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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4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원숭환袁崇煥(1584-1630), 자는 원소元素, 광동廣東 사람으로 만력萬曆 연간에 진사로 관직에 앉은 명대의 유명한 군사가다. 천계天啓 2년(1622) 요동遼東을 지키겠다고 자청해 누차 후금後金 군대의 공격을 방어했다. 전계 6년 숭정崇禎에 의해 병부상서가 돼 계요薊遼 군대를 통솔하게 된다. 후에 숭정이 그의 충심을 의심해 주살해 버렸다.

 

명明 숭정 3년(1630) 9월 26일 원숭환은 능지처참 당했다. 그는 명나라 말기 후금의 공격을 방어했던 명장이었다. 야심만만한 후금 정권에 타격을 준 명나라 말기 최후의 보루였다. 숭정 2년(1629) 12월 황제는 ‘의향議餉(군량을 상의함)’을 빌미로 원숭환을 갑자기 경성으로 불러들이고는 비밀리에 체포해 하옥시켰다. 8개월 후 원숭환은 능지처참하기 위해 형장으로 보내졌다. 원숭환이 묶여 형장에 도착했을 때 미처 망나니가 손을 쓰기도 전에 북경의 수많은 백성들이 달려들어 그의 몸을 뜯어 먹었다. 내장이 밖으로 쏟아질 때까지. 망나니는 규정에 따라 한 칼 한 칼 그의 몸을 도려냈다. 수많은 백성들은 곁을 에워싸 욕을 해댔다. 그리고 그의 살을 사다가 입으로 씹어대면서 ‘한간漢奸’이라 욕을 했다.

 

숭정은 왜 충신 원숭환을 비참하게 주여야 했을까? 이 역사의 수수께끼에 대해 아직도 원만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원숭환은 사람됨이 관대하고 용기와 지모를 갖추었다고 평가받는다. 그는 사람들과 군사軍事를 담론하기를 즐겼다. 나이가 들어 퇴역한 장군과 사병들을 만나면 변방의 군사 상황을 청해 들었다. 젊었을 때부터 변방의 업무에 뜻을 두었다. 그는 젊었을 적부터 ‘호사豪士’를 자처해 여행을 즐겼다. 거인擧人이 된 후 진사 시험을 봤으나 여러 번 낙방했다. 북경에서 과거에 응할 때마다 여행을 떠나 중국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친구들과 밤을 새며 이야기 나누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 얘기의 내용은 대부분 군사와 전쟁에 관한 것들이었다.

 

원숭환이 진사가 된 후 소무현邵武縣(현 복건성)의 지현知縣을 역임했다. 천계 2년 업무 보고를 위해 북경으로 갔다. 평상시에 고담준론을 즐겼던 그는 북경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요동 군사에 대한 견해를 표출해 정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는 어사御使 후순侯恂(재자才子 후방역侯方域의 부친)의 관심을 얻게 되면서 그를 군사적 재능이 있다고 조정에 추천하게 된다. 그렇게 하여 그는 병부직방사兵部職方司 주사主事가 됐다. 정7품 지현에서 정6품 주사로 승진한 것이었다. 지방관에서 중앙 정부의 국방부에서 일을 하게 된 셈이다.

 

원숭환이 병부 주사를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왕화정王化貞 대군이 광녕廣寧에서 전멸 당한다. 온 조정이 겁에 질려 어찌 할 줄을 몰랐다. 후금後金(후의 청淸나라) 군대는 파죽지세였다. 만력 46년부터 그때까지 4년여 동안 명나라 군대 수십만을 전멸시키고 무순撫順, 개원開原, 철령鐵嶺, 심양瀋陽, 요양遼陽을 점령하고 산해관山海關을 뚫으려 하고 있었다. 명나라 군대는 연전연패 당하면서 산해관조차 지킬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게 놓였다. 산해관이 뚫리면 후금 군대는 곧바로 북경으로 내달릴 것이 분명했다.

