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47)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숭정崇禎(1610-1644) 주전검朱田檢, 광종光宗의 다섯째 아들이다. 즉위 후 간악한 환관 위충현魏忠賢을 내쫓고 간신들을 주살하면서 개혁의 물줄기를 주도했다. 그러나 명明 왕조는 이미 멸망의 길로 들어서 있었다. 만청滿淸 군대가 다가서고 있었고 이자성李自成은 성을 에워싸고 있었다. 결국 망국의 군주가 됐다. 숭정 17년(1644) 3월 이자성이 북경을 공격하자 북경 매산煤山에서 자진했다고 한다.

 

숭정 황제 주전검은 명 왕조 최후 황제다. 이자성이 북경을 무너뜨리자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이야기는 확정된 것이 없다.

 

‘문화대혁명’ 이전 북경 경산景山공원 동쪽의 산기슭에 오래된 홰나무가 한 그루 있었다. 숭정 황제가 목을 맨 자리라고 전해 온다. 그러나 ‘문혁’의 대참사를 겪으면서 그 나무는 사라졌다. 일반적으로 얘기하면 이자성이 북경을 무너뜨리자 숭정 황제는 황급히 도망치다가 매산 동쪽 기슭의 나무에 목을 매 죽었다고 사람들은 생각을 한다. 명나라 때의 매산이 지금의 북경 자금성紫禁城 뒤쪽에 있는 경산景山이다.

 

 

 

 

숭정 황제가 자진했다는 이야기는 넓게 퍼져 있다. 그러나 많은 의문들이 자리 잡고 있다. 1644년 3월 19일 이자성의 군대는 북경의 자금성을 공격해 승천문承天門으로 들어와 황궁을 점령했다. 당연히 숭정 황제를 찾아 나섰다. 『영황소식烈皇小識』 8권 기록에 보면 농민군들이 “궁정을 샅샅이 뒤졌으나 발견하지 못한” 후 상금을 걸고 “선제先帝(숭정)를 바치는 자는 만금을 내리고 백작에 봉할 것이다. 숨겨준 자는 구족을 멸할 것이다”라고 내걸었다. 그렇게 했어도 22일이 지난 후에야 숭정의 유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오랫동안 숭정을 찾지 못했을까? 경산은 원래 황실 내원內苑이었다. 만약 숭정이 그곳에서 죽었다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발견될 수 있었겠는가.

 

이 문제에 대해 책마다 다른 관점을 피력하고 있다. 『명사明史』 「이자성전李自成傳」과 「왕승은전王承恩傳」에서는 숭정 황제가 목을 맨 곳은 경산의 홰나무가 아니라 ‘수황정壽皇亭’에서 목을 맸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실록․숭정실록』17권, 『명사』309권 「유적전流賊傳」, 『명사기사본말』79권 등에서 “19일 정미丁未, 날이 아직 밝기도 전에 황성을 지킬 수 없어 종을 치며 백관을 불러 모이도록 했으나 오는 자가 없었다. 다시 매산에 올라 옷깃에 유조를 쓰고 산의 정자에서 스스로 비단으로 목을 맸다” 같은 기록이 보인다. 그렇게 황제가 수황정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대 이전에는 경산에 건축물이 없었다. 청대에 와서야 정자 다섯이 들어섰다. 그러니 ‘수황정’에서 목을 매 죽었다는 이야기는 믿을 수 없다. 명대에 ‘수황전壽皇殿’은 있었으나 산 뒤쪽(현 소년궁少年宮)에 있는 것으로 숭정 황제가 목을 맸다는 곳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

 

명나라 말기에 갑신지변甲申之變(주유검朱由檢의 대명大明, 복림福臨의 대청大清, 이자성李自成의 대순大順 3대 정권이 국가 최고 통치권을 쟁탈하려는 전쟁을 가리킨다)을 몸소 겪은 전겸익錢兼益이 쓴 『갑신전신록甲申傳信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옷과 신발을 갈아 신고 오승은과 함께 만세산萬歲山에 올라 건모국巾帽局에 이르러 스스로 목을 맸다.” 이 기록은 숭정이 농민봉기의 격랑 속에서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심리변화 과정과 부합된다.

