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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인턴십 서론 … 해녀 멘토의 물질 한 평생

 

멘토의 고향인 평대리는 평평하고 널따란 지대를 뜻하는 ‘벵디’에서 유래한 마을이다. 백사장 해안을 끼고 있어서 모래땅에서는 당근을 주로 생산하지만, 700가구의 주민들 중 130명이 해녀일 정도로 물질이 활발한 해촌이다. 아무리 부자라도 물질을 하지 않으면 돈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웬만한 여자아이들은 어려서부터 바다로 나갔다.

 

딸로 태어났으면 어머니를 도와서 생활비를 버는 게 당연할 때였다. 누가 먼저 모래를 집어오는지, 돌멩이를 많이 주워오는지를 내기하는 게 놀이였다. 10살부터 어머니께서 만들어 준 소중이를 입고 바다에 들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발을 지그시 누르면서 “오래 숨벼보라” 하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물속을 견뎠다.

 

“저 메역 끊엉 와 보라” 하면 얼른 숨비질 해 들어가서 욕심껏 잡아채고 올라왔다. “우리 똘, 잘도 잘 햄저, 이 동네 일등상군 허키여”하는 소리가 얼마나 듣기 좋던지, 더 깊이 들어가서 더 많이 캐내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가 숨이 다 끓어질 것 같아서 “후우∼”하고 가슴 터지게 내지른 것이 숨비소리가 되었다.

 

사실, “아이고, 어머니, 나 죽어지크라” 하고 외칠 수가 없어서 “호오∼잇”하고 목숨껏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가 숨비소리다. 그렇게 시작한 멘토의 숨비소리는 휘파람처럼 명랑한 소프라노가 되었다. 물론 ‘물 소굽에서 밥 행 먹엉 나왐신고라(물 속에서 밥을 해먹고 나오는가보다)’ 하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숨이 긴 것도 어머니의 훈련 덕택이다.

 

학교에 갔다가 샛바람이 불면 조퇴해서 바다에 번안지(파도에 뽑혀서 물결에 밀려오는 상처 난 미역)를 주우러 갔다. 당시는 미역이 돈이 되었다. “어멍, 번안지 봉가와수다(어머니, 번안지 주워왔어요)”하면, 그렇게도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것들을 소중하게 말려서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15세부터 본격적으로 물질을 시작했다. 테왁은 지붕 위에 올려서 키운 콕(박)을 말려서 만들었다. 해녀의 분신이요 표상인 만큼, 아버지는 콕테왁 만들기에 정성을 다하였다. 그리고 한라산에 가서 미(억새)를 뽑아다 말린 다음 여러 겹을 꼬아서 미망사리를 짜주셨다. ‘열다섯이민 작산 비바리(다 큰 처녀)’ 라면서 테왁과 망사리를 손수 만들어 주신 아버지의 마음은, 한 평생을 해녀로 살아가는 딸에게 든든한 응원이 되었다.

 

스무살이 되던 해에 “야, 우리 육지 가게” 하는 친구들을 따라 경상남도 비진도로 초용(처음 가는 육지물질)을 떠났다. 돈을 많이 벌어다가 어머니를 돕고 싶은 게 간절 한 꿈이었다. 짐을 비진도에 두고 청산도까지 난바르(배를 타고 멀리 가는 물질)를 갔고, 한산도 주변을 돌아다니며 배에서 숙식을 했다.

 

멀미가 심해서 입에다 수건을 틀어막았다. 얼얼하게 시린 손발이 발갛게 부풀어 올랐다. 달 밝은 밤이면 얼마나 서럽던지, 새서리 섯구석이나 술빌 똘(깊숙한 바다에서도 물질할 딸)’이라던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 울었다. ‘우리 동네에도 저 달이 뜨겠지’생각하면 저절로 어머니 얼굴이 달빛에 어렸다.

 

작업은 주로 전복, 미역, 천초(우미)를 했다. 2월 구정을 끼고 떠나서 8월 추석을 앞두고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기나긴 6개월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부산 국제시장에서 귀향선물을 마련하였다. 어머니를 위해 벨벳치마 감을 샀고, 동생들에게는 신발을, 동네 사람들을 위해서는 사과를 샀다.

 

친구들과 함께 당시 유행이던 나팔바지를 입고 긴 머리를 휘날리며 귀향하는 딸을, 어머니는 아침부터 동네 어귀에서 기다렸다. “아이고, 나 똘, 다 컸구나게. 이제는 상군이여!”하는 어머니의 얼굴엔 저녁놀을 받은 붉은 웃음이 본조갱이(전복껍데기)처럼 빛났다. 당시에는 해녀들이 육지물질을 갔다가 돌아오는 일이 동네의 행사요 잔치였다. 요즘 같으면 마을 입구에 환영 현수막이 내걸렸으리라.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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