 

도성의 관료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원숭환은 군세를 살피러 단기필마로 출관했다. 갑자기 원숭환 주사가 보이지 않자 병부의 관원들 모두 놀랐고 가족들도 그가 어디로 떠났는지 알지 못했다. 얼마 되지 않아 북경으로 돌아온 그는 상관에게 산해관 밖의 형세를 상세히 보고했다. 그리고 “저에게 병마와 군량을 주시면 저 혼자서라도 산해관을 지킬 수 있습니다”라고 선언했다.

 

평상시라면 원숭환의 상관은 오만불손하다며 책망하고 삭탈관직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황망해 어떠한 대처 방법도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의 말을 듣고 이치에 맞는다고 생각해 병비첨사兵備僉事로 승진시키고 산해관 수비를 전담토록 했다. 원숭환은 마침내 꿈에 그리던 일을 맡게 됐다. 야심차게 전선으로 나아갔다.

 

원숭환은 곧바로 임전태세를 갖추기 위한 공사를 진행했다. 부분 공정을 일으켰고 병사들을 모집했다. 엄격하게 군대를 훈련시켰다. 예를 들어 부족액을 허위로 보고한 상황을 접하고는 책임을 져야 하는 군관을 즉결처분해 군대의 부패를 방지했다. 당시 영원永遠 전선을 방어하는 지휘관 조대수祖大壽는 군사적 안목이 부족해 축성築城 방어 전략에 비관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감군監軍 대학사 손승종孫承宗에게 반박하면서 영원 수비 공정을 지연시키고 있었다. 천계 3년 9월, 원숭환이 영원에 도착했다.

 

 

 

 

원숭환은 도착하자마자 대대적으로 축성 공사에 임했다. 성벽의 높이는 3장丈 2척尺, 성벽 위의 성가퀴는 6척 높게 쌓게 했고 성벽의 넓이는 3장으로 축성토록 했다. 그리고 조대수를 감독관으로 파견했다. 원숭환은 장병들과 동고동락하고 백성들을 잘 대접해 가족처럼 대하자 축성 때가 되면 모든 사람들이 힘을 보탰다. 이듬해 완공된 넓고 튼튼한 성벽은 관외의 요지가 됐다. 그 성벽은 원숭환 평생의 업적의 기초가 됐다. 그 성벽은 후금 군대를 21년 동안이나 막아섰다.

 

원숭환이 새로운 사업을 진행하려 할 때 위충현魏忠賢이 손승종을 전근시켰다. 위충현은 문무백관이 주는 뇌물을 좋아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고. 손승종은 10여 만의 병사를 통솔하고 있었다. 군량미도 많았으니 크게 떼어 ‘구천세九千歲’(황제는 만세萬歲이니 환관 위충현은 스스로 구천세라 부르도록 했다)에게 봉납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손승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위충현의 미움을 사 송승종을 대신해 알랑방귀에 능한 고제高第를 보내 요동을 다스리도록 했다.

 

고제는 부임하자마자 관외의 땅은 지킬 수 없다고 말하고 관외 각 성의 수비군들을 모두 산해관으로 철수하도록 했다. 그때는 후금의 군대가 공격한 것도 아니라서 철군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일단 공격을 당하면 필패할 것을 염려해 비교적 안전한 곳으로 철군하려 했던 것이다. 원숭환은 당연히 극렬하게 반대했다. 고제에게 “병법에는 물러설 때와 나아갈 때를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여러 성들이 이미 수복됐는데 어찌 아무렇게나 철군하라 하십니까? 금주錦州, 우둔右屯 방위가 흔들리면 영전寧前이 충격 받게 되고 산해관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관외에 뛰어난 장수를 보내 수비하게 하면 위험하지 않습니다”고 주청했다. 고제는 듣지 않고 철군 명령을 내렸다.

 

후금은 명나라 대군이 철군하는 것을 보고 명 왕조의 허점을 파악해 냈다. 고제는 무능하고 원숭환은 지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에 천계 6년 정월 대대적으로 요하遼河를 건너 영원을 침공했다. 긴급한 상황에서 원숭환과 대장 만계滿桂, 부장 좌보左輔, 주매朱梅, 참장 조대수, 하가강何可綱 등이 사수하기로 결심했다. 모든 병사들이 결사 항전했다.