 

숭정 황제는 강퍅하여 남의 의견을 듣지 않고 고집을 피우는 성격을 지녔다. 그런 성격이 항복도 못하고 순국도 못하게 만들었다. 이자성의 대군이 북경을 함락시킬 때 3월 8일 태감 의복으로 갈아입고 숭문문崇文門, 정양문正陽門, 조양문朝陽門, 안정문安定門 등을 돌아다니며 밖으로 도망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그가 황제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자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안 숭정은 낙담해 스스로 목을 맸다. 그가 죽을 때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리고 하얀 두루마기, 남포, 하얀 바지를 입고 있었으며 한쪽은 맨발이었고 한쪽은 양말이 신겨져 있었다”고 한다. 궁지에 몰려 어쩔 수 없이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형상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

 

 

 

 

이것과는 다른 관점도 있다. 『명계북략明季北略』에 숭정이 해당화에 목을 맸다고 했다. 당시 황궁 내 건모국巾帽局 부근의 회룡관回龍館에 해당화가 무성했다. “회룡관에는 해당화가 많았다. 옆에 육각의 정자가 있었는데 꽃이 필 때마다 황제가 궁녀들을 찾았다.” 이는 명대 황제가 그곳을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이 된다. 숭정 황제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곳으로 가서 목을 맸다는 말도 믿을 만하다.

 

황운미黃雲眉는 『명사고증』에서 “황제는 만세산에서 붕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세산은 금나라 사람들은 경화도瓊花島라 했다. 원나라 지원至元 4년에 궁성을 건축했다.” 이 말은 숭정이 지금의 북해北海의 백탑산白塔山에서 죽었다는 것이 된다.

 

홍루몽 전문가 유평백兪平佰은 「숭정은 어디에서 목을 맸는가?」라는 문장에서 숭정은 “북쪽으로 궁정을 나서 매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외국에서 가져온 대포를 살폈다. 그는 또 이자성에게 혈서를 써 백성들을 억압하지 말고 불충한 관료들을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런 후 스스로 관리원이 살고 있는 조그마한 집 서까래에 목을 맸다”고 했다.

 

아직도 34살의 숭정이 어디에서 죽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다. 그러나 국가가 멸망할 때 일국의 군주 숭정이 택한 모습은 실로 이해하기 어렵다. “짐이 곧 국가다” 식의 시대에 군림하던 군주가 스스로 택한 마지막이 글쎄…….

 

그렇다면 망국의 시기에 명나라 대신 ‘사가법’의 죽음에 대해 살펴보자.

 

사가법史可法(1601-1645), 자는 헌지憲之, 하남河南 상부祥符(현 개봉開封) 사람으로 숭정 때 진사다. 일찍이 서안부추신西安府推信,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를 역임하면서 농민봉기를 진압한 공이 있어 남경부상서南京部尙書가 됐다. 명나라가 멸망한 후 그는 남경에서 복왕福王을 옹립해 홍광제弘光帝로 삼고 청나라 아이신 기오로(애신각라愛新覺羅) 할라(씨氏) 도르곤(다이곤多爾袞)이 여러 차례 항복을 권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청나라 군대가 남하 후 양주揚州 성이 함락되고 피살됐다.

