 오호五虎, 오표五彪, 십구十狗, 십해아十孩兒가 그들이다. 그들과 동림당을 반대하는 조정 대신들과 강력한 진영을 구축해 동림당 사람들을 잔인하게 정리해 나갔다.

 

천계天啓 4년 도찰원 좌부도어사左付都御史 양련楊漣이 나라를 그르치게 만든 24개의 죄상罪狀을 들어 위충현을 탄핵했다. 위충현이 듣고는 대성통곡하면서 주유교에게 좋지 않은 의도로 고발하는 사람이 있다고 고했다. 조정 밖에 자신을 음해하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있지도 않은 사실을 써서 자신을 탄핵했다고. 그리고 자신은 전심전력으로 황상만을 위해 충성한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이라고도 했다. 객 씨도 옆에서 거들었다. 위충현은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했고 다른 마음을 품은 적이 없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고의로 그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했다. 흐리멍덩한 주유교는 위충현이 자신에게 복종하고 온힘을 다해 자신의 오락거리를 마련해주는데 만족했다. 어르고 달래며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데야, 그보다 충신이 어디 있었을까. 주유교는 상소문도 보지도 않고 없는 일로 만들어 버렸다. 위충현은 어떤 해도 입지 않았고 양련은 오히려 질책 받았다.

 

양련의 상소가 실패로 돌아가자 조정 대신의 공분을 일으켰다. 한꺼번에 70여 명이 위충현을 탄핵했다. 그러나 주유교는 이미 위충현에게 가려져 있었다. 관심도 두지 않고 그저 양련과 좌광두左光斗 등 중신들을 파직시켰다.

 

천계 5년, 위충현은 동림당에 복수하기 위해 대대적으로 옥사를 일으켰다. 그의 도당을 사주해 양련 등이 패장 웅정필熊廷弼의 뇌물을 받았다고 음해하게 했다. 그리고 동림당 영수 양련, 좌광두, 원화중袁化中, 위대중魏大中, 고대장顧大章 등 6명을 체포하고 옥에 가뒀다. 고문을 가하면서 자백을 강요했다. 고대장이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한 것 이외에 나머지 5명은 고문에 의해 죽었다. 이것이 ‘전육군자’ 피살 사건이다.

 

천계 6년, 위충현은 또 동림당 수령 고반룡高攀龍, 주기원周起元 등 7명을 체포했다. 고반룡이 강물에 투신해 자살한 것 이외에 나머지 6명은 옥에서 비참하게 죽었다. 이것이 바로 ‘후육군자’ 피살 사건이다.

 

나중에 위충현은 천하에 게시해 현상금을 걸고 동림당 사람들을 체포하게 했고 전국의 서원을 폐쇄시켰다. 앞잡이들이 날뛰니 세상이 공포에 휩싸였다. 광분해 날뛰는 듯한 박해와 잔혹한 단속 아래 동림당 사람들이 피살된 자가 부지기수였다. 천계 6년 내각 6부와 사방 독무督撫는 모두 위충현의 도당이 차지했다. 위충현의 기세가 하늘을 찔렀다. 위 씨 일족도 모두 높은 관직에 오른 것은 당연했고.

 

 

 

 

조정 대신들이 주소奏疏 중 감히 위충현의 이름을 쓰지 못하고 그를 ‘창신廠臣’이라 불렀으며 내각의 명령서에는 반드시 ‘짐朕과 창신’이라 쓰게 했다. 위충현이 황제와 연명했으니 황제와 같은 자리에 있다는 것을 자임한 것이다. 그리고 각지에 위충현을 위해 사당을 짓게 했다. 심지어 그를 공자에 비유했다. 후안무치한 관원들은 공개적으로 위충현을 ‘구천구백세’라 불렀으니 그 정도가 어땠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그러나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면 끝내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게 되는 것이 세상 이치다. 천계 7년 23세의 주유교가 병사하자 그 동생 주유검朱由檢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풍향계의 끝이 방향을 틀었다. 위충현은 파직되고 귀향길에 올랐다. 도중에 도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진한다. 객 씨도 나중에 죽임을 당했다. 위 씨와 객 씨 두 집안은 모두 참형을 받았다. 그 환관의 도당들도 주살을 당하거나 파직됐다. 요행으로 모면한 자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권세가 하늘을 찌르던 위충현과 그 환관 도당들은 치욕스런 말로를 맞았다. 그러나 명 왕조의 기운은 이미 그들에 의해 거의 소진돼 버렸다. 그런데 환관과 환관의 도당들 때문일까? 황제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주朱 씨 천하 앞에 이제 남은 것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