 

당시 후금의 군대는 모두 변발辮髮을 하고 있었다. 한족들은 ‘변발 병兵’이란 세 글자를 들으면 벌벌 떨었다. 이자성李自成 부하들 모두 여러 전투에 참가했던 용맹스런 군인들이었다. 동부를 석권하고 북경을 함락시켰으며 산해관 앞에서 오삼계吳三桂 군대에 맞닥뜨렸을 때에도 위풍당당했다. 그런데 후금의 변발 군대가 갑자기 출현하자 이자성 군대는 “변발 병들이 왔다! 변발 병들이 왔다!”며 공포에 휩싸여 20만 대군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면서 일패도지했다. 이자성은 급히 북경을 빠져나와 서쪽으로 도망을 쳤는데 그렇게 ‘대순大順’ 왕조는 멸망했다. 그때 ‘변발 병’은 ‘무적 군대’의 대명사였다.

 

원숭환은 이자성처럼 전투에 능하지도 않았고 그의 부하들도 용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침착성을 잃지 않고 결의를 다졌다. 이자성처럼 황제가 되려는 욕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실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면 강직해진다”는 말처럼 그는 이자성보다도 강했던 것이다.

 

원숭환이 영원 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는 명나라와 후금이 전쟁을 벌인 8년 이래 처음 얻은 승리였다. 원숭환의 영원 대첩은 군사적으로 보면 그리 중요한 뜻을 갖지는 못한다. 후금의 주력을 훼멸시킨 것도 아니요 후금 군대의 전투력을 약화시킨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중요했다.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민심의 동요를 막을 수 있었다. 한족 군대도 후금의 군대를 퇴패시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전투의 승리로 후금에 투항했던 한족 관리와 사병들도 도망쳐 나왔다.

 

후금을 세운 누르하치는 보기 드문 군사 천재였다. 그가 죽자 역사적으로 대단하다 평가받는 인물이 계승한다. 홍타이지(황태극皇太極)가 바로 그다. 군대를 지휘하는 홍타이지의 능력은 부친보다는 못했지만 정치적 수완은 부친을 훨씬 능가했다. 원숭환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누르하치 장례를 틈타 원숭환은 사람을 파견해 조문하고 후금의 허실을 정탐했다. 그는 그때 과감하게 후금에 화의和議를 청했다. 원숭환은 실제적 상황에서 출발해 강화를 주장했지만 조정 대신들은 부화하지 않았다. 더나가 요동경략遼東經略왕의 대신들은 원숭환을 탄핵했다. 송宋나라가 금金나라와 강화를 맺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지른 것과 다름이 없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당시 명나라의 상황은 송나라의 경우와는 전혀 달랐다. 남송南宋 때에 금나라는 중국 북방 전체를 점령하고 있었다. 강화한다는 것은 실지를 회복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명나라 천계 연간에는 후금이 요동만을 점령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요서遼西는 여전히 명나라 관할이었다. 잠시 강화를 한다고 해도 그 영향은 그리 크지 않았다. 송나라와 금나라의 강화는 송나라 입장에서는 굴욕이었다. 매년 조공을 바쳐야 했고 송나라 황제는 신하라 칭해야 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명 왕조 황제보다 한 단계 낮추어 부르는 것을 원했다. 명 왕조의 여러 신하들보다 한 단계 높여주면 됐었다. 그렇게 본다면 송과 금의 강화와 명과 후금의 화의는 다른 것으로 같이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원숭환과 홍타이지 사이에 사신이 왕래했지만 조정 대신들은 화의를 국가의 재앙으로 여기면서 담판은 성사되지 못했다.

