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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회] 제주의 왕자는 누구인가?

 

흔히 왕자는 왕의 아들을 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왕을 왕이라 부르지 않고 성주라 불렀고, 왕자는 왕의 아들이 아닌 성주 다음의 벼슬이름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씨 가문에서는 성주집안인 고씨로부터 탐라왕자를 이어받아 6대(1270-1402: 창우昌祐, 공제公濟, 승서承瑞, 신보臣輔, 충걸忠傑, 충세忠世)에 걸쳐 세습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탐라왕자손’이 라고 곧잘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탐라왕자에 대한 기록들을 역사서 여기저기에서 모아보았다.

 

1270년 삼별초 김통정 장군이 애월읍 하귀리로 상륙하여 토성을 구축하니, 도내 민심은 풍운에 휩싸였다. 성주 고인단과 왕자 문창우(탐라부사耽羅副使로 재임하다 감란구민戡亂救民으로 탐라왕자에 봉작封爵됨)가 이를 왕께 알리니, 왕의 친병 김방경 장군과 몽고군이 이를 토벌하고, 원은 이후 탐라를 점령하려고 초토사(招討司) 를 설치하였다.

 

100년 뒤인 1373년(공민왕 22년) 원과 결탁한 목호가 관리를 살해하니, 왕자 문신보가 아우 문신필을 조정에 보내 이를 아뢰었다. 1374 년 명나라 황제가 고려 조정에 말 진상에 대해 ‘이전에 사막을 징벌 하러 갔을 때 길이 멀어서 말의 손실이 많았다. 이제 대군(大軍)이 또 징벌하러 간다.

 

내 생각에는 고려국에는 원나라 조정에서 말 2만 필을 남겨두고 사육하였으니 많이 번식하였을것인 즉 좋은 말 2천 필을 뽑아 보낼 것’을 요구한다. 이에 고려 조종에서는 탐라에서 말을 가져오게 하는데, 목호들이 이를 거부하자 최영 장군에게 수많은 병선과 정예군을 이끌고 탐라정벌에 나서게 했다. 이에 최영 장군은 전함 314척, 군사 25,605명을 거느리고 명월포로 상륙하여 원의 세력을 뿌리 뽑으니, 탐라는 원의 백년지배에서 해방되었다.

 

다음은 당시 탐라백성 사이에서 불려졌던 노래 가사이다.

 

어화 우리 창생들아 이네 말씀 들어 보소 / 삼신산중 제일 영주산 은 성주 왕자 창업지라 / 산에서 초기 나고 들에서 오곡 나며 / 전원에서 귤유 나고 바다에서 생선 나서 / 우리민족 자작자급 풍성하게 되었으니 / 농상공을 장려하며 우리생활 이어보세 / 하늘이 순응하 여 원국(元國)을 망케 하니 / 석질리가 명장이나 최영 장군 당할소냐/ 만세 성주 왕자 만만세 천세 최영 장군 천천세

 

원나라를 몰아낸 2년 후인 1375년 11월, 제주에서는 차현유 등이 관청을 불사르고, 안무사•목사•마축사 등을 죽이며 반란을 일으키자, 성주 고실게(고신걸)•왕자 문신보 등이 군졸을 모아 반란자들을 격퇴하였다. 1402년(태종 2년) 조선조정의 강력한 통치정책으로 시운이 불리함을 통감한 성주 고봉례와 왕자 문충세 등이, 성주와 왕자 칭호가 참월(僭越)하고 월권한 듯 하여 이를 고치기를 조정에 청하니, 성주를 좌도지관으로, 왕자를 우도지관으로 개칭하였다.

 

탐라왕자 6세 문충세는 탐라왕자 4세 문신보의 4자 중 둘째이며, 탐라왕자 5세 문충걸의 아우이다. 이후 좌•우도지관에 대한 예우가 계속되어 오다가, 1445년(세종 27년) 소관호수(小官戶數)가 많 다는 이유로 마침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렇듯 탐라라는 국호와, 탐라를 다스렸던 성주와 왕자라는 벼슬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데서도 역사는 승자의 논리라는 명구가 새 삼 떠오른다.

 

고려는 탐라의 통치권을 원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수복한 1295년 (충렬왕 21년)부터 원나라의 다루가치를 대신하여 최서를 초대 목 사로 임명했다. 이때부터 탐라가 제주로 불리기 시작하고, 30명의 목사가 제주에 부임하였다. 하지만 이후에도 원나라의 세력을 등에 업은 목호들에 의해 5명의 목사가 피살될 만큼, 제주는 사실상 원나라 지배에 놓였다.

 

고려가 탐라를 제주로 부르는 것과 달리, 원 나라는 탐라라는 지명을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탐라라는 독립국을 점령하였다는 원나라의 주장에 대응하기 위하여, 고려는 초기에 사 용하던 탐라 대신에, 물 건너의 고을이란 뜻인 제주로 고쳐 부른 것 으로 추정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를 두고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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