 

청나라 순치順治 2년(1645) 청나라 군대가 대거 남하했다. 명나라 독사督師 사가법은 군민의 힘을 합쳐 양주 성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음력 4월 25일 청병淸兵이 성을 함락시킨 후 10일 동안 대대적으로 학살을 자행한다. 명나라 장수 사가법의 행방에 대해 동시대의 홍승주洪承疇는 “과연 죽었는가? 아니면 죽지 않았는가?”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사가법의 향방에 대한 기록과 전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사가법이 성이 함락될 때 피난했다고 한다. 구체적인 피난 과정은 각기 다르다. 첫 번째,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와 도망쳤다고 한다. 『명계남략』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4월 25일 청병이 명나라 총병總兵 황비黃蜚의 구원병이 도착했다고 거짓으로 알리자 사가법은 서문을 열어 통과를 허락했다. 청병이 성으로 들어오자마자 명나라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사가법이 성위에서 그 상황을 보고 이미 되돌릴 수 없음을 알고 칼을 뽑아 자결하려 했으나 좌우에서 말렸다. 그리고 총병 유조기劉肇基와 함께 줄에 매달려 성을 내려와 잠적했다고 한다. 두 번째는 노새를 타고 성을 빠져나갔다고 한다. 건륭乾隆 『강도지江都志』에 양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사가법이 “하얀 노새를 타고 남문을 빠져나갔다”라는 말을 기록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사가법은 양주 전투에서 포로가 됐다고 여기고 있다. 『청실록』은 “양주 성을 공략해 각부閣部 사가법을 붙잡아 군사들 앞에서 참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사明史』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가법은 칼을 뽑아 자결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부장들에 의해 작은 동문에 이르렀는데 청병이 붙잡았다. 사가법은 큰소리로 ‘내가 독사督師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죽임을 당했다.”

 

사가법의 후손 사덕위史德威는 『유양순절기략維揚殉節紀略』에 양주 성이 함락될 때 사가법이 자결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청병에게 포로로 잡혔다고 기록했다. 두어두어(다탁多鐸)가 사가법을 “손님을 맞이하듯이 대했고 선생이라 불렀다.” 그리고 항복할 것을 권하며 “나를 위해 강남을 수습하면 중임할 것이다”고 했다. 사가법이 말했다. “나는 천조를 위한 중신이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면 만세의 죄인이 되지 않겠는가! 내 머리가 잘릴지언정 몸은 굽히지 않을 것이다. ……성이 멸망함과 동시에 나도 죽은 것이다. 이미 뜻을 굳혔다.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해도 달게 받을 것이다.”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고 기록했다.

 

이외에 사가법은 4월 20일 전후로 5장의 유서와 모친과 부인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그중에 “一死以報國家(일사이보국가)”의 말이 있다. 이로써 그는 일찍부터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하겠다는 마음을 굳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그가 도망을 쳤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그리고 그의 부장 우조기는 양주 성이 함락되기 전에 이미 화살을 맞고 죽었다. 그런 그가 사가법과 함께 줄을 타고 성 밖으로 도망쳤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

 

그러나 망국의 충신에 대해 사람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춰 이야기를 전했다. 사가법이 강에 빠져 죽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가법이 성을 빠져 나간 후 말을 타고 강을 건너다 물에 빠져 익사했다는 얘기다. 믿을 수 있는가? 혹자는 동문을 통해 성을 빠져 나갔으나 청병에 의해 가로막히자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강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고 한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인가? 이는 청병이 양주 성을 함락시킬 때 사가법이 갑자기 잠적해 버려 행방을 모른다는 얘기에서 와전된 것이다.

 

또 이런 말도 있다 : 계육기計六奇가 순치順治 6년(1649)에 출장을 갔는데 도중에 가흥嘉興 사람을 만났다. 자신은 양주 성이 함락될 때 도망친 사람이라 소개했고 그때 사가법의 행방이 묘연했다고 전했다고 한다.

 

왜 명나라를 위해 청나라와 끝까지 투쟁했던 사가법에 대해 정사에 쓰인 대로 국가를 위해 순국했다는 얘기 이외에 도피했다는 등 여러 가지 이야기가 전해지는 걸까? 군주는 뒷산에서 목을 맸는데 신하의 우국충정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무엇일까? 봉건제도 하의 중국의 본질이 그대로 투영된 것을 아닐까?<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