 

 

 

 

후금이 오랫동안 영원을 공략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자 홍타이지는 원숭환을 승리에 걸림돌이 되는 적수라고 판단하게 된다. 그리고 ‘반간계反間計’를 이용해 제거하기로 마음먹는다. 그 방법은 적중했다. 의심이 많은 숭정 황제는 원숭환을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때 외부에서는 원숭환이 군대를 보유하고 자신의 지위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고 적들을 내버려 두고 있다는 질책의 상소가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대신들도 당시 그가 제멋대로 후금과 화의를 청한 것을 들어 비난을 쏟아냈다.

 

그 때 어사 조영조曹永祚가 돌연 간세 유문서劉文瑞 등 7인을 체포했다. 그들은 원숭환의 명을 받아 적과 내통해 후금 군대에 서신을 보냈다고 자백했다. 숭정 2년 12월 1일 원숭환은 체포돼 하옥된다. 임금을 속여 모반을 획책하고 간악한 무리들과 결탁해 나라를 팔아먹고 제멋대로 장수를 참하면서 외족과 결탁했으며 군량을 팔아 착복했다는 등등의 죄목을 씌웠다. 이런 죄목 하나하나 헤아려 보면 어느 것 하나 확실한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렇다면 숭정 황제는 어째서 국가 안위를 책임진 장군을 죽여야만 했을까? 이제 원숭환을 대하는 숭정 황제의 태도가 어떻게 변했는지를 알아보자.

 

천계 7년 8월 명 희종熹宗이 병사하자 그의 동생 주유검朱由檢이 등극한다. 17세의 소년 황제는 침착하게 권력을 전횡하던 환관 위충현을 처리한다. 먼저 그의 도당들을 하나씩 정리한 후 그를 자살의 지경까지 몰아간다. 그의 그런 권력 투쟁의 처리 방법은 고단수였다. 이듬해 4월부터 숭정 황제는 원숭환을 병부상서 겸 우부도어사右副都御使로 삼고 계薊, 요遼를 통솔하고 등주登州, 내주萊州 및 천진天津 등지의 방어를 책임지게 했다. 그리고 상방尙方 보검을 내려 재량권을 주었다.

 

처음 숭정과 원숭환이 만났을 때 생기발랄한 황제를 대면한 원숭환은 시원시원하게 “모든 계획과 책략은 상소문 속에 있습니다. 신은 지금 황상의 영명하심에 감복했습니다. 신을 믿으시어 스스로 행할 권한을 내려주셨으니 5년 이내에 요동을 평정해 모든 땅을 회복하겠나이다”라고 했다. 급사給事 허예경許譽卿이 원숭환에게 어떤 방책을 가지고 5년 안에 요동을 평정하겠다는 것이냐고 물었다. 원숭환은 “내가 그렇게 얘기한 것은 황상을 안심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했다. 허예경은 숭정을 1년 가까이 모시고 있던 터라 황제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원숭환은 처음 황제를 만난 것이었고. 허예경은 원숭환에게 “황상은 무척 영명하신 분입니다. 어찌 아무렇게나 상소를 올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5년이 다 됐는데도 요동 땅을 평정하지 못하면 어찌하시겠소?”라고 경계시켰다.

 

원숭환이 듣고는 마음속으로 찔끔했다. 자신이 방금 한 말이 과장이 심했다는 것을 그때서야 알아차린 것이다. 그가 숭정 황제에게 5년 안에 후금을 평정하고 모든 요동 땅을 회복할 수 있다고 한 것은 충동적으로 내뱉은 성급한 말이었다.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원숭환은 숭정과 첫 대면에서부터 큰 실수를 저지른 것이었다. 후세 사가들 중 일부는 원숭환이 아무 생각 없이 함부로 지껄인 게 차후 숭정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원인이 됐다고 보기도 한다.

 

원숭환이 요동에 부임할 때 큰일을 처리한다. 바로 피도皮島 진수鎭守 모문룡毛文龍을 처결한 일이다. 원래 모문룡은 일방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군마와 군량을 확인 검토도 하지 않고 매해 급료 수십만을 거둬들였으나 병사들에게는 매월 세 말 반을 발급할 뿐이었다. 군량을 빼돌려서는 마시馬市를 열고 제멋대로 외국과 무역했다. 모문룡의 학정을 뿌리 뽑기 위해 원숭환은 모문룡을 죽여 버린다. 영원寧遠으로 돌아간 후 상소를 올려 “모문룡은 대장으로 신이 마음대로 주살할 권한이 없습니다. 신이 죽을죄를 범했으니 황상의 처벌을 삼가 원하옵니다”라고 했다. 숭정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으나 모문룡은 이미 죽어버렸고 현재 원숭환이 최선을 다해 변방을 지키고 있는 까닭에 상을 내리라는 조서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모문룡 주살’에 대해 당시 여론은 모문룡을 동정하는 쪽으로 쏠려 있었다. 일반 조정 대신들은 모문룡이 죄가 있다면 황제만이 주살할 권한이 있다고 여겼다. 황제의 통치 수단은 상을 내리거나 벌을 주는 것뿐이었다. 원숭환이 제멋대로 대장을 죽였으니 군주의 권한을 침범한 것이었다. 본래 성정이 편협하고 모질었던 숭정 황제는 그 일로 원숭환에 대한 불만이 쌓이게 됐고 후에 원숭환을 주살한 원인이 됐을 것으로 추론한다.

 

숭정 황제와 원숭환 둘의 성격을 비교해 보면 어쩌면 원숭환이 죽임을 당하는 비극 이외에 다른 장면은 기대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분석에 따르면 숭정 황제 주유검은 정신분열을 일으키기 쉬운 기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모시기가 지극히 힘든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그를 “통치에 조급성이 있고 이재에 각박했으며 사람을 부림에 급히 몰아쳤고 법을 급하게 시행했다”고 하면서 ‘조변석개’ 성향의 인물로 평가한다. 말이 통하지 않거나 마음에 들지 않은 일이 생기면 사사로이 분노를 표출하며 까닭 없이 사람을 죽였다.

 

숭정 황제는 재위 17년 동안 50명의 대학사(재상 혹은 부재상에 해당)를 갈아치웠다. 병부상서를 역임한 사람은 14명이나 됐다. 숭정이 주살하거나 자살로 몰아간 지휘관 혹은 총독總督은 원숭환 이외에도 10명이나 됐다. 주살한 순무巡撫는 14명,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은 1명이다.

 

원숭환의 몸에 사직의 안녕이 달려 있었다. 숭정 황제가 주시하고 있던 중요 인물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 대면했을 때 원숭환이 “5년 이내에 요동을 평정하겠다”는 언약을 함으로써 살의는 이미 만들어 졌다. 이후 그는 황제에게 군량 및 급료를 요구하고 화의를 주창했으며 모문룡을 주살하면서 비극은 서서히 구체화됐다. 이처럼 살의가 쌓이다가 후금 군대가 북경 바로 앞까지 공략하자 비극은 절정으로 치달았다. 홍타이지의 ‘반간계’가 없었더라도 숭정 황제는 아마도 다른 사건, 다른 핑계를 대고 원숭환을 주살했을 것이다.

 

숭정 황제는 어째서 오랫동안 원숭환을 수감시켰다가 주살했을까? 후금 군대가 하북 동쪽 영평永平 등 요충지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북경을 위협하다가 6월이 돼서야 장성 밖으로 퇴각했다. 그 이전에 숭정은 감히 산해관을 지키고 있던 부대를 손볼 수 없었다. 북경이 안전하다는 판단이 서자 비로소 주살했다. 이전에는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감히 죽이지 못했던 것이다.

 

원숭환의 비극은 명 왕조의 비극이다. 아니 어쩌면 봉건 집권제도 아래에서 생활했던 중국인 전체의 비극일지도 모른다. 만약 원숭환이 모셨던 군주가 정신분열 성향의 숭정이 아니었다면 후금, 즉 나중의 청나라 군대는 영원히 산해관을 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결국 전제주의 국가의 폐해로 인해 백성들만 고통을 받는 역사가 되풀이 된 것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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